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369)/ 이탈리아

 

시라쿠사와 판탈리카 바위 네크로폴리스

(Syracuse and the Rocky Necropolis of Pantalica; 2005)

 

 

 

 

 

 

 

 

 

 

 

 

 

 

 

 

 

 

 

 

 

 

 

 

 

 

   시칠리아[Sicily] 시라쿠스 현과 시[City and Province of Syracuse]에 속하는 시라쿠사와 판탈리카 바위 네크로폴리스[암석 묘지]는 그리스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요한 흔적이 남아 있는 유산이다. 판탈리카의 바위 네크로폴리스는 노천 채석장 근처에 5,000여 개의 바위를 쪼아 만든 무덤이다. 무덤의 대부분은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졌다. 이 무덤 외에도 판탈리카 지역에는 비잔틴 시대의 유적들도 남아 있는데 특히 왕자의 궁전인 아나크토론(Anaktoron)의 궁전 터가 눈에 띈다. 고대 시라쿠사는 기원전 8세기에 코린트에서 온 그리스 인들이 건설한 오르티지아(Ortygia) 섬을 중심부로 삼아 발전하였다. 키케로는 시라쿠사를 일컬어 ‘가장 위대하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 도시’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도시 유적지는 아테나 신전[기원전 5세기에 세워졌으나 후에 성당으로 개조됨], 그리스 극장, 로마 원형 극장, 요새 등의 유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비잔틴 시대부터 부르봉 왕조 시대까지, 아랍-이슬람 족, 노르만 족, 호엔슈타우펜 왕조[Hohenstaufen dynasty; 1197~1250]의 프레데리크 2세(Frederick II), 아라곤 왕국과 양 시칠리아[Two Sicilies] 왕국 등 여러 세력의 지배를 받아 혼란스러웠던 시칠리아의 역사를 반영하는 곳이다. 시라쿠사는 3,000년에 걸친 지중해 문화의 발달을 보여 주는 독특한 증거이다.

  시라쿠사와 판탈리카 유적은 뛰어난 문화적 다양성을 가진 약 3,000년에 걸친 문명의 발달을 보여 주는 훌륭한 증거이다. 이 유산들은 시칠리아 섬의 남동부 지중해 해안에 있다. 이곳은 크게 눈에 띄는 점은 없지만 기후 조건이 늘 양호했기 때문에 원사시대[protohistoric] 이후 사람들이 거주했다. 판탈리카 바위 네크로폴리스는 소르티노(Sortino) 지역의 남북으로 약 1,200m, 동서로 약 500m에 걸쳐 퍼져 있다. 언덕 비탈[동굴과 낭떠러지]에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함께 약 5,000개의 무덤들이 펼쳐지는데 이 무덤들 대부분은 암석 표면을 깎아 내어 만든 것이다. 이 일대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연구로 남아 있던 그리스 식민지 시대의 주거지 유물이 빛을 보게 되었다. 미케네에 기원을 두고 있는 물건들과 기념 건축물들이 인정되어 아나크토론(Anaktoron; 왕자의 궁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9, 10세기에 이 유적지에 다시 사람이 거주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당시 이 지역은 아랍군의 시칠리아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용으로 사용되었다. 신석기시대부터 확실하게는 13세기 초 무렵부터 사람이 거주해 온 것으로 보아 시라쿠사는 그 설립에서 서부 지중해에서 그리스의 발전상을 상징한다. 이 도시는 8세기에 고대인들이 매우 크고 아름답게 건설했다. 오늘날 오르티지아 섬인 도시의 중심부에는 고대에 이미 유명해진 2개의 천연 항구가 있었다. 오르티지아는 다섯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펜타폴리스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두 항구는 현재도 여전히 볼 수 있다. 동쪽에 피콜로(Piccolo) 항과 서쪽에 그란데(Grande) 항이 있다. 오르티지아는 중앙에 주요 도로가 있고, 고대 그리스 도시의 직각 평면도를 연상시키는 기원전 7세기에 건설된 도로망이 있다. 그리스의 유물로 볼 수 있는 것들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아폴로 신전[Temple of Apollo; Apollonion], 이오니아 신전[Ionic Temple], 아테나 신전[Temple of Athena; Athenaeion]이 있다. 로마의 것을 제외하고 가장 큰 지하 묘지 카타콤은 고대 기독교 시대의 것이다. 그 뒤에 비잔틴 시대부터 부르봉 왕조 시대까지 험난했던 시칠리아의 역사를 보여 주는 유적으로는 세례 요한 교회[St John the Baptist; 4~16세기], 성 마르틴 교회[St Martin; 6~14세기], 벨로모 궁전[Bellomo Palace; 13~18세기], 밀리아초 궁전[Migliaccio Palace], 아베바 두니엘리(Abeba Dunieli) 궁전, 프란치카노바(Francica-Nova) 궁전(15세기), 산 프란체스코 알 림마콜라타(San Francesco all'Immacolata) 교회(13~18세기), 콜레조(Collegio) 교회[17세기에 예수회에서 건립]가 있다. 대광장이 딸린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대성당으로 기원전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 신전의 유물을 포함하고 있다. 1996~1998년에 광장 지하를 발굴한 결과 시라쿠사의 역사와 고대의 기념물에 대한 지식이 진일보하였다. 1952~1955년에 조성된 나폴리 고고학 공원에는 시칠리아의 과거를 보여 주는 그리스와 로마의 뛰어난 기념물들이 있다. 웅장한 그리스 극장, 님파이움 지역[동굴이 있음], 아폴로 성지, 히에로 2세(Hiero II; 기원전 265~기원전 215, 시라쿠사의 왕)의 웅대한 제단, 로마의 원형 극장, 거대한 채석장,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이 있는 그로티첼레(Grotticelle) 공동묘지가 그것이다.

세계문화유산(368)/ 이탈리아

 

체르베테리와 타르퀴니아의 에트루리아 인 네크로폴리스

(Etruscan Necropolises of Cerveteri and Tarquinia; 2004)

 

 

 

 

 

 

 

 

 

 

 

 

 

 

 

 

 

 

 

 

 

 

 

 

 

 

   라티움 지방[Region of Latium] 로마와 비테르보 시[Province of Rome and Viterbo]에 속하는 체르베테리와 타르퀴니아 두 도시에 있는 고대 에트루리아 인 공동묘지[Necropolises]는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 사이의 다양한 매장 풍습을 보여 준다. 또한 900여 년간 지중해 북부에 최초의 도시 문명을 발전시킨 에트루리아 문화의 업적을 보여 준다. 암석을 깎은 것과 인상적인 투물리(tumuli; 분묘)로 덮은 것도 있고 거대한 봉분을 얹은 무덤도 있다. 많은 무덤들의 벽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으며 뛰어난 수준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반디타차(Banditaccia)’로도 불리는 체르베테리 근처 공동묘지에 있는 수천 개의 무덤들은 거리와 작은 광장, 이웃이 모여 있는 하나의 도시 구조와 같은 배치를 보인다. 유적은 암석을 깎아 만든 석실묘, 투물리, 바위에 조각을 한 세밀한 구조의 오두막이나 가옥 형태의 묘 등 3개의 양식으로 나뉜다. 이 무덤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에트루리아 인의 거주 건축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다. 몬테로치(Monterozzi)로도 불리는 타르퀴니아의 대규모 공동묘지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6,000개의 무덤들이 있다. 이 중에서 200개의 무덤은 채색 묘로 유명하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체르베테리와 타르퀴니아의 공동묘지는 로마 시대 이전에 이탈리아에 존재했던 유일한 도시 문명이었던 고대 에트루리아의 독특하고 뛰어난 문명을 보여 준다. 더욱이 에트루리아 인들의 가옥과 거의 흡사하게 만든 무덤에서 나온 프레스코화는 에트루리아 인들의 일상생활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사라진 문화를 보여 준다. 많은 무덤들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건물 형태로 되어 있다. 에트루리아의 도시 계획에 따라 만든 공동묘지는 이 지역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묘지들이다. 체르베테리의 공동묘지[Banditaccia]는 기원전 9세기부터 조성되었으며, 기원전 7세기부터 정확한 평면도에 따라 확장되었다. 타르퀴니아 공동묘지[Monterozzi]의 고대 역사와 발달도 비슷하다. 기원전 9세기부터 이탈리아의 중서부 지역에서 살았던 에트루리아 인들의 문화는 기원전 6세기에 전성기에 달했다. 이들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유럽이나 아시아 어디에서도 같은 민족적・사회적 특성을 가진 집단이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인도-유럽 어족이 아닌 기원을 알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였다. 이 묘지들은 각각의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에트루리아의 매장 문화를 두루 보여 준다. 체르베테리의 광활한 묘지에 있는 수천 개의 무덤들은 거리, 작은 광장, 이웃이 모여 있는 마치 하나의 도시와 같은 배치 구조를 보인다. 무덤들은 시대, 가문의 지위, 그 외의 다른 기준에 따라 형태가 다르다.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죽은 사람의 재를 담고 있는 납골함이 있는 바위를 깎은 석실묘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투물리로 웅장한 봉분 아래 하나 이상의 무덤이 있다. ‘오두막 형태의 무덤[Hut Shaped Tomb]’으로 알려진 기원전 4세기의 무덤도 유명하다. 벽 옆의 돌 침상 외에도 박공지붕, 대들보, 목재, 짚 지붕 재료 등 여러 건축 요소들을 사용한 뛰어난 석실이 있다. 집의 구조를 모방한 이 무덤은 에트루리아 인들의 주거 건축술의 최고봉을 보여 주는 유일한 증거이다.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항아리[Greek Vase] 무덤은 에트루리아의 신전을 모방한 드로모스(dromos)이다. 몰딩(moulding; 천장 장식 띠) 무덤에는 문 옆에 바위를 깎아 만든 2개의 의자가 있으며 의자 밑에는 발을 얻는 받침이 있다. 이것 또한 당시의 가옥 내부를 모방한 것이다. 기둥머리 무덤은 천장을 마루처럼 꾸몄다. 반디타치아(Banditaccia)의 수천 개의 무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안식의 묘[Tomb of Reliefs]’이다. 기원전 4세기 무덤은 바위를 깎은 긴 계단을 통해 들어가면 2개의 아이올리스(Aeolic; Aeolis) 기둥으로 떠받친 천장이 있는 큰 석실이 나온다. 이중으로 벽을 깎은 감실이 13개 있고 특별하게 깎은 선반에 34구의 시신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더 있다. 13개의 감실은 붉게 칠한 치장 벽토로 이중 등 받침대가 있다. 치장벽토를 바른 벽에는 무기, 집 안에서 쓰는 물건, 종교 물건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이 그려져 있다. 일명 몬테로치로 불리는 타르퀴니아 공동묘지는 채색 묘로 유명하다. 모두 바위를 깎아 만들었고 경사면이나 계단식 통로를 통해 들어간다. 대부분은 하나의 묘실에 두 구의 시신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채색 묘는 기원전 7세기의 것이지만 기원전 6세기에 와서야 완전히 채색되었다. 기원전 4세기의 ‘암사자의 묘[Tomb of the Lioness]’는 박공지붕의 작은 묘실로 이루어져 있다. 날아가는 새, 돌고래, 에트루리아의 계급 사회를 보여 주는 내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6세기의 사냥과 낚시 묘는 2개의 묘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신성한 숲 속에서 춤추고 있는 주신제의 그림이고, 두 번째는 사냥・낚시 장면・무덤주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좀 더 단순한 채색한 귀족들의 묘는 부장품들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예술 활동 외에도 일상생활, 의식 절차, 신화를 보여 준다.

세계문화유산(367)/ 이탈리아

 

발 도르차(Val d'Orcia; 2004)

 

 

 

 

 

 

 

 

 

 

 

 

 

 

 

 

 

 

   토스카나 주[Tuscany] 시에나 현[Province of Siena]에 속하는 발 도르차(Val d’Orcia)의 경관은 시에나 내륙 농업 지방의 일부가 14, 15세기에 도시 국가의 영토로 통합되었을 때, 훌륭한 통치의 이상을 반영하고 미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조성하기 위해 재설계하여 개발한 지역이다. 이곳은 원추형에 가까운 낮은 언덕 위에 요새화된 거주지가 있는 편평한 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 풍경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들은 잘 관리된 르네상스 농촌 풍경의 아름다움의 전형이 되었다. 등재 유산에는 혁신적 토지 관리 시스템을 보여 주는 농업적, 목가적 경관, 도시와 마을, 농가, 로마의 프란치제나 길(Via Francigena), 수도원, 여관, 사원, 다리 등이 포함된다.

   발도르차는 훌륭한 통치의 이상을 반영하고 미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조성하기 위해 경관을 바꾼 르네상스 시대의 우수한 방식을 잘 보여 준다. 시에나의 남동쪽에 자리하고 북쪽 경계는 도심에서 약 25㎞ 떨어져 있다. 발 도르차의 경관은 14, 15세기의 시에나 상인들의 정착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효율적인 농경지로서뿐 아니라 눈으로 보기에도 즐거운 경관을 만들어 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만들어 낸 경관은 신중하고 의도적인 배치와 설계가 엿보이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경관’ 개념의 시초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경관은 효율적이며 기능적이면서 미적으로도 아름다웠다. 혁신적인 토지 관리 시스템에 기초하여 상인들이 소유한 토지를 작은 면적으로 나누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였다. 생산물의 절반은 상인들에게 소작료로 지불했는데 상인들이 농경 발전을 위해 재투자할 만큼 충분하였다. 농장 운영은 곡물, 포도, 올리브, 과일을 재배하면서 농가들 사이에 가축을 키우기 위한 목초지를 가꾸는 혼합농업이었다. 농민들은 메렘마(Meremma) 산과 아미아타(l’Amiata) 산길을 따라 이동 방목을 하였다. 아름다운 풍경의 농업 경관을 만들려는 목표는 포도밭을 꾸미기 위해 장미를 심는 전통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길가와 주거지 주변에 심은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그 경관에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둥그런 언덕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심은 모양과 그 어두운 색채는 희미한 풍경과 아름다운 대비를 이룬다. 경관은 그 땅에서 일해야 하는 농민들, 가족들, 일꾼들을 위한 새로운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형성되었다. 또한 기존의 마을들을 더욱 확대하고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새로 계획된 마을의 가장 극적인 사례는 피엔차 마을로서 그 이름은 마을의 창건자인 교황 비오 2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비오 2세는 1459년에 베르나르도 로셀리니를 시켜 광장을 중심으로 성당과 궁전과 공공건물들이 있어 행정 기관과 종교 기관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이상 도시’를 만들 수 있도록 마을을 확대하였다. 더 커진 언덕 위의 요새 마을은 13세기에는 원래 경계 초소였던 몬탈치노(Montalcino), 라디코파니(Radicofani), 카스틸리온 도르차(Castiglion d’Orcia), 로차 도르차(Rocca d’Orcia), 몬티첼로(Monticchello)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디를 가나 작은 언덕 위에는 작은 마을이 있고, 몇몇은 요새화되었다. 이 마을들에는 시에나가 처음으로 이 지역을 통치한 13세기 때의 건물들, 14세기와 15세기에 도시가 확장되던 시기의 건물들, 16세기 피렌체 통치 하에 건설된 건물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이 세계문화유산 지구의 경관에서는 큰 농가들이 눈에 띄는 요소이며 로지아, 벨베데레스, 포치[건물 입구에 지붕이 얹혀 있고, 흔히 벽이 둘러진 현관], 진입로 양쪽으로 나무가 심어진 길 등의 눈에 띄는 건축요소가 풍부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시에나와 연결지로서의 전략적 중요성과 발 도르차 지역의 발달은 로마 시대 이후 로마를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와 연결하는 남북로 프란치제나 길[로마시대에는 카시아 가도로 알려져 있었다]과 얽혀 있다. 중세 말 이후 이 길은 로마 교회와 그 교구들을 연결해 주는 기독교의 길로 이용되었다. 또한 순례자들과 상인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었고, 다양한 사상이 이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이 길은 산탄티모(Sant’Antimo) 수도원의 콜레기아타 디 산 퀴리코(Collegiata di San Quirico)와 같은 멋진 교회와 수도원들을 발달시켰다. 발 도르차의 경관은 (시에나와 더불어) 유토피아적인 이상과 관련이 깊다. 시에나는 일종의 ‘공동체’였고, 발 도르차는 오랫동안 지속 가능한 농촌의 발전 모델이었으며, 둘 다 최고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1338~1340년에 로렌제티(Lorenzetti)가 시에나의 시공회당에 그 이상적 풍경을 그려 놓았는데, 그것이 발 도르차에서 현실이 되었다. 그 이상을 더욱 강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 조반니 디 파올로(Giovanni di Paolo)와 사노 디 페트리(Sano di Petri) 같은 미술가들의 그림에도 영원히 남았다.

세계문화유산(366)/ 이탈리아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의 사크리 몬티

(Sacri Monti of Piedmont and Lombardy; 2003)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9개의 사크리 몬티(Sacri Monti; ‘성스러운 산’이라는 뜻)는 롬바르디아와 피에몬테 주(Regions of Lombardy and Piemonte)에 속하며, 16세기 말에 시작해 17세기에 완성된 예배당과 부속 건물들로 기독교 신앙의 다양한 측면을 잘 보여 준다. 사크리 몬티는 상징적인 영적 의미와 더불어 언덕・숲・호수 등 주변의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어 낸 훌륭한 솜씨로 인해 더욱 아름답다. 내부에는 벽화와 조각 등 중요 미술품이 보관되어 있다.

  사크로 몬테(Sacro Monte; Sacri Monti의 단수형)는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이슬람 문화가 급속히 확장되면서 순례자들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성지로 접근하기 어려워져 그 대안으로 유럽에 기도소를 만들 목적으로 세워졌다. 성묘를 지키던 프란체스코 수사들은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할 장소로 원래의 장소와 지형적으로 유사한 세 지역을 선정했다. 밀라노의 공작 영지에 속해 있던 발세시아(Valsesia)의 바랄로(Varallo), 토스카나(Tuscany)의 몬타이오네(Montaione), 포르투갈 북부의 브라가(Braga)가 그것이다. 몇 년 뒤, 특히 1535년에 트리엔트(Trent) 공의회가 열린 후부터는 1480년경에 건설된 바랄로의 모델이 특히 밀라노 참사회의 관할 하에 있던 교구들에서 또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즉 설교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더 많은 사크리 몬티를 창출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의 영향에 맞서기 위해 예수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성자들・삼위일체・로자리오(Rosary; 성물)의 숭배에까지 봉헌되었다. 이 이상적인 계획은 유형별 분류와 건축 양식의 세부 기준을 확충하여 밀라노의 주교 카를로 보로메오(Carlo Borromeo)가 강하게 추진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나온 계획에 따라 곧바로 바랄로의 사크로 몬테를 완성하고 이어서 다른 것들도 시작하였다. 이 단계는 17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바랄로에 이어 크레아(Crea), 오르타(Orta), 바레세(Varese), 오로파(Oropa), 오수치오(Ossuccio), 기파(Ghiffa), 도모도솔라(Domodossola), 발페르가(Valperga)에서 사크리 몬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일정한 기본 규칙을 따랐지만 건설이 진행되면서 개별적인 예술과 건축술을 개발하였다. 18세기 내내 다른 사크리 몬티가 계획되고 건설되었으나 이것들은 종교적 동기, 엄격한 규칙에 따른 참된 구도, 16~17세기 이전의 시기를 말해 주는 아름다운 건축과 예술적 요소가 부족하여 더 이상 다른 양식들의 모범이 되지 않았다.

세계문화유산(365)/ 이탈리아

 

시칠리아 남동부 발 디 노토의 후기 바로크 도시

[Late Baroque Towns of the Val di Noto (South-Eastern Sicily);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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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칠리아, 카타니아, 라구사, 시라쿠사 주[Provinces of Catania, Ragusa, and Syracuse, Sicily] 등 시칠리아 섬 남동부에 있던 8개 도시 칼타지로네(Caltagirone)・밀리텔로 발 디 카타니아(Militello Val di Catania)・카타니아(Catania)・모디카(Modica)・노토(Noto)・팔라촐로(Palazzolo)・라구사(Ragusa)・시클리(Scicli)는 모두 1693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후 옛 도시의 폐허 위에 혹은 그 근처에 도시를 재건되고 새롭게 조성했다. 수준 높은 예술과 건축 기술을 자랑하는 이 도시들은 재건 사업을 위한 집단적인 노력이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었음을 보여 준다. 당시 유행하던 후기 바로크 양식을 따르면서도 도시 계획과 건축에서는 새롭고 독특한 기법을 도입하였다.

  시칠리아 섬 남동부에 자리한 도시들은 유럽 바로크 예술의 절정기를 보여 준다. 유산으로 지정된 도시 중 칼타지로네미텔로는 중세 이전에 건설된 곳이다. 모든 도시는 중세에 존재했고, 기본적으로 성과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발 디 노토 지역에서 꽃피운 후기 바로크 예술과 건축술의 우수성은 양적인 면 외에도 지리적・시간적 동질성[homogeneity]에 있는데 1693년 이 지역을 휩쓴 지진의 여파로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도시들은 모두 중세부터 존재해 왔으며, 기본적으로 성과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이 16세기와 17세기에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보이며, 1693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약 9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지진의 피해는 각 지역마다 차별적이었다. 즉, 카타니아와 알베리아 산 위에 있던 노토가 파괴된 반면 미텔로는 부분적으로만 피해를 입었고, 라구사는 좀 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지진에 대한 대응도 역시 달라서 카타니아는 같은 자리에 완전히 재건을 하였고, 미텔로는 일부의 복구를 포기하였다. 라구사는 새로운 지역과 이전 지역을 통합하였는가 하면 노토는 새로운 지역에 완전히 재건하였다. 모든 도시가 18세기까지 건축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교회와 대형 공공건물과 궁전을 많이 지었다. 1990년에 또 다른 지진이 몇몇 도시, 특히 라구사에 영향을 주었다. 유산 지정은 거의 대부분 18세기의 도시 예술과 건축술에 기초를 두었고, 도시의 경제나 도시와 시골의 관계에 관한 언급은 없다. 칼타지로네는 다면적 도시 계획과 건축 기술에 있어 파사드(facades)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1693년 이전과 이후의 이례적인 연결고리로서도 의미가 크다. 그 지역의 모양새로 인해서 도시 내부에는 다채로운 건축 양식이 있다. 가장 중요한 건물로는 산타마리아 델몬테 교회[churches of Santa Maria del Monte], 사도 성 야고보 교회[St James the Apostle], 성 요셉[St Joseph] 교회, 성 도미니크[St Dominic] 교회, 신성 구세주[Holy Saviour] 교회, 성 키아라[St Chiara]와 성 리타 교회[St Rita], 성 스테판[St Stephen] 교회, 성 프란시스 아시시[St Francis of Assisi] 교회를 들 수 있다. 이 외에 세속적인 건물로는 카피타날레 법원[Corte Capitanale], 시립 박물관, 옛 전당포, 성 프란체스코 다리 등이 있다. 밀리텔로 발 디 카타니아는 14세기부터 건축된 건축물이 풍부하다는 점과 17세기 지진 발생 전에 벽으로 둘러싸였던 도시 배치의 우수성 면에서 의미가 있다. 시칠리아의 봉건적 도시의 선두였으며, 후기 바로크 복원 양식을 충실히 따랐다. 주요 건물로는 산 레오나르도(San Leonardo) 구역에 있는 성 니콜로 교회와 성 안토니 수도원장이 선교 활동을 한 현장에 1741년 완공된 산타마리아 델라 스텔라(Santa Maria della Stella) 교회가 있다. 카타니아는 파괴된 도시의 폐허 위에 전체적이며 기하학적인 단일 평면도로 재건되어 특별히 우수한 도시 설계를 보여 준다. 그 중심부에는 두오모 광장[Piazza del Duomo]과 데이 크로시페리 도로[Via dei Crociferi]가 있으며, 근처에 바디아 드 산아가타(Badia de Sant'Agata) 교회, 콜레지아타(Collegiata), 베네딕트 수도원, 비스카리 궁전[Palazzo Biscari]이 있다. 모디카는 2개의 도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좀 더 오래된 도심은 남쪽 바위산인 이벨리(Ibeli)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1693년 지진 이후에 언덕 아래쪽에 재건되었다. 성 게오르크 성당과 성 피터 교회와 같은 인상적이면서 눈에 잘 띄는 도시의 기념비적 건축물이 있다. 노토는 이단 구조로서 상부는 고원에, 하부는 비탈면 아래쪽에 새로 재건되었다. 하부에는 18세기 귀족들의 저택과 9개의 종교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지형과 도시 계획, 건축술이 결합되어 장관을 이루는 ‘바로크 무대 세트[Baroque stage set]’가 되었다. 팔라촐로도 새로운 축을 따라 재건된 중세 도시로서 2개의 중심부가 있다. 모두 1963년 이후의 ‘새로운 마을’로 고대 도시 그리크 아크라이(Greek Akrai)를 따라 줄지어 개발되었다. 성 세바스찬 교회, 성 베드로와 바울 교회는 대부분 1693년 이후에 재건되었으며, 후자는 옛 귀족의 중심이고, 전자는 새로운 도시 계층 지역이 되었다. 고대의 이블라, 라구사는 깊은 계곡으로 분리된 3개의 언덕 위에 건설되어 있다. 역시 중심이 2개이며, 하나는 예전의 중세 배치로 재건되고, 다른 하나는 고지대 라구사로서 1693년 이후에 새로 건설되었다. 이곳에 있는 9개의 교회와 7개의 궁은 모두 바로크 양식이다. 프란체스코 모르미나 펜나(Via Francesco Mormina Penna) 도로가 근처의 베네벤타노 궁전까지 뻗어 있는 시클리는 후기 바로크 시대의 귀족적 건물들을 따라 교회들이 우뚝 솟아 있는 도시 구조를 보여 준다. 이는 아마도 시칠리아에서 화려한 장식을 보여 주는 유일한 곳일 것이다. ‘전도자 성 요한 교회’와 ‘성 미카엘과 성 테레사 교회’는 18세기의 것이다.

세계문화유산(364)/ 이탈리아

 

빌라 데스테, 티볼리(Villa d'Este, Tivoli; 2001)

 

 

 

 

 

 

 

 

 

 

 

   궁전과 정원으로 유명한 티볼리의 빌라 데스테(Villa d'Este, Tivoli)는 라티움 지방[Region of Latium] 로마[Province of Rome]에 위치하며, 르네상스 문화의 특징과 종합적인 모습을 가장 세련되게 보여 주는 곳이다. 분수와 화려하게 장식된 연못 등을 비롯한 정원 안에 설치된 건축 요소들과 정원 자체의 독창적인 설계는 이곳을 16세기 이탈리아 정원의 독특한 본보기로 만들었다. 빌라 데스테는 최초의 ‘경이로운 정원[giardini delle meraviglie]’이었으며, 유럽 정원의 발전을 이끈 초기 모델이었다.

  빌라 데스테의 정원은 유럽 전역의 정원 설계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경이로운 정원’으로서 르네상스 문화의 전성기를 상징한다. 1550년 9월 9일, 에스테 가(家) 출신의 추기경 이폴리토 2세(Ippolito II; 1509~1572)가 티볼리의 지사로 임명되어 이 도시에 도착하였다. 티볼리의 산타마리아 마조레 교회 수도원 지역에 그의 공관이 정해졌으나 그곳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원이 딸린 화려한 저택을 짓기로 하고, 전통에 따라 피로 리고리오(Pirro Ligorio; 1500~1583)에게 설계를 맡겼다. 대저택과 정원으로 구성된 이 별장의 형태는 울퉁불퉁한 네모꼴에, 면적은 약 4.5㏊이다. 저택의 평면도는 이전의 수도원 건물의 일부를 이용해야 했기에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정원이 있는 쪽의 저택 건축 양식은 매우 단순하다. 3층짜리의 기다란 본채는 창이 띠처럼 줄지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측면 부속 건물은 약간 비어져 나와 있다. 균일한 모양의 건물 파사드의 중간에 우아한 로지아(loggia; 한쪽 벽이 없는 복도식 방)가 있어 균일성이 흐트러지고, 높이가 달라서 경사진 계단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는 피렌체의 라파엘로(Raffaello da Firenze)와 비아시아토(Biasioto)가 1566~1567년에 지은 것이다. 아래 부분은 레다 분수[Fountain of Leda]로 장식되어 있다. 2층에 줄지어 있는 저택의 주요 방들은 정원으로 연결된다. 4개의 방으로 구성된 추기경의 개인 집무실은 안뜰과 같은 높이에 있고, 아래쪽에 있는 응접실은 마니카 룽가(Manica Lunga)라고 하는 긴 복도를 따라 뒤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빌라 데스테 정원은 2개의 경사면에 뻗어 있으며, 계단식 극장처럼 저택에서 아래의 편평한 테라스로 내려가는 식이다. 저택의 로지아는 정원의 종축과 중축 구분이 된다. 5개의 횡축은 저택에 의해 생긴 고정 시점으로부터 중축이 되며, 각각의 축은 정원의 주요 분수들 중의 하나에서 끝이 난다. 중앙의 통로가 100개의 분수 축 너머에서 끝이 나면서 저택으로 올라가기에 더 쉬운 사선의 길이 나기는 하지만, 뒤의 것이 주요 시선축이다. 평지 정원에 접해 있는 첫 번째 주요 횡축인 물고기 연못은 3개의 연못이 줄지어 선 형태이다. 이 연못의 동쪽 끝에 직사각형 모양의 오르가노 분수[Fontana dell’Organo]가 있는데 꼭대기가 이중 페디먼트로 겹장식이 되어 있다. 오르가노 분수는 클로데 베르나르의 작품으로 고대의 사례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물과 공기의 상호작용으로 소리가 나는 것이다. 물고기 연못 너머에서 저택 쪽으로 올라가는 2개의 층계가 시작된다. 1567년에 만든 ‘볼루리의 계단[Scalinata dei Boloori]’은 측면에 물이 솟아 나오는 분수가 달린 2개의 난간이 있다. ‘용의 길[path of the Dragons]’이라고 하는 횡단로 너머 중앙 계단에는 드라기(Draghi) 분수가 있으며, 그 주위는 타원형으로 나뉘어 있다. 이 님파이움(nymphaeum; 분수 정원, 물의 님프에게 바친 신전)과 그 엑세드라(exedra; 반원형의 관람석)가 실제로 빌라 데스테 정원의 중심이다. 날개가 달린 4마리 용이 큰 타원형 연못 가운데에서 나타나 물을 내뿜는다. 난간은 역시 물이 흐르는 꽃병으로 장식되어 있다. 삼단으로 길게 늘어선 100개의 연못은 정원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러나 엑세드라의 한복판에 위치한 크라테르(krater; 손잡이가 2개 달린 항아리)에서 뿜어진 물줄기가 큰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사람들이 아무런 상념 없이 아케이드 아래를 걸어갈 때마다 물이 솟는다. 엑세드라 너머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산이 솟아 있고, 삼면의 벽에는 《티부르의 시빌라와 아들 멜리세르테(Sibylla of Tibur with her son Melicerte, 1568년)》와 《신(神) 에르쿨라네오와 아니오의 강(river divinities Erculaneo and Anio)》이 장식되어 있다. 서쪽 반대편에는 1567~1570년에 만들어진 로마의 분수 로메타(Rometta)가 있다. 베르니니(Bernini; 1660~1661)의 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큰잔 분수[Fontana del Bicchierone]는 17세기의 중심부 종축에 장식을 더했다. 이 분수는 톱니 모양 성배의 형태로서, 여기서 물이 높이 뿜어져 소라고둥 껍데기 속으로 떨어진다. 저택으로 들어가는 원래의 입구에 있던 큰 퍼걸러(pergola; 정원에 덩굴 식물이 타고 올라가도록 만들어 놓은 아치형 구조물)도 이 시기에 4개의 작은 분수로 장식되고 고대의 사이프러스나무로 둘러싸인 원형 건물로 교체되었다(1640).

세계문화유산(363)/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과 프란체스코회 유적

(Assisi, the Basilica of San Francesco and Other Franciscan Sites; 2000)

 

 

 

 

 

 

 

 

 

 

 

 

 

 

 

 

 

 

 

 

 

 

 

 

   구릉 위에 건설된 중세 도시 아시시는 성 프란체스코[St Francis; 1182~1266]가 태어난 곳이며,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직무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과 화가 치마부에(Cimabue), 피에트로 로렌체티(Pietro Lorenzetti),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조토(Giotto) 등이 그린 중세 미술 걸작들은 아시시를 이탈리아・유럽의 예술과 건축 발달에 핵심적인 준거 도시가 되었다.

  움브리아 지방의 아시시는 로마 시대에서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시이면서 성소(聖所)로서 유지되어 온 독특한 사례이다. 이는 아시시의 문화 경관, 종교 건축물, 교통 체계 및 전통적 토지 사용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예술과 건축 발달에 큰 영향을 준 뛰어난 예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예술과 종교 정신의 교류는 전 세계의 예술과 건축술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시시는 수바시오(Subasio) 산기슭에 있는 아시오(Asio)라는 구릉의 비탈에 건설된 도시이다. 도시 주거지는 길게 늘어선 형태로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있다. 이 로마 도시 배치는 테라스[계단식]의 배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중세 아시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일생과 업적이다.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창립하였으며, 1228년에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동료였던 클라라 역시 나중에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프란체스코회에 수녀회를 창립하였다. 성 프란체스코의 시성(諡聖) 후에, 그를 기리기 위한 기념 교회를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성당 건설에 이어 성 클라라[St Clare]를 기리는 성 클라라 성당도 건립되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 건축은 1228년에 시작되었다. 1층은 정교한 고딕 양식의 문을 통해 들어가며, 내부는 전체가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253년에 무명의 화가 ‘성 프란체스코의 거장[Maestro di San Francesco]’이 그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조토와 그의 유파가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풍자 그림들, 치마부에가 그린 《왕좌에 앉은 아이를 안은 처녀(Virgin with a child on the throne)》, 조토의 《십자가(Crucifixion)》, 피에트로 로렌체티(Pietro Lorenzetti)와 그의 조수들이 그린 그림들,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의 《마르틴 예배당(Chapel of St-Martin)》이 있다. 2층 성당의 거대한 동쪽 면은 흰색 석회암으로 되어 있고, 중앙에 커다란 장미창(薔薇窓)이 있다. 내부의 벽면은 성인의 신앙과 삶에 대한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8세기에 건립된 산 루피노(San Rufino) 대성당은 1036년 무렵 우고네(Ugone) 주교가 대성당으로 다시 지었다. 서쪽 면은 움브리아 지방의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걸작으로 손꼽히며, 대성당과 스폴레토의 성피에트로 교회와 연관성이 있다. 교회의 내부는 1571년에 단순한 르네상스 형태로 갈레아초 알레시(Galeazzo Alessi)에 의해 전면적으로 재건축되었다. 성 클라라를 찬미하기 위한 성당 건설은 캄펠로의 프라 필리포[Fra’ Filippo da Campello]의 지휘 하에 1257년에 시작되었다. 건물의 외부는 세 개의 큰 부벽이 특징적이고, 애프스(apse; 보통 교회 동쪽 끝에 있는 반원형 부분) 옆에 네모난 종탑이 있다. 교회의 평면 배치는 라틴 십자가에 토대를 두며, 내부 전체는 몇 명의 화가들이 돌아가면서 성 클라라의 전설을 보여 주는 프레스코화를 그려 놓았다. 원래 도시의 성곽 밖에 있던 성 피에트로의 베네딕트 수도원은 1029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12세기 중반에 클루니 개혁을 받아들여 시토 수도회로 넘어갔다. 내부는 소박하며 큰 기둥에 의해 신도석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전통적으로 미네르바 신에게 헌납된 로마의 신전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처음에는 교회로 개조되었다가 이후 1212년에 감옥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1456년부터 다시 교회로 사용되다가 1539년에 산타 마리아 델라 미네르바 성당에 헌납되었다. 수바시오 산 계곡에 자리 잡은 카르체리(Carceri) 수도원은 원래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동료들을 위한 동굴로 이루어져 있었다. 15~19세기 초에 세인트 그로토(saint's grotto) 수도원 자리에 작은 수녀원이 서서히 지어졌다.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수도원 단지는 성 프란체스코의 종교적 각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또한 성 클라라의 수녀원이 된 이곳은 그녀가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Santa Maria degli Angeli) 성당은 원래의 포르치운쿨라(Porziuncola) 예배당을 보호하기 위해 16세기에 갈레아초 알레시가 설계한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이다. 성 프란체스코는 전도단에게 명령을 보내던 이곳에서 훗날 임종하였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3개의 예배당에는 초기의 중요한 그림들이 종교적 유물로서 세심하게 보존되어 있다. 리보토르토(Rivotorto) 성지에 있는 중세의 작은 복합 건물은 유물로서 그리고 프란체스코의 순례지로서 보존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362)/ 이탈리아

 

베로나 시(City of Verona; 2000)

 

 

 

 

 

 

 

 

 

 

 

 

 

 

 

 

 

 

 

 

 

 

 

 

 

 

 

 

 

 

 

  역사 도시 베로나는 베네토(Veneto) 주 베로나[City and Province of Verona]에 속하며, 기원전 1세기에 세워졌다. 13~14세기 스칼리제르 가문[Scaliger family]의 지배 하에서 번성했으며, 15~18세기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로 명성을 떨쳤다. 베로나는 고대,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수많은 기념물을 보존하고 있는 군사 요새의 뛰어난 사례이다.

  베로나는 도시 구조와 건축 면에서 이전 시대 최고의 예술적 요소들을 통합하여 2,000년에 걸쳐 꾸준히 발전해 온 도시의 뛰어난 사례이다. 또한 유럽 역사에서 여러 중요한 시기를 거치면서 발달한 요새 도시의 개념을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 베로나는 이탈리아 북부 레시니 산기슭에 있으며, 아디제(Adige) 강이 흐른다. 고대 부족들이 건설하였으나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 중요성이 급속히 부각되었다. 동고트 족의 테오도리코 1세(5세기)와 롬바르드 족, 그리고 샤를마뉴(774)에 의해 점령되었다. 12세기 초에 독립 자치제가 되어 겔프(Guelphs; 교황파)와 기벨린(Ghibelline; 황제파)의 투쟁 중에 수난을 겪었다. 스칼리제르 가문의 걸출한 인물 캉그란데 1세(Cangrande I)의 치세 기간에 번영을 누렸다. 1405년에 베네치아에 넘어갔고, 1797년부터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로마의 도시가 들어서 있으며, 강이 고리 모양을 그리며 흐른다. 스칼리제르 가문이 성곽을 다시 쌓고, 서쪽으로 영토를 넓혔으며 동쪽 강둑으로 더 광활한 지역을 아우르게 되었다. 20세기까지 이 크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베로나의 심장부에는 그림 같은 채소 시장이 있는 에르베(Erbe) 광장과 시뇨리(Signori) 광장이 있고, 코무네(Comune) 궁전고베르노(Governo) 궁전로지아 델 콘실리오(Loggia del Consiglio)스칼라 가문의 영묘[Arche Scaligere], 그리고 도무스 노바(Domus Nova) 등의 역사적 건물들이 있다. 브라(Bra) 광장에는 고대의 건물이 많다.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베로나는 로마 시대의 유적이 가장 풍부한 도시 중 하나이다. 유적들 중에서 보르사리 문은 데쿠마누스 막시무스(decumanus maximus; 직선대로)의 시작점에 있고, 레오니 문은 반만 남아서 뒤편 건물과 붙어 있다. 가비 아치[Arco dei Gavi]는 나폴레옹 시대에 해체되었다가 1930년대에 카스텔베키오(Castelvecchio) 옆에 복원되었으며, 돌다리인 폰테 피에트라(Ponte Pietra)도 있다. 로마의 극장은 19세기 중반에 발굴되어 공연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복원하였는데 로마의 콜로세움 다음으로 큰 원형 경기장[원래는 삼단으로 벽이 둘러쳐져 있었으나 12세기에 지진으로 무너졌다]이다. 로마네스크 시대(8~12세기)에는 발레에 있는 성 조바니 교회가 옛 건물의 폐허 위에 지어졌다. 내부에는 3개의 통로가 있으며, 로마네스크 시대 이전의 지하실이 있다. 성 로렌조 교회의 벽면들은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였는데 1층은 응회암으로, 2층은 응회암과 벽돌이 번갈아 가며 혼합되어 있다. 입구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현관이 있다. 산 페르모 교회는 8세기의 이전 성당의 유적지 위에 응회암과 벽돌로 지어졌다. 무덤은 외부에 있고, 교회에는 작은 아치와 높은 창문많은 계단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현관이 있다. 두오모 성당은 16세기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지진이 일어난 뒤 12세기에 재건되었다. 14세기에 완공된 건물 정면은 베로나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여러 종류의 신성한 이야기와 세속적인 이야기들을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이중 콜로네이드의 회랑이 멋진 12세기의 수녀원도 있다. 스칼리제르 가문이 통치하던 시기(13~14세기)에, 도미니카 인들이 산아나스타시아 교회를 건립하였는데 그 건물의 정면은 완성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아르체 스칼리제르는 스칼리제르 가문의 영묘로서 시뇨리 광장 가까이 있다. 카스텔 베키오는 스칼리제르 가문의 요새화된 저택이며, 캉그란데 2세 시대에 이전의 방어 시설 위에 세워졌다. ‘줄리엣의 집’은 작은 중세의 궁이며,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영감을 받아 1930년대에 발코니를 더했다. ‘로미오의 집’은 중세의 복합 건물로서 후대에 상당히 많이 변형되어 원래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베로나의 중심에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내려오는 건물이 매우 많다. 산티 나자로 에 첼소 교회, 산타 마리아 교회, 산 조르조 교회, 산 토마소 교회, 산 베르나르디노 교회, 산 에우페미아 교회가 있다. 카노사, 폼페이, 베빌락쿠아, 포르타 팔리오의 문, 포르타 누오바, 포르타 산 제노, 그 외에도 주교의 저택, 주스티 정원과 저택이 있다. 19세기 오스트리아 시대의 유명한 건물들로는 카스텔 산 피에트로와 카세르마 산타 마르타가 있다.

세계문화유산(361)/ 이탈리아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나[Villa Adriana (Tivoli); 1999]

 

 

 

 

 

 

 

 

 

 

 

 

 

 

 

 

 

 

 

 

 

 

 

 

 

 

 

 

 

 

 

 

 

 

 

 

 

 

 

 

 

 

 

 

 

 

 

 

 

 

   로마 근교인 로마 주[Province of Rome] 라티움 현[Region of Latium]에 속한 티볼리에 있는 빌라 아드리아나(Villa Adriana)는 2세기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가 건설한 고전주의 건축물이다. 이 유산은 이집트・그리스・로마의 건축 전통에서 가장 훌륭한 요소들을 결합시켜 ‘이상 도시’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빌라 아드리아나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수준 높은 유형 문화를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한 걸작이다. 이 기념물에 관한 연구는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 건축가들이 이용한 고전주의 건축의 요소들을 재발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19~20세기 건축가와 설계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빌라 아드리아나는 원래 로마 공화정 말기에 지어진 별장으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의 아내였던 비비아 사비나(Vibia Sabina)의 소유였다. 그 후 118~125년과 125~138년의 두 단계에 걸쳐 별장이 있던 자리에 황제의 처소가 지어졌다. 이 처소는 점점 절대화하는 황제의 권력의 상징이었으며, 황제 권력이 수도[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영향력을 펼쳤다는 증거이다. 이런 이유로 이곳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에 비교된다. 138년 하드리아누스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일상적 처소로 로마를 선호했지만 이와 상관없이 빌라 아드리아나는 계속해서 확장되었고 더욱 아름답게 치장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가 새로운 수도인 비잔틴으로 아드리아나의 가장 아름다운 물건들 중 몇몇을 가져갔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이민족의 침입으로 이곳은 번번이 약탈과 도굴 되었고, 결국에는 별장 전체가 완전히 방치되고 말았다. 이렇게 버려진 수세기 동안 건축업자나 석회 제조자들은 이 별장의 석재들을 가져다 썼다. 폐허가 된 빌라 아드리아나에 대한 관심은 15세기에 와서야 교황 비오 2세[Pius II; 에네아 실비오(Aeneas Silvius)]에 의해서 되살아났다. 16세기 초에는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가 이전의 영광을 되찾고자 폐허에 묻혀 있을 예술품들을 찾기 위한 발굴을 명령했다. 추기경 이폴리토 2세 데스테(Ippolito II d’Este)가 빌라 아드리아나 근처에 자신의 별장인 빌라 데스테(villa d’Este)를 짓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새 건물에 쓸 예술품들을 찾아낼 생각으로 이곳의 발굴 작업을 속개하도록 하고, 건축가 피로 리고리오(Pirro Ligorio)에게 그 지휘를 맡겼다. 이후로도 1870년에 별장이 신생국인 이탈리아의 소유물이 될 때까지 발굴 작업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티부르틴(Tiburtine) 언덕의 비탈면에 있는 이 유적은 120㏊가 넘는 광대한 면적이다. 유적 안에 있는 많은 구조물들을 전체적인 평면도 없이 늘어놓고 보면 네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구역에는 그리스 식 극장과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신전 구역이다. 극장은 일부분만 남아 있지만 보존 상태가 좋은 부분을 보면 전통적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반원형 관객석은 언덕 쪽에서 잘려 있으며 지름은 약 36m이다. 작은 원형의 신전은 커다란 반원형 엑세드라 안에 위치해 있다. 해상 극장[Maritime Theatre]과 도서관 뜰, 라틴 도서관과 그리스 도서관, 황제 궁전[Imperial Palace], 황금 광장[Golden Square]이 있는 두 번째 구역은 복합 건물의 중심으로 템피(Tempe) 계곡과 나란히 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4개의 열주 주변에 모여 있다. 해양 극장은 지름 43m의 원형 구조로 소형 빌라가 자리한 중앙의 섬을 원형 해자로 둘러싸고 있고, 이를 다시 이오니아 식 대리적 열주들이 에워싸고 있다. 도서관 뜰은 복합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북쪽에는 님파이움(nymphaeum)이 있는 콜로네이드 포르티코가 있으며 님파이움의 어느 쪽 통로를 통해서든 두 ‘도서관’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황제 궁전은 안뜰 주위로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금 광장은 이 복합 건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거대한 페리스틸륨(peristyle; 열주랑)은 2개의 통로가 있는 포르티코로 둘러싸여 있는데 운모 대리암과 이집트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기둥들이 교대로 늘어서 있다. 세 번째 구역은 페칠레(Pecile), 경기장[Stadium]과 관련 건물들인 대욕탕[Large Thermae]과 소욕탕[Small Thermae], 카노푸스(Canopus), 세라페움(Serapeum), 첸토 카메렐레(cento camerelle)로 이루어져 있다. 페칠레는 스토아 학파와 관련된 것들과 그림들로 유명한 아테네의 인상적인 구조물을 재현한 것으로 거대한 직사각형 담벼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거대한 벽의 일부 각각의 면에는 콜로네이드가 세워져 있었다. 중앙에는 아마도 경주용 트랙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공간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연못이 있었다. 2개의 목욕탕은 전통적 형태인데 소욕탕은 여자들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노푸스는 알렉산드리아 근처의 유명한 세라피스 성소를 모방한 긴 수로이다. 세라페움의 반원형 엑세드라는 남쪽 끝에 있다. 네 번째 구역에는 백합 연못[Lily Pond], 로카브루나 탑[Roccabruna Tower]과 아카데미(Academy)가 있다. 복합 건물인 로카브루나 탑의 용도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구조물뿐만 아니라 지하 회랑(地下回廊; cryptoportici, cryptoporticus)과 내부 통행로와 저장고로 쓰인 지하 통로[underground galleries]가 있다. 이 수많은 고대 구조물들 위에는 18세기의 농가와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 건물들은 이전 구조물의 기반 위에 바로 지어졌기 때문에 고대의 구조물들로부터 분리해 내기가 어렵다.

세계문화유산(360)/ 이탈리아

 

우르비노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Urbino; 1998)

 

 

 

 

 

 

 

 

 

 

 

 

 

 

   마르케 주[Marche Region] 페사로[Province of Pesaro] 마르케 지방의 작은 언덕 위에 있는 도시 우르비노(Urbino)는 15세기에 문화의 전성기를 누린 곳이다. 당시 이탈리아와 여러 지역에서 온 예술가와 학자들은 이곳에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으며, 그 업적은 유럽 여러 지역의 문화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우르비노는 16세기부터 경제적・문화적으로 정체되기 시작한 덕분에 약 1세기 동안 누려왔던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한 문화를 변화 없이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우르비노는 짧은 기간에 탁월한 문화를 꽃피운 도시이다. 이 도시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걸출한 인본주의 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건축의 동질성[homogeneity]을 훌륭하게 획득한 도시 복합물의 특별한 사례를 창조했다. 이후 우르비노의 문화는 유럽 전역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 로마 요새는 불규칙한 도로와 배치로 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 경계 안에 머물러 있던 도시는 11세기 말에 확장을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새로운 방어벽이 필요하였다. 12세기 말에 도시는 우르비노의 공작 영지를 넘겨받은 몬테펠트로(Montefeltro) 가문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페데리코 2세(Federico II)가 15세기 중반에 도시를 재정비하는 운동을 벌였지만 전체적인 도시 구조는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설계에 따라 성벽을 재건하였다. 루차노 라우라나(Luciano Laurana)와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Francesco di Giorgio Martini)는 공작의 새로운 저택 공사를 맡아 기존의 중세 구조를 약간만 변형한 상태에서 증축하였다.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가 설계한 인근의 성당과 함께 공작의 저택은 도시 구조의 중심이 되었고, 그 설계는 이후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의 표본이 되었다. 1508년 구이도발도(Guidobaldo) 공작이 죽은 뒤 우르비노는 델라 로베레(Della Rovere) 가문으로 넘어갔으며, 1631~1860년에 파팔(Papal) 주에 합병되었다. 이 시기에 도시의 경제는 전반적으로 침체되었다. 그러나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조반니 프란체스코 알바니(Giovanni Francesco Albani)가 1700년 클레멘스 11세(Clement XI; 1700~1721 재위)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교회와 여러 종교 건축물들의 복원 활동이 많아졌다. 19세기 전반에는 도로 형태에 많은 변화가 생김에 따라 광장을 확장하기 위해 몇 채의 건물을 철거하였다. 동시에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탑을 따라 빈센초 기넬리(Vincenzo Ghinelli)가 균형과 양식 면에서 주변과 잘 어울리게 설계한 극장이 새로 건설되었다 공작의 대저택 서쪽 면은 2개의 가느다란 탑과 측면에 첩첩으로 솟은 3개의 로지아[한쪽 이상의 면이 트여 있는 방이나 복도]로 구성되어 있다. 기본 구조는 벽돌과 창틀, 2개의 위쪽 로지아와 돌로 만든 몇 가지 장식이 있다. 외부는 주로 벽돌을 사용하여 비교적 소박한데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광장을 향한 쪽에서 보면 달마티아(Dalmatia) 지방의 건축가 루차노 라우라나가 르네상스 저택을 기술적으로 결합시켜 만든 2채의 중세 저택의 정면이 보인다. 저택의 내부는 좀 더 화려하며, 특히 중앙의 뜰은 우아한 아치와 조각 장식과 비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저택의 피아노 노빌레(Piano nobile; 르네상스 건축물의 주요 층)는 바로치(Barocci)가 설계한 멋진 계단을 통해 들어간다. 대부분의 방은 현재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벽면과 문틀, 장식대(裝飾帶; frieze), 벽난로 위 선반, 그 밖의 다른 조각과 칠 장식까지 현명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저택에서 가장 넓은 공간인 공식 접견실에는 성 마르코의 사자가 얕은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다. 공작의 개인 공간이던 ‘천사의 방[Room of the Angels]’은 벽난로 위 선반에 장식된 춤추는 어린아이 조각상에서 그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 목재로 된 문은 산드로 보티첼리가 설계한 트롱프뢰유(trompe-l’œil; 실물로 착각하도록 만든 속임수그림) 쪽나무 상감 장식이 되어 있고, 공작의 서재 벽면도 같은 방식으로 꾸며졌다. 서재 천장은 피렌체 예술가들의 그림으로 장식되었다. 이 밖에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는 공작부인의 응접실 ‘살라 드롤레(Sala d'lole)’가 있는데 벽난로 선반의 여인상 조각 기둥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우르비노의 두오모 대성당은 비오 7세(Pius VII)가 교황으로 있던 18세기 말에 대부분 재건하였으며, 클레멘스 11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재건축을 마감하지 못한 채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교황청의 건축가였던 주세페 발라디에르(Giuseppe Valadier)의 절제된 신고전주의 양식이며, 중요한 예술 작품이 간직되어 있다. 14세기에 지은 성 요한 침례교회의 기도실에는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의 멋진 프레스코 화가 있다. 산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교회 역시 14세기의 것이며, 내부는 18세기에 다시 디자인되었다. 산 도메니코(San Domenico) 교회는 기본적으로 13세기 건물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루카 델라 로비아(Luca della Robbia)의 공사로 접이식 창문과 밖으로 내민 창문이 추가되었다. 산타 키아라(Santa Chiara) 수도원과 산 베르나르디노(San Bernardino) 수도원은 르네상스 수녀원 건축의 좋은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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