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349)/ 이탈리아

 

모데나의 대성당, 토레 치비카, 피아차 그란데

(Cathedral, Torre Civica and Piazza Grande, Modena; 1997)

 

 

 

 

 

 

 

 

 

 

 

 

 

 

  모데나는 에밀리아로마냐 주[Emilia-Romagna Region] 모데나 시[City and Province of Modena]에 속한다. 12세기 위대한 예술가인 란프랑코(Lanfranco; 1582~1647)와 빌리겔무스(Wiligelmus)가 건축한 웅장한 모데나 대성당은 초기 로마네스크 예술의 걸작이다. 특히 대성당의 광장[피아차 그란데]과 종탑[토레 치비카]은 건축가들의 신념과 건축을 의뢰했던 카노사(Canossa) 왕조의 힘을 상징한다.

   11, 12세기의 모데나 역사는 노난톨라(Nonatola)에 있는 유명한 베네딕트회 수도원과 모데나의 주교관, 그리고 당대 이탈리아 북부 중앙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이었던 카노사 가문, 이 세 가문을 중심으로 역가 기록이 남아 있다. 9세기 말에서 10세기까지의 왕권 약화를 틈타 모데나의 주교들과 카노사 가문의 귀족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이들에게 권위와 영향력을 갖게 해 줄 토지와 세무 특권을 획득했다. 오토 1세(Otto I; 재위 966~973)의 충성스러운 동맹자가 된 카노사 가문의 아달베르토(Adalberto)는 영지와 함께 백작 작위를 받지만 모데나 시는 여전히 주교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1세기 뒤, 카노사 가문의 영지는 포 평야의 중앙 평원과 토스카나 주까지 넓어졌다. 11세기 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로마 교황과 서임권[비성직자에 의한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다투었다. 이 서임권 분쟁기에 마틸드 드 카노사(Mathilde de Canossa; 1045~1115경)는 초기에는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교황의 편에 서게 된다. 이후 모데나 주교관의 역사는 황제파와 부침(浮沈)을 함께 하게 된다. 왜냐하면 황제파는 모데나에서 카노사 가문의 재산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데나의 엔베르토(Enbert; 1055~1094) 주교가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되고 나서 모데나 주교관은 그 후임자를 둘러싼 갈등에 휩싸였다(1095~1100). 마틸드 드 카노사의 측근인 베네데토(Benedetto)가 선출되면서 일시적으로 갈등은 가라앉았지만 결국은 1100년 그의 후임자로 도도네(Dodone; 1100~1134)가 오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us II)가 임명한 새 주교인 도동은 모데나 시의 분열상을 종식하고 시에서 그레고리오 개혁을 실천했다. 모데나의 주교이자 349년 이후 시의 수호성자였던 산 제미니아노(San Geminiano)에게 헌정된 대성당 건축은 종탑의 건축과 마찬가지로 주교관의 주교 자리가 비어 있는 기간에 결정되었다. 대성당에 새겨진 글들과 문구를 통해 성당 건축의 초기 단계에 대한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글은 중세 전통에서 볼 때 꽤나 드문 경우이다. 이 글은 공사 발주자들인 모데나 사람들이 구상한 건축・조각에서 탁월한 기념물이 될 최초의 작품을 위해 모인 건축가 란프랑코와 조각가 빌리겔무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실 이들이 원한 새로운 대성당은 1070년 분리파였던 에리베르 주교가 세웠던 이전의 대성당보다 월등한 것을 원했다. 그리하여 이 건축을 통해 모데나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이 로마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음을 보여 주려 했던 것이다. 생애 말에 마틸드 드 카노사는 자신의 선임자들이 축적한 토지들을 수도원과 성당에 환원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유지를 해체할 계획을 천명했다. 이로써 모데나는 이후 1227년부터 시 행정관들을 통해서 전면적으로 시행할 자유로운 지방 체제를 표방하게 된다. 대성당과 토레 치비카[종탑]의 건설은 당시에 이미 많은 부분이 이루어져 있었던 1차 층위의 도시 상태에 편입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2세기 이전의 문서들은 대성당을 도시의 기준점[랜드마크]으로 특별히 다루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건물을 둘러싼 주변 공간에 더 관심이 있다. 이 공간은 나중에 이 도시에서 최초의 시민 광장이 되었다. 이 광장에서 여러 건물들이 건축되었는데 그중에는 교회 행정 관련 건축물과 민사 재판소 등이 있다. 민사 재판소의 관할은 처음에는 주교의 몫이었다가 나중에 지방 행정청으로 이양되었다. 교회 행정에 관련된 건물들로는 주교의 거처인 주교관과 이에 부속된 행정 사무처(1070), 대성당 부속[수도사들의 회합이 이뤄지는 장소인] 수도회당[chapitre], 10~12세기에 많은 서적 및 문서들을 생산한 초기 학당, 시청[Palazzo Comunale; 1194], 그리고 광장 남쪽에 채소밭이 딸린 주택들이 있다. 수세기에 걸쳐 광장 남쪽 지역 너머로 세워진 건축물들은 수공업, 상업, 지역 행정 활동과 연관되었다. 즉, 육류 시장최초의 인쇄소상업 및 식품 감독 담당 사법관의 사무소감옥 등이 그런 것들이다. 현재의 대성당은 대성당(1070)이 있던 자리에 건축되었다. 5개의 큰 선랑(船廊; 고딕 성당 건축물의 공간을 구성하는 건축 구조체로서 모양이 배 같다는 데서 나온 말)으로 나누어진 대성당 건물은 원래의 축에서 비스듬하게 자리했는데 새 대성당이 봉헌됨으로써 원래 있던 축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1099년 5월 9일 착공, 성자 유골들의 1106년 5월 30일 지하 제실[crypte] 봉안, 그리고 몇 달 뒤의 미사 제단의 봉헌이 차례로 이뤄지는 동안 이와 병행해서 성당의 내진(內陣; 성당 안에서 성직자와 성가대가 차지하는 자리)과 성당의 서쪽 부분[입구와 현관 부분]도 완성되었다. 그러나 교황 루치오 3세(Lucius III)가 참여하는 대봉헌식은 1184년에야 이뤄졌다. 네이브(nave)의 양측 벽을 잇는 대형 횡단 아치들과 다른 선랑들의 벽을 잇는 아치들도 당시 이미 많이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당 측은 12세기 후반기에 건축가와 조각가들의 조합인 마에스트리 캄피오네지에게 성당 건물 유지・보수를 맡겼는데 이 장인들이 양측면의 두 대문을 만들고, (서쪽) 파사드의 장미창, 그리고 남쪽의 레지아 문[porta Regia]을 만들었다(1180경). 성당 내부에 있어서는 이들은 지하 납골당을 확장하고, 성가대가 있는 내진을 더 높였으며, 유사 트랜셉트[faux transept]을 만들기 위해 지붕을 좀 늘렸다(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15세기 중에는 원래의 나무 천장들이 석재 궁륭으로 대체되었다. 85m나 되는 종탑 토레 치비카(Torre Civica)는 여행자들이 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맨 처음 보게 되는 건축물이다. 여행자들은 종탑을 봄으로써 마을에 가까이 왔음을 알았다. 이 종탑은 대성당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즉, 2개의 아치로 두 건물은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 도시의 삶은 종탑의 리듬에 맞추어졌고, 시민 장부[주민 등록]도 이곳에 간수되었다. 종탑의 축조가 대성당과 동시대에 이루어졌으므로 종탑의 낮은 층 즉 5층까지는 란프랑코가 만들었다고 볼 수 있고, 그 위층들은 마에스트리 캄피오네지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1261~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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