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338)/ 이탈리아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 교회

(The Sassi and the Park of the Rupestrian Churches of Matera; 1993)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교회는 지중해 연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동굴 주거지로 당시 사람들이 주변 지형과 생태계에 완벽하게 적응하여 생활한 모습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초기 구석기시대부터이며, 이후에 나타난 주거 흔적은 인류 역사상 수많은 중요한 단계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마테라는 바실리카타 주[Region of Basilicata]의 남부 지방에 있다.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 교회는 바위를 파서 만든 거주지로 지형적 조건과 생태계에 완벽하게 적응하여 2,000년 이상 지속적으로 보존된 보기 드문 유산이다. 전통적인 인간의 거주 형태를 보여 주는 마을과 정원은, 토지를 사용한 흔적으로 미루어 진보된 문화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주변 자연 환경과 오랫동안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마테라 지역에는 초기 구석기시대부터 인간이 살았다. 마지막 빙하 시대를 지나고 농업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영구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삼림이 없는 지역은 심각한 침식 작용과 물 관리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정착 농민들은 들판에 지중해성 기후대의 대표적인 가리그(Garrigue; 低木郡林)인 마키(Maquis; 코르시카 섬의 관목림)가 무성해지자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방목으로 바뀌어갔다. 마테라는 특별한 지형적인 조건으로 인해 발달하게 되었다. 계곡의 하단부 350~400m 지대에는 부드러운 탄산석회의 침전 지대가 있는데 이곳에 자연 침하되어 파진 곳[grabialioni] 두 곳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거주지가 형성되게 되었다. 위쪽의 점토질 고원은 농경과 목축용으로 이용되었다. 금석병용시대(金石倂用時代; Metal Ages, Chalcolithic,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도기)를 맞아 도구가 발달하면서 계곡에 노출된 부드러운 석회암을 보다 쉽게 파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시스턴(cistern; 지하 저수조)과 무덤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이 두 곳은 중앙 공간[jazzi]을 향해 밖으로 나오도록 되어 있는 독특한 주거 형태이다. 발굴된 석회 벽돌은 담벼락이나 탑의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다. 석회화되어 약해진 지층이 노출된 계곡 측면에 이 벽돌을 사용하면 효과적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그리스 식민 통치 시기에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앞선 기술과 정치적 구조를 도입하였다. 식민지 초기에 부족의 형태에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도시 중심 국가 형태로 기반을 잡으면서 마을 형태는 확산되었다. 이 지역민들은 황량한 환경 탓에 굳건한 독립심을 기르게 되었고, 덕분에 계속되는 비잔틴 인들의 침략에 강인하게 맞설 수 있었다. 또한 이 지역 공동체는 금욕적이고 이상향적인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형학적 특성을 바탕으로 발달한 마테라는 18세기까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19세기, 20세기에 이루어진 정착지에 대한 개입이나 확장은 점토 지역인 고원 지대에서 물을 공급 및 배수했던 고대인의 토지 관리법을 그대로 적용하지 않았다. 최초의 집은 동굴 입구를 블록 벽으로 닫아 놓은 단순한 석회암 동굴이었다. 그러나 이 형태는 점차 개방 공간이 있는 아치형 공간[lamione]의 형태로 발달하였고, 이곳은 나중에 개조하거나 증축할 수 있었다. 둥근 공동 마당을 두고 집단으로 거주한 이곳 사람들은 저수조와 같은 시설을 공유하는 사회적 구조[vicinato]로 발전하였다. 2개의 사씨(Sassi; 동굴 주거) 사이, 대성당이 자리한 마을에는 마을의 중심 요새인 시비타(civita)도 건설되었다. 작업장과 곡물 저장고는 주로 시비타 외곽에 있으며, 이곳은 좁은 길과 계단을 통해 사씨와 연결되도록 되어 있다. 물의 공급은 상당히 조직화되어 있었다. 높은 지대의 고원에서 물을 받아두었다가 이를 중력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 보내 마을 공동체에 분배되도록 하였다. 마을이 점점 성장하면서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서 더 많은 집을 짓거나 동굴 주거지를 팠다. 어떤 집의 지붕은 위쪽에 새로 생긴 집의 길이 되기도 했다. 집은 점점 규모가 커졌고, 르네상스 시기에는 정원 형태 테라스를 집 외부에 증축했다. 12세기의 지리학자인 엘 이드리시(El Idrisi)는 마테라를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찬양했지만 마테라는 점차 쇠락해 갔다. 소설가 카를로 레비(Carlo Levi)는 유명한 소설 <예수는 에볼리에서 멈추었다(Cristo si B fermato ad Eboli; Christ stopped at Eboli)>(1945년)에서 마테라를 남부 이탈리아 농민의 비참한 생활의 상징인 것처럼 묘사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탈리아 정부는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1952년 통과된 법안에 의해 1950년대에 옛 구역의 주민들을 새로운 건물로 이주시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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