세계문화유산(349)/ 이탈리아

 

모데나의 대성당, 토레 치비카, 피아차 그란데

(Cathedral, Torre Civica and Piazza Grande, Modena; 1997)

 

 

 

 

 

 

 

 

 

 

 

 

 

 

  모데나는 에밀리아로마냐 주[Emilia-Romagna Region] 모데나 시[City and Province of Modena]에 속한다. 12세기 위대한 예술가인 란프랑코(Lanfranco; 1582~1647)와 빌리겔무스(Wiligelmus)가 건축한 웅장한 모데나 대성당은 초기 로마네스크 예술의 걸작이다. 특히 대성당의 광장[피아차 그란데]과 종탑[토레 치비카]은 건축가들의 신념과 건축을 의뢰했던 카노사(Canossa) 왕조의 힘을 상징한다.

   11, 12세기의 모데나 역사는 노난톨라(Nonatola)에 있는 유명한 베네딕트회 수도원과 모데나의 주교관, 그리고 당대 이탈리아 북부 중앙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이었던 카노사 가문, 이 세 가문을 중심으로 역가 기록이 남아 있다. 9세기 말에서 10세기까지의 왕권 약화를 틈타 모데나의 주교들과 카노사 가문의 귀족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이들에게 권위와 영향력을 갖게 해 줄 토지와 세무 특권을 획득했다. 오토 1세(Otto I; 재위 966~973)의 충성스러운 동맹자가 된 카노사 가문의 아달베르토(Adalberto)는 영지와 함께 백작 작위를 받지만 모데나 시는 여전히 주교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1세기 뒤, 카노사 가문의 영지는 포 평야의 중앙 평원과 토스카나 주까지 넓어졌다. 11세기 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로마 교황과 서임권[비성직자에 의한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다투었다. 이 서임권 분쟁기에 마틸드 드 카노사(Mathilde de Canossa; 1045~1115경)는 초기에는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교황의 편에 서게 된다. 이후 모데나 주교관의 역사는 황제파와 부침(浮沈)을 함께 하게 된다. 왜냐하면 황제파는 모데나에서 카노사 가문의 재산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데나의 엔베르토(Enbert; 1055~1094) 주교가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되고 나서 모데나 주교관은 그 후임자를 둘러싼 갈등에 휩싸였다(1095~1100). 마틸드 드 카노사의 측근인 베네데토(Benedetto)가 선출되면서 일시적으로 갈등은 가라앉았지만 결국은 1100년 그의 후임자로 도도네(Dodone; 1100~1134)가 오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us II)가 임명한 새 주교인 도동은 모데나 시의 분열상을 종식하고 시에서 그레고리오 개혁을 실천했다. 모데나의 주교이자 349년 이후 시의 수호성자였던 산 제미니아노(San Geminiano)에게 헌정된 대성당 건축은 종탑의 건축과 마찬가지로 주교관의 주교 자리가 비어 있는 기간에 결정되었다. 대성당에 새겨진 글들과 문구를 통해 성당 건축의 초기 단계에 대한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글은 중세 전통에서 볼 때 꽤나 드문 경우이다. 이 글은 공사 발주자들인 모데나 사람들이 구상한 건축・조각에서 탁월한 기념물이 될 최초의 작품을 위해 모인 건축가 란프랑코와 조각가 빌리겔무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실 이들이 원한 새로운 대성당은 1070년 분리파였던 에리베르 주교가 세웠던 이전의 대성당보다 월등한 것을 원했다. 그리하여 이 건축을 통해 모데나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이 로마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음을 보여 주려 했던 것이다. 생애 말에 마틸드 드 카노사는 자신의 선임자들이 축적한 토지들을 수도원과 성당에 환원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유지를 해체할 계획을 천명했다. 이로써 모데나는 이후 1227년부터 시 행정관들을 통해서 전면적으로 시행할 자유로운 지방 체제를 표방하게 된다. 대성당과 토레 치비카[종탑]의 건설은 당시에 이미 많은 부분이 이루어져 있었던 1차 층위의 도시 상태에 편입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2세기 이전의 문서들은 대성당을 도시의 기준점[랜드마크]으로 특별히 다루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건물을 둘러싼 주변 공간에 더 관심이 있다. 이 공간은 나중에 이 도시에서 최초의 시민 광장이 되었다. 이 광장에서 여러 건물들이 건축되었는데 그중에는 교회 행정 관련 건축물과 민사 재판소 등이 있다. 민사 재판소의 관할은 처음에는 주교의 몫이었다가 나중에 지방 행정청으로 이양되었다. 교회 행정에 관련된 건물들로는 주교의 거처인 주교관과 이에 부속된 행정 사무처(1070), 대성당 부속[수도사들의 회합이 이뤄지는 장소인] 수도회당[chapitre], 10~12세기에 많은 서적 및 문서들을 생산한 초기 학당, 시청[Palazzo Comunale; 1194], 그리고 광장 남쪽에 채소밭이 딸린 주택들이 있다. 수세기에 걸쳐 광장 남쪽 지역 너머로 세워진 건축물들은 수공업, 상업, 지역 행정 활동과 연관되었다. 즉, 육류 시장최초의 인쇄소상업 및 식품 감독 담당 사법관의 사무소감옥 등이 그런 것들이다. 현재의 대성당은 대성당(1070)이 있던 자리에 건축되었다. 5개의 큰 선랑(船廊; 고딕 성당 건축물의 공간을 구성하는 건축 구조체로서 모양이 배 같다는 데서 나온 말)으로 나누어진 대성당 건물은 원래의 축에서 비스듬하게 자리했는데 새 대성당이 봉헌됨으로써 원래 있던 축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1099년 5월 9일 착공, 성자 유골들의 1106년 5월 30일 지하 제실[crypte] 봉안, 그리고 몇 달 뒤의 미사 제단의 봉헌이 차례로 이뤄지는 동안 이와 병행해서 성당의 내진(內陣; 성당 안에서 성직자와 성가대가 차지하는 자리)과 성당의 서쪽 부분[입구와 현관 부분]도 완성되었다. 그러나 교황 루치오 3세(Lucius III)가 참여하는 대봉헌식은 1184년에야 이뤄졌다. 네이브(nave)의 양측 벽을 잇는 대형 횡단 아치들과 다른 선랑들의 벽을 잇는 아치들도 당시 이미 많이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당 측은 12세기 후반기에 건축가와 조각가들의 조합인 마에스트리 캄피오네지에게 성당 건물 유지・보수를 맡겼는데 이 장인들이 양측면의 두 대문을 만들고, (서쪽) 파사드의 장미창, 그리고 남쪽의 레지아 문[porta Regia]을 만들었다(1180경). 성당 내부에 있어서는 이들은 지하 납골당을 확장하고, 성가대가 있는 내진을 더 높였으며, 유사 트랜셉트[faux transept]을 만들기 위해 지붕을 좀 늘렸다(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15세기 중에는 원래의 나무 천장들이 석재 궁륭으로 대체되었다. 85m나 되는 종탑 토레 치비카(Torre Civica)는 여행자들이 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맨 처음 보게 되는 건축물이다. 여행자들은 종탑을 봄으로써 마을에 가까이 왔음을 알았다. 이 종탑은 대성당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즉, 2개의 아치로 두 건물은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 도시의 삶은 종탑의 리듬에 맞추어졌고, 시민 장부[주민 등록]도 이곳에 간수되었다. 종탑의 축조가 대성당과 동시대에 이루어졌으므로 종탑의 낮은 층 즉 5층까지는 란프랑코가 만들었다고 볼 수 있고, 그 위층들은 마에스트리 캄피오네지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1261~1319).

세계문화유산(348)/ 이탈리아

 

카세르타의 18세기 궁전과 공원, 반비텔리 수도교, 산 레우초

(18th-Century Royal Palace at Caserta with the Park, the Aqueduct of Vanvitelli, and the San Leucio Complex; 1997)

 

 

 

 

 

 

 

 

 

 

 

 

 

 

 

 

 

 

   캄파니아(Campania) 주 카세르타와 베네벤토 시[Provinces of Caserta and Benevento]에 속하는 카세르타(Caserta) 궁전 단지는 18세기 중반 부르봉 왕조의 카를로스 3세가 지시하여 건설한 궁전 복합 단지이다. 베르사유 왕궁이나 마드리드에 있는 왕궁과 겨룰 만한 궁전을 짓고자 공원과 정원, 자연 숲지대, 사냥터, 실크 공장을 한데 모아 독특한 거대 궁전 단지를 조성했다. 이 궁전 단지는 자연을 제한하기보다는 자연을 융화하여 유형의 형태로 표현한 계몽주의 정신을 자연스럽게 잘 구현한 건축 단지이다.

  카세르타 궁전 단지는 18세기의 다른 왕궁들과 비슷하지만 한편으로는 궁전과 공원은 물론 주변 자연 경관에서부터 당시 도시 계획 원칙에 따라 조성된 신도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설계 기획을 표현하고 있다. 실크 생산을 위해 지어진 벨베데르의 산업 건축물은 원래의 건축 개념 및 관리의 밑바탕에 깔린 이상주의적 원칙 때문에 매우 흥미로운 건축물이다. 1734년, 필리페 5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3세가 나폴리의 왕으로 즉위했다. 나폴리는 더 이상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독립 왕국이었다. 카를로스 3세는 1750년, 베르사유 궁전과 견줄 만한 새 궁전을 짓기로 결정했다. 새 궁전은 유럽의 주요 도시들과 경쟁하게 될 신도시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그는 로마 성베드로 성당 복원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던 건축가 루이지 반비텔리(Luigi Vanvitelli)를 고용했다. 1752년에 ‘초석[first stone]’이 놓였고, 공사는 반비텔리가 사망한 1773년 이후 카를로스 왕의 계승자 페르디난드 4세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몬테마이우올로(Montemaiuolo)와 몬테브리아노(Montebriano) 두 언덕에 있는 보스코 디 산실베스트로(Bosco di San Silvestro)는 포도원과 과수원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1773년, 페르디난드 4세는 이곳에 울타리를 둘러 사냥터를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의 2층 건물은 사냥용 오두막으로 아래층은 농사일의 목적으로 쓰였다. 산 레우초는 정상에 있는 롬바르드 교회에서 이름을 따왔다. 사냥을 위한 숙소 벨베데르는 카세르타의 왕자가 16세기에 지은 건물이다. 원래 카를로스 3세가 매입했었던 영지로, 1773년에 페르디난드 4세가 자신의 아들이 죽고 난 후 버려졌던 낡은 사냥용 오두막을 개조했다. 1776~1778년까지 벨베데르는 복원되었고, 중앙 홀은 교회가 되었다. 1778년, 페르디난드 4세는 실크를 생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페르디난드 4세의 건축가 콜레치니(Collecini)는 목적에 맞도록 건물을 개축하여 학교, 교사를 위한 숙박 시설, 누에실, 실크 방적실과 염색실이 있는 거대 산업 단지로 전환시켰다. 페르디난드 4세는 1789년 산 레우초 직할 식민지[Royal Colony]를 대상으로 하는 일련의 법령을 공포했다. 사회주의 형태의 원형에 해당하는 정책으로 노동자 복장 통일, 성과급 급여율 인하, 지참금 폐지 등의 법령이었다. 콜레치니는 ‘페르디난도폴리스(Ferdinandopolis)’라는 도시를 설계하고자 마을을 확대하기 위한 차기 10개년 계획을 수립했으나, 프랑스의 점령으로 이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왕궁의 정원에 있는 연못과 왕립 실크 공장, 그리고 계획 신도시에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했다. 따라서 피조(Fizo)에서 몬테브리아노 정상까지 38㎞에 이르는 구간에 걸쳐 물을 끌어오는 카롤리노(Carolino) 수로가 건설되었다(1769년 완공). 마지막 구간은 티파티니 언덕을 관통해 뻗어 있다. 왕실 부지에서 카세르타베치아라는 중세 마을과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의 경관이 내려다보이는 지역이다. 1744년, 카를로스 3세는 풍요로운 카르디텔로(Carditello) 지역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1784년, 시골 주택 단지와 주요 건물들로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난 도로가 조성된 단지의 일부를 이용해 사냥을 위한 숙소를 건축했다. 중앙에는 국왕을 위한 방이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농산물, 작물 재배 활동과 관련된 방이 있었다. 로마 원형 경기장을 닮은 앞뜰은 경마장으로 쓰였으며, 분수와 오벨리스크로 장식되어 있다. 19세기에 페르디난드 2세는 농경 활동을 늘렸다. 왕궁은 직사각형 구조로 내부에 직각으로 교차하는 4개의 큰 안뜰이 있었다. 5층 건물 구조에 면적 45,000㎡, 높이 36m에 달했다. 정면 파사드에만 143개의 창이 있고 건물 전체에는 1,200개의 방과 34개의 계단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벽돌조 건물로 1층과 2층은 트래버틴 마름돌을 마주보고 있다. 중앙에는 둥근 지붕이 전체 구조물을 덮고 있다. 파사드 앞은 타원형 모양을 한 연병장이 있다. 내부에는 3개의 팔각형 현관이 건물의 주 통로를 따라 자리 잡고 있다. 이 3개의 현관은 전체 건물의 포인트 역할을 한다. 주 계단을 통해 18세기 양식의 가구가 배치되었고, 이를 따라 치장된 국왕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베르사유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예배당은 아래층의 현관으로 갈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특징적인 건물로는 18세기 양식 중 뛰어난 사례로 간주되는 왕립 극장을 꼽을 수 있다. 궁전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공원은 루이지 반비텔리가 계획했고, 그의 아들 카를로가 완공했다. 주요 축은 바로크 양식의 연못과 물길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 장대한 경관은 대분수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150m 높이에서 화려한 분수대로 폭포수가 떨어진다. 분수대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냥꾼 악타이온(Actaeon)이 목욕하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347)/ 이탈리아

 

피엔차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the City of Pienza; 1996)

 

 

 

 

 

 

 

 

 

 

 

 

 

 

 

 

 

   로마 교황 비오 2세(Pius II)는 1459년 자신의 고향인 토스카나 주[Tuscany] 시에나 현[Province of Siena]의 피엔차를 새롭게 바꾸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Bernardo Rossellino)에게 설계를 맡겼다. 로셀리노는 자신의 스승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의 원칙을 적용하여 르네상스 인본주의 개념을 도시 설계에 적용한 첫 사례를 만들었다. 이곳에는 비오 2세 광장으로 알려진 장려한 광장과 피콜로미니 궁, 보르자 궁[Borgia Palace] 등이 건축되었다. 특별히 외관은 정통 르네상스 양식이고 내부는 남부 독일 교회의 후기 고딕 양식인 독특한 대성당도 있다.

  피엔차 역사 지구는 도시 설계에 르네상스 인본주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사례이다. 즉, 이후 이탈리아와 이탈리아를 넘어선 여러 도시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계획된 ‘이상 도시’의 개념이 발생한 곳이다. 피엔차 특히 중앙 광장 주변의 건물군에 이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인간이 갖는 창조적 천재성의 걸작을 만들게 되었다. 1458년 성 베드로[St Peter] 교황에 추대된 인본주의 지도자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Enea Silvio Piccolomini; 1405~1464)는 시에나에서 남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오르시아(Orcia)와 아소(Asso) 계곡을 굽어보는 언덕에 자리한 코르시냐노(Corsignano; 지금의 피엔차)에서 태어났다. 교황이 된 지 몇 달 뒤인 1459년 2월에 고향을 찾은 비오 2세는 그곳 주민들의 비참한 모습에 충격을 받고 자신의 비망록에 그 모습을 묘사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 마을에 새로운 건물을 세워 여름 별장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비전은 독일 출신 철학자 추기경 니콜라 쿠사노(Nicola Cusano)로부터도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다. 피엔차 대성당에서는 독일의 전통 고딕 양식이 엿보인다. 비오 2세는 이 대성당을 독일에 있는 후기 고딕 양식의 할레 교회[Hallenkirchen]들처럼 건설하고 싶어 했다. 즉, 그가 2세가 여행 중에 흠모하게 된 란츠후트(Landshut), 노이외팅(Neuotting), 슈트라우빙(Straubing), 뉘른베르크(Nurnberg), 빈(Vienna), 뫼들링(Modling), 굼펠스 교회[Gumpelskirchen]를 본뜨고 싶어 했다. 또한 비오 2세는 은행가로서 16세기 초에 아우크스부르크의 자신의 고향 도시를 개조한 인물인 야코프 푸거의 영향도 받았다. 코르시냐노를 변모시키기 위해 비오 2세는 로마에 있는 교황 니콜라오 5세의 교황청 기술자로서 ‘로셀리노’라고 알려진 마테오 감베렐리(Bernardo di Matteo Gamberelli)를 초빙했다. 로셀리노는 인본주의 사상가이자 건축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영향을 받았다. 알베르티는 1447~1455년에 로마의 복구를 책임졌고, 르네상스 최초의 건축 논문인 <건축론(De re aedificatoria)>(1452)의 저자이기도 했다. 로셀리노는 1459년 작업이 시작된 중앙 광장 주변 주요 건물들의 공사를 감독했다. 로셀리노는 알베르티가 명확히 한 르네상스 도시 계획 원칙에 근거하여 도시의 전체 배치 또한 책임 맡았다. 성곽을 두른 코르시냐노 마을은 질리오(Giglio)와 프라토(Prato) 등 2개의 문을 포함한 주요 도로[오늘날의 로셀리노 가]와 이웃한 더 작은 수직의 평행한 도로들로 이루어졌다. 로셀리노는 주 광장 주위에 주요 건물들의 자리를 정할 때 주로 이 기본 구조를 존중했다. 비오 2세의 사업은 그를 수행하는 추기경들의 저택 건설도 포함되었으며 이 공사는 1463년에 시작되었다. 성 프란시스(St Francis) 교회 맞은편에 있는 병원과 호텔 등 사회적 기능을 지닌 2개의 구조물도 로셀리노의 감독 하에 세워졌다. 피엔차의 이상적인 중심은 비오 2세 광장이다. 사다리꼴 모양의 광장 계획은 트래버틴(travertine; 대리석의 일종)으로 테를 두른 오늬무늬 포석으로 강조되었다. 광장의 남쪽 면에는 로셀리노가 설계하여 1459~1462년에 건설한 대성당이 있다. 알베르티의 영향은 3중 통로가 있는 내부와 어울리는 넓은 아치들이 있는 3중 파사드의 구성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내부는 아치와 십자 아치 천장이 뻗어 나간 커다란 벽기둥 무리로 나뉘며, 할레 교회의 영향을 받았다. 종탑 또한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되었다. 광장 서쪽 면에는 비오 2세 가문의 옛집 터에 1463년에 세운 피콜로미니 궁이 있다. 트래버틴 초석에 놓인 정면 입면도는 3단의 사암 마름돌로 나뉘며 중간에 넓은 아치 창문들이 있다. 3개의 면은 같으며, 위압적인 3층의 로지아(Ioggia)가 있는 네 번째 면은 높은 정원에 면해 있다. 세련된 안마당의 2층과 3층 바닥은 스그라피토(sgraffito) 기법으로 장식되어 있다. 주교관은 광장 맞은편에 있다. 옛 프레토리오(Pretorio) 궁은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Borgia) 추기경을 위해 1463년 구입했다. 보르자 추기경은 한 층을 더 높이고 고딕 창문들을 교체했다. 광장 북쪽 면에 있는 시청(1462년 건설)은 이러한 기능에 맞는 전통적인 토스카나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지면과 같은 높이에 개방된 로지아와 총안상(銃眼狀)으로 장식한 탑이 있다. 광장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반대로 시청은 치장 벽토 석회화(華)와 벽돌로 만들고 스그라피토 기법으로 장식했으며 오직 로지아만 트래버틴으로 만들었다. 피엔차에 있는 다른 주요 건물들은 로셀리노 가를 따라 늘어서 있다. 비록 그보다 더 오래된 건축물도 남아 있지만 대부분은 교황청 궁정 사람들의 집으로 건축되었다. 그 밖에 성 프란시스의 고딕 교회와 그 수도원, 아트레바텐세 궁[Atrebatense Palace; 르네상스 양식의 장식과 고딕 구조], 르네상스 양식의 암만난티 궁[Ammannati Palace], 벽돌 건물들, 정원이 있는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인 곤차가 궁[Gonzaga Palace]이 있다. 피엔차에는 로셀리노가 설계한 많은 르네상스 양식의 분수와 샘이 있다.

세계문화유산(346)/ 이탈리아

 

알베로벨로의 트룰리(The Trulli of Alberobello; 1996)

 

 

 

 

 

 

 

 

 

 

 

   풀리아 주[Puglia Region] 바리 현[Province of Bari]에 위치한 트룰리(Trulli)는 풀리아 남부 지역에서 발견된 석회암 주거지로 선사시대의 건축 기술이 아직 이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뛰어난 사례이다. 트룰리에는 인접 들판에서 수집한 석회암들을 거칠게 가공한 석회암 슬라브를 내어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린 지붕인 피라미드형, 원통형, 원추형 지붕이 있어 특징적이다.

  트룰리로 알려진 석회암 주거지 알베로벨로(Alberobello)는 고장 특유의 건축이 있는 독특한 사례이다. 유럽의 이런 형태 도시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곳 중 하나이며, 아직까지도 주거지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이다. 따라서 트룰리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선사시대 건축 기술을 대표한다. 풀리아 주의 이트리아 계곡에는 선사 주거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주거지는 돔 모양의 무덤 양식인 톨로스(tholos) 건축 기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과 같은 주거지의 기원은 14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베르 당주(Robert d’Anjou)가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공로를 인정해 사람이 살지 않던 이곳을 타란토의 왕자에게 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왕자와 그 후계자들은 자신의 영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카셀레(Caselle)라는 작은 집을 짓도록 허용함으로써 이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서기 1000년쯤부터 아자 피콜라(Aja Piccola)와 몬티(Monti)라는 마을 단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새 거주민들은 자신의 주택을 신속하게 철거할 수 있도록 자연석으로 벽을 두르는 전통을 적용했다. 그 목적은 2가지였다. 하나는 종종 권력에 저항하곤 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주택을 쉽게 철거해 새 주거지에 부과되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철거할 때만큼이나 재빠르게 다시 짓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나폴리의 왕이 세금 사정관을 파견했던 1644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 비교 분석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런 방법은 별반 효과를 거두지 못해 뒷날 징벌적 세금이 부가되곤 했다. 16세기 중반까지 몬티 지역에는 약 40여 군데의 트룰리가 들어섰다. 잔 지롤라모 구에르초(Gian Girolamo Guercio) 공작이 빵 만드는 곳과 제분소, 숙박 시설을 짓도록 명령한 1620년에는 트룰리가 본격적으로 늘어나 18세기 말까지 이 공동체에 3,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리고 1797년에는 나폴리의 페르디난드 4세(Ferdinand IV)가 로열타운(Royal Town)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아크콰비바(Acquaviva) 가문의 봉건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이 지역의 중세 라틴어 지명인 ‘시바 아보리스벨리(siva arboris belli)’에서 따온 ‘알베로벨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트룰리는 이처럼 새로운 도시로 조성되던 시점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인접한 평야, 뒤에는 강 유역에서 수집한 석회암을 거칠게 가공해 자연 암반 바로 위에 집을 지었다. 자연석으로 벽을 두르는 드라이스톤(Drystone) 기술을 사용해 사각형의 이중벽을 만든 다음, 안에는 돌무더기를 넣고 구멍을 만들어 작은 창을 냈다. 그리고 두꺼운 벽 안에 벽난로와 오븐,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벽으로부터 직접 솟아오르도록 한 이중 지붕은 단순한 스퀸치(Squinch) 구조이기 때문에 직사각형에서 원, 타원으로 간단하게 개조할 수 있었다. 지붕은 치안체(chianche) 또는 치안카렐레(chiancarelle)라 불리는 회색 석회 슬라브를 연결하여 만들었다. 더 큰 주택의 지붕은 장식을 위해 뾰족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종종 재난을 쫓기 위한 상징물이었다. 슬라브를 통해 지붕 아래 처마를 이용해 만든 물탱크로 빗물을 흘려보내도록 하기도 했다. 또 폭이 좁은 돌계단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문틀, 반원통형 둥근 천장 등 내부는 목재로 꾸몄다. 규모가 큰 트룰리에는 나무 바닥으로 된 2층이 있으며, 나무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끔 했다. 돌로 만든 벽난로와 오븐에서 나오는 연기는 그것을 덮고 있는 슬라브를 통해 배출됐다. 지붕에 색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류나 지의식물이 자라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얀 재로 신화나 종교의 상징을 집어넣었다. 한편 트룰리의 벽에는 정기적으로 회분을 발랐는데 돌의 외곽선이 선명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6㏊에 달하는 언덕에 자리 잡은 몬티 지역에는 1,030채의 트룰리가 있었다. 아래를 향해 나 있는 길은 평지에서 만나도록 되어 있었다. 590개의 트룰리가 있는 아자 피콜라 지역은 몬티에 비해서는 균일성이 떨어진다. 길거리는 봉건 시대에 소작농들이 밀을 탈곡하는 장소였던 공동체 공용의 농가 안뜰로 이어진다.

세계문화유산(345)/ 이탈리아

 

몬테 성(Castel del Monte; 1996)

 

 

 

 

 

  

 

 

 

 

 

 

 

 

 

 

 

 

   풀리아 주[Puglia Region] 바리 현[Province of Bari] 안드리아와 코라토[Communes of Andria and Corato]에 위치한 몬테 성은 13세기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바리(Bari) 부근에 축조된 성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성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설계했는데 성의 위치와 배치를 수학적・천문학적으로 정확하게 배열하였고, 성의 모양도 완벽하고 균형 잡힌 형태로 만들었다. 중세 군사 건축물의 독특한 양식인 몬테 성은 고전 고대(古典古代; classical antiquity) 양식, 이슬람 동방 양식, 북부 유럽의 시토 수도회의 고딕 양식 등의 요소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다.

   형식적인 완벽함과 고전 고대 양식, 이슬람과 북유럽 양식을 조화롭게 융합시킨 몬테 성은 중세 군사 건축물의 독특한 양식이며, 설립자인 프리드리히 2세의 인본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프리드리히는 1197년 당시 3세의 나이로 그의 아버지 황제 헨리 6세의 뒤를 이었다. 12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프리드리히는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 속해 있던 시칠리아를 통솔하기 위해 사회 규범을 도입하였고, ‘남부 르네상스[Southern Renaissance]’로 알려진 집중적인 문화 활동 시대를 열었다. 그는 위대한 문화 추종자였고, 여러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수학과 천문학 그리고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아랍그리스로부터 수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궁에 초빙하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아베로에스(Ibn Rushd)・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eos)・갈레노스(Claudios Galenos) 등의 작품들을 라틴 어로 번역하도록 하였으며, 나폴리에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다방면에 걸친 그의 재능은 그로 하여금 ‘스투포르 문디(Stupor Mundi; ‘세계의 경이’라는 뜻)’라는 별칭을 얻게 했다. 그는 또한 국민들에게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통치자였다. 그러나 그는 독일에서와 달리 이탈리아에서는 봉건제도를 장려하는 절대 군주였다. 이러한 이유와 방어의 목적으로 그는 아풀리아(Apulia), 칼라브리아(Calabria)와 시칠리아(Sicily)의 영지에 강력한 성과 요새를 많이 지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영향력이 컸던 곳이 바로 카스텔 델 몬테[몬테 성]였다. 1240년에 몬테 성이 완성되자 그는 이곳을 자신의 영구적인 궁전으로 삼았다. 1250년 프리드리히 2세의 죽음과 함께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가문이 권력을 잡자 이 지역은 약화되었으며, 앙주 왕가는 이곳을 15세기 중반까지 통치하였다. 몬테 성은 더 이상 권력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이 시대 다른 성들처럼 19세기까지 요새와 막사로 이용되었고, 약탈과 반달리즘[공공 기물 파손]과 무관심으로 훌륭했던 장식들을 서서히 잃어 가게 되었다. 몬테 성은 안드리아(Andria)의 바를레타(Barletta)로부터 남쪽 29㎞ 지점 바위 정상에 우뚝 솟아 주변의 시골마을은 압도하고 있다. 성의 평면 계획은 안뜰을 둘러싼 팔각형 형태이며, 팔각형의 각이 있는 부분에 역시 팔각형 형태의 탑이 붙어 있다. 벽은 화려한 석영 석회암으로 된 거대한 블록으로 건축되었다. 벽면을 휘감은 중간 높이에 돌림띠가 있고 벽면은 내부에 2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다. 각 층에는 일정한 크기의 방이 8개 있으며, 모양은 역시 성과 같은 팔각형이다. 아래층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방들이 있으며 이 방에는 두드러지게 골이 진 첨두아치의 둥근 천장이 있다. 이 천장은 조각된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다. 위층은 아래층과 정확히 대응되도록 만들어져 있지만 더욱 공들여 장식을 하였다. 위층에는 비잔틴 스타일이나 샴페인에서 보이는 여신상 기둥머리로 된 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이 기둥머리는 그리스 대리석으로 만든 3중 원주 위에 얹히는 것이었다. 둥근 천장의 정점은 역시 비잔틴 스타일의 독특한 주두(柱頭)의 장식이다. 각 방에는 기둥의 기단에 대리석 돌림띠 장식이 된 대리석 벤치가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화장실이나 욕조 시설을 위한 독특한 수압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는 점인데 이는 분명한 오리엔트 양식이다. 각 파사드에는 2개의 창문이 있고, 아래층의 창문들은 아치형[정문과 뒷문 입구의 창문은 예외]이며, 위층의 창문들은 양쪽이 만나는 첨두아치[pointed arch] 모양이다. 팔각형 탑에는 좁은 화살 구멍이 나 있으며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서 명령을 내리기 좋게 계획적으로 건축되어 있다. 내부에는 계단과 관리실도 갖추어져 있다. 산호 각력암으로 만든 정문은 첨두아치로 프레임 된 고전 양식의 개선문의 형태를 재현했다. 한 위대한 학자는 이 정문을 ‘르네상스 시대의 서곡[sort of prelude to the Renaissance]’이라고 표현했다. 건물을 통해 동양에 기원을 둔 양식들과 아름답고 완벽하게 융합된 여러 요소들, 그리고 대리석과 모자이크의 사용한 다양한 요소들이 수세기를 거치면서 무관심과 반달리즘으로 사라져 갔다. 성 외곽, 해자, 마구간, 부엌, 창고, 예배당 등 그 당시의 일반적인 군사 건축물에서는 별다른 특징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와는 달리 몬테 성은 수학적・천문학적 도면과 철저함, 북부 유럽의 시토회 건축에서 유래된 건축 요소들, 그리고 우마야드 왕조의 ‘사막의 성[desert castles]’과 동양과 북아프리카에서 유입된 요새화 수도원 등 고전적 양식의 문화적 요소가 조화를 이룸으로써 특별히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문화유산(344)/ 이탈리아

 

라벤나의 초기 기독교 기념물(Early Christian Monuments of Ravenna; 1996)

 

 

 

 

 

 

 

 

 

 

 

 

 

 

 

 

 

 

 

 

 

 

 

 

 

 

 

 

   에밀리아로마냐 주[Emilia-Romagna Region], 라벤나 시[City and Province of Ravenna]에 자리 잡은 라벤나는 5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중심지였으며, 8세기까지 비잔틴제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초기 기독교의 독특한 기념물이 모여 있다. 라벤나에 세워진 8개 건축물인 갈라 플라키디아(Galla Placidia) 영묘, 네오니안 세례당[Neonian Baptistery], 산타 폴리나레 누오보(Sant’Apollinare Nuovo) 성당, 아리안(Arian) 세례당, 아르키에피스코팔 예배당[Archiepiscopal Chapel], 테오도리크(Theodoric) 영묘, 산비탈레(San Vitale) 성당, 클라세의 산타 폴리나레 성당 등은 모두 5세기와 6세기에 건축되었다. 이 건축물들은 그레코로만의 전통, 기독교의 도상학[iconography], 동・서양의 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성당 내부를 장식한 모자이크화는 놀라운 예술적 기량을 보여 준다.

  라벤나의 초기 기독교 기념물들 중 모자이크는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녔으며, 예술과 종교의 관계가 나타난 유럽 문화사적 단계를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할 당시 라벤나에는 클라시스(Classis; 라틴어로 ‘함대’) 항구가 건설되었다. 5세기 이민족의 침입 후 호노리우스(Honorius)는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서고트 아타울푸스(Ataulphus) 왕의 미망인이던 그의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Galla Placidia)는 5세기 초반 라벤나에 거주하면서 도시를 기독교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라벤나는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가 폐위를 당한 476년부터 번창하면서 주변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540년 비잔틴 제국의 명장 벨리사리우스(Belisarius)에게 점령당한 뒤, 752년까지 이탈리아에서 비잔틴 제국의 거점이 되었다. 이후 정체와 쇠퇴가 반복되었으며, 1441년 이후에는 베네치아와 교황의 지배 아래 놓였다. 갈라플라키디아 영묘는 5세기의 두 번째 분기에 건축되었다. 이 영묘의 외부는 단순한 형태의 아치형 벽기둥이 있는 작은 사각형 타워 형태인데 그 안에는 벽돌로 된 돔 지붕이 있다. 내부는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내부의 하단은 노란색 대리석판으로 꾸며져 있고 대부분은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영묘의 양식은 서로마 제국의 전통 건축 양식이다. 오르소(Orso) 주교가 5세기 초에 건축한 네오니안 세례당은 450년 무렵 후임자인 네오네(Neone)가 모자이크로 장식하였다. 내부는 4개의 애프스(Apse)로 구성되었고, 2개의 아치가 둥근 지붕을 향해 뻗어 있다. 돔형 지붕 꼭대기의 대형 모자이크 원형 양각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세례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세례당은 초기 기독교 세례당으로서 매우 완벽하게 보존된 사례이다.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은 6세기 초의 건물이다. 24개의 대리석 기둥이 1개의 본당 회중석과 2개의 통로를 가로지르는 구조이고, 둥근 애프스(apse)가 있다. 현재 3개의 패시어(fascia; 수평 돌림띠)가 장식된 아치로 떠받친 천장부터 아치 꼭대기까지, 네이브(nave)의 하단에 두 측면 벽이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3개의 패시어 중에 위쪽의 2개는 전통적인 로마 양식이고 세 번째 것은 비잔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다. 테오도리크(Theodoric)가 자신의 성당 옆에 지은 아리안 세례당은 561년 아리안의 이단을 폐지하면서 성모마리아를 위한 작은 기도실로 봉헌되었다. 평평한 사면과 돌출된 애프스가 특징인 팔각형 모양의 작은 벽돌 건물이다. 돔 천장에만 모자이크 장식을 하였다. 모자이크의 도해는 삼위일체를 묘사하는데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아리안 건축물의 예술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동방 정교회 주교의 사설 기도실이던 아르키에피스코팔 예배당은 500년 무렵에 지었다. 그리스 십자가 모양의 외관을 갖추었으며, 동쪽 끝에는 애프스가 하나 있다. 또 교차형 둥근 천장과 앞쪽으로 사각 형태의 통로가 있다. 벽 아래쪽은 모자이크를 새긴 대리석으로 덮었다. 테오도리크 영묘는 테오도리크가 사망하기 바로 전인 526년에 건설된 2층 구조물이다. 아래쪽은 10개의 벽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벽면 각각에 벽감(壁龕)과 작은 창문이 있다. 영묘는 로마나 비잔틴 예술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로마의 전통 석조 건축 양식인 ‘오푸스 콰드라툼(opus quadratum; 4세기 전에 버려진 양식이다)’에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테오도리크 영묘는 당시 이민족 왕의 무덤이 남아 있는 특별한 예이다. 산비탈레 성당은 547년 무렵에 완공됐다. 전면에 큰 주랑 현관인 콰드로포르티코(Quadroportico; 4개의 전랑)가 있었으나 교회가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일부가 되면서 콰드로포르티코는 회랑으로 바뀌었다. 2층 구조이며 위층은 둥근 지붕으로 덮여 있다. 내부는 반원형이고, 외부는 다각형의 애프스 양 옆으로 작은 사각형 방이 2개 있다. 방과 방 사이에 벽감과 반원형 성구 보관실 2곳이 있다. 클라세(Classe)의 산타폴리나레 성당은 우르시치누스(Ursicinus) 주교의 명령으로 6세기 전반기에 지어졌다. 나르텍스(Narthex)는 2개의 기둥이 서 있는 파사드의 중앙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343)/ 이탈리아

 

르네상스 도시 페라라와 포 삼각주

(Ferrara, City of the Renaissance, and its Po Delta; 1995)

 

 

 

 

 

 

 

 

 

 

 

 

 

 

   포 강 상류 주변에 있는 페라라는 에밀리아로마냐 주[Emilia-Romagna Region] 페라라 지방[City and Province of Ferrara]에 속하며, 15,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한 정신이 집약된 예술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있던 에스테(Este) 가(家)의 궁전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자코포 벨리니(Jacopo Bellini)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등의 유명한 화가들이 장식하였다. 페라라는 1492년에 건축가 비아조 로세티(Biagio Rossetti)가 에르콜 1세(Ercole l)의 명령에 따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상 도시[ideal city]’라는 인본주의적 이념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이 프로젝트는 근대 도시 계획을 탄생시켰고, 이후 페라라의 많은 발전에 튼튼한 밑받침이 되었다.

  페라라는 훌륭하게 계획된 르네상스 도시이며, 원래의 도시 구조를 지금까지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페라라에 표현된 도시 설계의 발달은 이후 수세기에 걸쳐 다른 도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곳에 있던 화려한 에스테 궁전은 르네상스의 중흥기였던 두 세기 동안 수많은 예술가들과 시인, 철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계획된 문화 경관이 두드러지는 포 삼각주는 많은 부분에서 원래의 독창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페라라는 도시의 중심부가 아닌 포 강둑을 따라 수직으로 도시가 발달했고, 중세 도시가 형성된 그 주변으로 수직 도로와 교차로가 많이 발달했다. 이처럼 페라라만이 이탈리아 도시 가운데 유일하게 로마식 배치를 따르지 않고 독창적인 도시 구도를 유지하고 있다. 페라라의 도시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아디치오네(addizione)’로 알려진 도시 계획 규제를 바탕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아디치오네는 14세기부터 발전하였고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근대의 모든 도시들에서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 1492년에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고, 도로망과 성벽들은 궁전이나 교회 건물 그리고 정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로써 페라라는 마침내 계획된 르네상스 도시로 완성되었다. 16세기를 통틀어 이루어진 도시 계획은 미래의 ‘수도’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 교황 행정부가 들어선 17세기 이후로 거의 3세기 동안 도시는 성장과 발전을 멈추었다. 당시 계획은 성의 남쪽으로는 확장을 제한하면서 도시의 규모를 2배로 늘리는 것이었다. 성에서 나오는 거리[에르콜 1세 거리]의 교차로와 에르콜 라 아디치오네[로제티 거리, 포르타 마레 거리]의 중심축을 도시의 출입구와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성곽・아성・반원형・탑・보루・망루 등의 다양한 요소에 새롭고 최신화된 방어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완성되었다. 새롭게 도입된 이런 대안들은 도시의 외형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리드[격자형]에 맞춰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었고 새로운 양식의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중세 시대로부터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기념물은 12세기에 지어진 산 조르조(San Giorgio) 대성당이다. 성당의 파사드 건축은 베네데토 안텔라미(Benedetto Antelami)의 영향을 받은 조각가이자 건축 책임자인 니콜로(Niccolo)가 건설했으며, 이는 12세기의 반세기에 걸쳐 완공되었다. 종탑의 건축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의 설계에 따라 1451년에 시작되었다. 대성당 앞에 우뚝 솟은 13세기의 코무날레(Comunale) 궁은 에스테 가문이 최초로 사용했던 대저택이며, 15세기 말 산 미켈레(San Michele) 성과 에스텐세(Estense) 성이 나중에 추가되었다. 4기의 큰 탑을 갖춘 이 웅장한 요새는 1385년에 노바라(Novara) 출신의 궁정 건축가 바르톨로메오(Bartolomeo)가 폭력 사태 직후에 지었다. 건축 작업은 1570년까지 계속되었다. 많은 귀족들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홀이 딸렸으며 대리석 발코니와 로지아, 그리고 프레스코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1385년에 건축된 스키파노이아 궁[Palazzo Schifanoia]은 보르소 데스테(Borso d’Este) 공작을 위해 건축가 피에로 벤베누티(Piero Benvenuti degli Ordini)가 1465~1467년에 처음으로 개축했으며, 이때 피에로를 도왔던 비아조 로세티는 1493년에 단독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이 궁에는 웅장한 대리석 정문이 있고, 기사단 영지의 좌우로는 에르콜 드 로베르티(Ercole de' Roberti)가 설계한 긴 벽돌로 된 파사드가 세워져 있다. 여러 개의 홀 장식 가운데 ‘12달의 홀[Hall of the Months]’ 장식은 페라라의 인본주의적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성에서 나오는 거리[에르콜 1세 거리]의 교차로와 에르콜 라 아디치오네[로제티 거리, 포르타 마레 거리]의 중심축을 도시의 출입구와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이 공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중세 르네상스 도시와 근대 도시를 잇는 초점은 프로스페리사크라티(Prosperi-Sacrati) 궁, 베빌라콰(Bevilacqua) 궁, 투르키 디바그노(Turchi-Di Bagno) 궁, 디아만티(Diamanti) 궁의 4개 왕궁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1492년 시기스몬도 데스테(Sigismondo d'Este)를 위해 디아만티 궁을 세우기 시작했으나, 1565년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파사드의 전체 높이에 규칙적인 건목 치기[rustication; 목조의 기둥이나 보・격자・반자틀 등의 표면 마감]가 특별한 인상을 주고 있다.

세계문화유산(342)/ 이탈리아

 

크레스피 다다(Crespi d'Adda; 1995)

 

 

 

 

 

 

 

 

 

 

 

 

 

 

 

 

 

 

 

 

 

 

 

 

  롬바르디아 주[Lombardy] 베르가모 현[Province of Bergamo]의 카프리아테 산 제르바시오(Capriate San Gervasio)에 있는 크레스피 다다는 ‘회사 도시[company town]’이다. 회사 도시란 주로 19~20세기 초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세웠던 것으로 기업과 노동자가 함께 거주하는 도시이다. 계몽주의적 산업가들은 크레스피 다다에 노동자들의 편의를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 시설을 건축하였다. 도시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경제적・사회적 여건이 변화했으나 현재까지도 당시의 모습이 온전하게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는 여전히 산업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크레스피 다다는 19~20세기 초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에 세운 ‘회사 도시’라는 현상의 중요한 증거로 노동자에 대한 계몽주의적 산업가들의 주요 철학이 표현된 도시 건축물이다. 도시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경제적・사회적 여건이 변화했으나 현재까지도 당시의 모습이 온전하게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는 여전히 산업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최초의 회사 도시는 벨기에, 프랑스, 독일, 영국과 같은 유럽에 세워졌다. 이는 새로운 기업가 세대들이 대규모 노동력을 결집시켜서 자신들의 공장에서 일을 하도록 계획하여 조성한 것이다. 또 그 공장들은 원자재나 노동력과 같은 자원들에 근접하도록 설립되었다. 이 계획도시는 이탈리아가 정치적 통합을 이끌어 낸 후 국내 시장이 형성되고서야 만들어졌다. 카프리아테 산 제르바시오(Capriate San Gervasio; 베르가모 현)에 있는 크레스피 다다는 이러한 회사 도시들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완성도가 높은 곳이다. 다른 회사 도시는 콜레그노(Colegno; 토리노 현)의 로이만(Leumann)과 스키오(Schio; 비첸차 현)에 있는 로시(Rossi) 등이다. 1875년 부스토 아르시치오(Busto Arsizio; 바레세 현) 출신의 섬유 산업가인 크리스토포로 베니뇨 크레스피(Christoforo Benigno Crespi)는 카프리아테 남쪽 벰보(Bembo)와 아다(Adda) 강 사이에 있는 1㎢의 골짜기를 구입했다. 이는 아다 강둑에 면방적 공장을 설치할 목적이었다. 그는 유럽식의 방적 공장을 지은 후, 1878년 초 공장 주위에 노동자들을 위한 3층 높이의 주택 단지를 지었다. 1889년에 그의 아들인 실비오 베니뇨 크레스피(Silvio Benigno Crespi)는 회사의 경영을 이어받아서 공장과 주택단지의 계획을 수정하고 완성하게 된다. 그는 다른 도시 생활의 접근법과 더 명백한 이념을 근거로 해서 계획을 수정하고 완성시켰다. 그는 대규모 공동 거주 구획을 거부하고, 개인 정원이 딸린 단층 주택을 조성했다. 그는 이것이 산업 단지 안에서 불화를 막고 조화로운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1892년부터 그는 이 정책을 실행에 옮겨 성공을 거두었다. 크리스피가 경영했던 50년 동안에는 어떠한 노동 분쟁이나 사회적 문제도 없었다. 노동자들에게 단층 주택 외에도 수력 발전소를 지어서 전력을 무상으로 공급하였고, 공공 화장실과 세탁소병원소비조합학교소형 극장스포츠 센터지방 사제나 의사를 위한 사저 및 그 밖의 공공 시설물을 조성하였다. 실비오 베니뇨 크리스피는 자신의 회사 도시에 보다 상징적 가치를 지닌 건물들을 건축했다. 예를 들면 교회, 크레스피(Crespi) 가(家)의 거주지인 성, 새로운 사무실 복합 단지, 노동자들의 주택의 남쪽에 위치한 소유주들의 주택들이 있었다. 전자의 두 건물은 1890년대에 조성되었고, 후자의 두 건물은 1920년대 초에 조성되었다. 1929년 대공황과 파시스트 정권의 가혹한 재정 정책으로 인해 크레스피 가는 이탈리아 섬유 기업인 STI에 전체 도시를 매각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1970년에 로사리 에 바르치(Rossari e Varzi) 사로 넘어가게 된다. 이어 레글레르(Legler) 사(社)로 넘어가자 대부분의 집들을 다 매각해 버렸다. 현재는 6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폴리 산업 그룹[Polli industrial group]을 이끌고 있다. 이는 3,200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던 최고 번영기와 비교되는 규모이다. 전체의 복합 단지의 배치는 기하학적으로 규칙적인 형태를 띠며 카프리아테에서 이어진 주요 도로로 인해 두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다. 아다 강의 왼쪽 강둑에 오른쪽으로 중세시대의 장식을 한 단층 공장 단지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이 공장 단지 안에 있는 사무실 건물은 에르네스토 피로바노(Ernesto Pirovano)가 설계한 것이다. 이 건축가는 실비오 베니뇨 크레스피가 경영하던 시기에 많은 건축물을 세웠다. 주 도로 정면에 들어선 집들은 세 줄로 된 직사각형 격자 도로 내에 지어졌다. 처음 설계 당시에는 방이 4칸 딸린 여러 가족이 함께 사는 2층 건물이었다. 나중에 설계에는 단층 주택에 소형 정원과 텃밭이 각각 딸려 있고, 집 뒤쪽 멀리 떨어진 곳에는 화장실이 있다. 초기에 지은 집과 후기에 지은 집들은 스타일과 배치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집의 형태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어 도시 풍경에 즐거운 다양성을 준다. 교회는 건축가 루이지 카베나기(Luigi Cavenaghi)에 의해 부스토 아르시치오(Busto Arsizio)의 광장에 있는 브라만테(Bramante)의 산타마리아(Santa Maria) 사원을 본떠 설계되었고, 1891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2년 뒤에 완공되었다. 교회는 마을 북쪽 끝, 학교와 극장이 포함되는 광장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피로바노(Pirovano)의 성은 작품인 1897년에 완성되었다. 성은 신고딕 양식 롬바르디아의 요소와 베네토(Veneto)에서 유입된 무어 인의 양식을 띤 조각품들과 회화 작품들의 합작품이다. 성의 앙상블은 여러 가지 다른 종류들로 이뤄진 자재를 사용하여 감동을 더하고 있으며 로마 고딕 양식이 연상되는 건축물이다. 크레스피 가족 묘의 색채가 강한 묘지 건물은 아르누보 기법을 가미한 가에타노 모레티(Gaetano Moretti)의 건축물이다.

세계문화유산(341)/ 이탈리아

 

시에나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Siena; 1995)

 

 

 

 

 

 

 

 

 

 

 

 

 

 

 

 

 

 

 

 

 

 

 

 

 

 

 

 

 

 

 

 

 

 

 

 

 

 

 

 

 

 

 

 

 

 

   토스카니 주[Tuscany] 시에나 지역[City and Province of Siena]에 속하는 시에나는 피렌체와 도시 개발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던 중세 도시의 전형이다. 시에나는 12~15세기에 고딕 양식의 도시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건축물들이 수세기 동안 보존되어왔다. 이곳에서 활동한 두초(Duccio), 로렌체티(Lorenzetti) 형제와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같은 화가들은 이탈리아와 유럽의 예술 사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캄포(Campo) 광장을 중심으로 조성된 시에나는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지도록 고안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시에나는 중세 시대의 특징과 가치를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잘 보존하고 있는 도시이다. 이곳의 예술과 건축 그리고 중세 시대의 도시 설계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시에나 역사 지구는 7㎞ 길이의 성벽[14~16세기]으로 구분되며, 성벽은 도시가 자리 잡은 3개 구릉의 등고선을 따라 이어진다. 피렌체의 거리에 있는 카몰리아 문[Porta Camollia]처럼 전략적 지점에는 2개씩 문이 있는 성벽과 부속 포루와 망루들이 갖추어져 있다. 서쪽 편은 1560년 메디치에 의해 재건되고 1580년에 새로 건설된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 요새를 에워싸듯 형성되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확장이 된 역사 지구의 성벽은 25㎞ 거리의 갤러리 네트워크의 일부와 보티니(bottini)를 포함하고 있다. 보티니는 지하수로망으로 연결된 저수조로, 지하수를 보티니에 저장해두었다가 지상의 분수로 내보내 물을 이용하도록 하였다. 시에나는 노련한 산 갈가노(San Galgano) 수도사들의 경험 덕을 본 것은 분명하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중앙 분수대들은 고딕 양식의 포르티코(portico)와 유사한 건축물이다. 역사 중심지는 3개의 주요 간선 도로가 크로체 델 트라발리오(Croce del Travaglio)를 중점으로 해서 만나게 되어 있는 Y자형으로 구획되어 있다. 크로체 델 트라발리오는 캄포 광장이로 대표되는 곳이며, 이곳은 다시 작은 길들로 갈라져 나가게 되어 있다. 주요 거리를 따라 열을 지어 서 있는 주택과 궁전들은 두드러지는 몇몇 건물과 함께 독특한 도시의 공간을 연출해 내고 있다. 세 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있는 캄포 광장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가장 훌륭하게 만들어진 개방형 광장 중 하나이다. 이 광장은 중세 도시의 성장과 도시 공동체 권력의 대두와 때를 같이하여 형성되었다. 프란치제나 거리[Via Francigena]의 절반과 오늘날의 ‘비아 반치 디 소프라(Via Banchi di sopra)’와 ‘비아 반치 디 소토(Via Banchi di sotto)’ 거리의 전 구간에는 금융과 상업 활동이 집중되었으며, 캄포 광장에는 두 구역으로 나누어진 시장이 들어섰다. 12세기 말, 도시자치 정부는 반원형[부채꼴 모양]의 개방형 광장을 만들기 위해 두 구획을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일련의 법령을 제정하여 상업 활동뿐 아니라 서비스나 일반 주택 건축에 있어 더블 아치형 창문 혹은 트리플 아치형 창문의 규모를 규제하기로 했다. 이는 광장을 둘러싼 건축물의 외관에 통일성을 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푸블리코 궁전[Palazzo Pubblico] 건물은 공동 정부 자리에 동시에 지었다. 이 궁전은 부드럽게 안쪽으로 굽고 총안(銃眼)이 있는 파사드(facade)로 되어 있으며, 고딕 트리플 아치형 창문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궁전 안에는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의 《마에스타(Maesta)》와 암브로조 로렌체티(Ambrogio Lorenzetti)의 《사악한 정부의 알레고리(Allegoria del Buon Governo)》 등 수많은 중세 시대 회화 명작들이 있다. 토메이(Tomei) 궁전과 부온시뇨레(Buonsignore) 궁전 등 상공인이나 귀족 가족을 위한 고딕 양식 궁전은 폭을 넓히고 벽돌을 사용했다. 이들 건물은 이른바 ‘구엘프(Guelph)’ 크레닐레이션(crenellation; 건물 벽면에 부착하는 요철 모양의 흉벽)이라고 불리는 큰 창문이 특징인 푸블리코 궁전을 모델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푸블리코 궁전 내에 공공 기관을 설치하고 나서 광장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 시작되었다. 광장의 바닥을 포장하고, 야코포 델라 퀘르차(Jacopo della Quercia)가 장식한 가이아 분수[Fonte Gaia]를 설치했다. 그리고 궁전의 맞은편에 만자의 탑[Torre del Mangia]과 광장 성당[Cappella della Piazza]을 세웠다. 메디치 하에서의 광장은 멋진 축제를 위한 이상적인 공간이 되었다. 광장에서는 시에나의 각 구역의 팀들이 겨루는 유명한 말달리기 시합인 팔리오(palio)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마을의 가장 높은 지점에는 산타마리아 대성당이 세워져 있다. 성당의 파사드의 아래 부분은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의 작품이며, 조반니 디 체코(Giovanni di Cecco)가 두오모 대성당[Nuovo Duomo]을 지은 후 이 성당을 완성시켰다. 두오모 대성당은 ‘새로운 성당’이라는 뜻으로 대성당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알프스 북쪽의 고딕 성당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대성당의 훌륭한 바닥은 잘 보존되어 있으며 설교단은 니콜라 피사노(Nicola Pisano)가 조각한 것이다.

세계문화유산(340)/ 이탈리아

 

나폴리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Naples; 1995)

 

 

 

 

 

 

 

 

 

 

 

 

 

 

 

 

 

 

 

 

 

 

 

 

 

 

 

 

 

 

 

 

   캄파니아 지방[Campania] 나폴리 시[City and Province of Naples]에 속하는 나폴리는 기원전 470년경 그리스 정착민들이 네아폴리스(Neapolis; ‘새로운 도시’라는 뜻)라는 도시로 건설되었으며, 그 모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누오보(Nuovo) 성과 산타 키아라(Santa Chiara) 성당과 같은 훌륭한 기념물이 풍부한 독특한 유적이다.

  나폴리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 오늘날의 도시 구조에는 그 도시의 유구한 역사가 간직되어 있다. 나폴리는 거리의 패턴, 여러 시대로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역사적 건물들, 나폴리 만에 자리 잡은 입지 조건 등으로 유례없이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나폴리의 중요성 가운데 상당 부분은 도시 구조에 기인하며, 무려 2,500년의 도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 식민 도시로서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발굴을 통해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졌다. 식민 시대에 만들어진 원래의 성벽 가운데 3개의 구역은 북서쪽에서 볼 수 있다. 로마 시대의 유적은 대규모의 극장, 묘지, 지하 묘지 등 훨씬 더 구체적이다. 나폴리에서 가장 오래 지역의 거리 구획은 이 같은 고전적인 기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의 시기에는 교회 건물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성벽 바깥쪽의 산 젠나로(San Gennaro) 교회, 산 조르조 마조레(San Giorgio Maggiore) 교회, 성 조반니 마조레(San Giovanni Maggiore) 교회 등은 4세기 및 5세기 건축의 유물이다. 14세기에 세워진 대성당의 산타 레스티투타(Santa Restituta) 예배당은 나폴리 최초의 기독교 교회로 알려져 있다. 카스텔 델로보(Castel dell’Ovo) 성은 노르만시대로부터 전해지는 가장 구체적인 유적이다.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였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 요새 겸 수도원으로 세워진 그 건물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재건축이 이루어졌으며, 17세기 말에 이르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노르만・슈바벤 시대에 지어진 도시는 거의 고전적 성벽 내부에 남아 있었지만 앙주 왕가가 들어서자 마을 외곽이나 주변 마을로 흡수되거나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서양 예술과 건축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고딕 양식이 국내의 건축과 종교 예술 분야에 만연했다. 앙주 왕가 기간 동안에 새로운 성당, 산 로렌초 마조레(San Lorenzo Maggiore) 성당, 산 도미니코 마조레(San Domenico Maggiore), 산타 키아라와 그 밖의 교회 건축물, 그리고 누오보 성, 타란토 왕자의 카푸아노(Capuano) 성과 궁전과 같은 일반 건축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남부의 강한 영향을 받아 나폴리에는 정교한 프로방스식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이 많이 건축되었다. 아라곤 왕조가 즉위하자 많은 건물이 지어졌으며 재건축이 시작되었다. 도시의 성벽을 새로 단장하고 보수 개선하였다. 나폴리의 르네상스 유산은 대부분 이탈리아 건축가들의 작품이고, 일부는 카탈로니아의 건축물이다. 지금은 폐허가 된 산 세베리노(San Severino) 궁전은 이 시대의 화려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산타 카테리나 포르미엘로(Santa Caterina a Formiello)와 몬테올리베트 복합 단지[Monteoliveto complex] 등 많은 주요 교회 건축물들이 이 시대에 세워졌다. 16세기 초, 이후 두 세기 동안 이어지는 스페인의 통치가 시작되었으며, 이때 방어 시설을 강화하게 된다. 특히 톨레도의 페드로 총독이 다스린 20년간, 사회를 재구성하기 위한 그의 구상 중 일환으로 도시 정책이 수립되었다. 1600년에 왕궁을 짓고, 한쪽에는 플레비시토(Plebiscito) 광장이 건설되었다(1510~1593). 교회 건물에는 분수대, 자선 기관 단체인 몬테 데이 포베리 베르고그노시(Monte dei Poveri Vergognosi), 산타고스티노 데글리 스칼치(Sant'Agostino degli Scalzi), 카포디몬테에 있는 예수회 학교 박물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변 도시는 외곽으로 계속 뻗어 나갔고, 이곳 역시 대규모의 종교 건축물과 일반 건물들이 세워졌다. 성벽의 내외부에 조성한 구역은 국적, 사회 계급과 사업 업종별로 구별하였다. 항구도 17~18세기에 걸쳐 도시의 증가하는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성장하였다. 19세기에는 도로의 계획에 급진적인 변화를 보인다. 페르디난트 6세(Ferdinand IV)의 재위 당시 세운 메르카토(Mercato) 광장이 주목할 만한 건축물이며, 이후 목재로 지은 막사는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1860년 대통합으로 대대적인 사회 복구 계획과 사회 재건 사업이 벌어져 빈민가를 깨끗이 청산한 결과, 초기에 세웠던 많은 건축물들이 제거되었다. 도로 역시 구 시가지의 도로를 부수고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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