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339)/ 이탈리아

 

베네토의 비첸차 시와 팔라디오 양식 건축물

(City of Vicenza and the Palladian Villas of the Veneto; 1994)

 

 

 

 

 

 

 

 

 

 

 

 

 

 

 

 

   베네토 주[Veneto Region] 파도바, 로비고, 트레비소, 베네치아, 베로나와 비첸차 지방[Provinces of Padua, Rovigo, Treviso, Venice, Verona and Vicenza]에 속하는 비첸차는 기원전 2세기경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건설되어 15세초부터 18세기 말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 아래 번성했다. 이곳에서 발생한 ‘팔라디오 양식[Palladian]’은 15세기에 활약한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1580)의 건축물들에서 시작되었다. 팔라디오는 고대 로마의 유적을 연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저택을 비롯하여 독특한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팔라디오 양식의 건물은 베네토 지방 전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영국과 유럽 전역 그리고 북아메리카까지 확산되어 건축 예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체적으로 새로운 특징을 만들어 내면서도 전통적인 건축물과 조화롭게 융화되어 있는 비첸차는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설계한 건축물로서 독창적인 건축 예술을 꽃피운 곳으로 평가된다. 비첸차는 건축물을 통해서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과 전 세계의 도시 계획 및 건축 설계에 주목할 만한 영향을 끼쳤다. 비첸차는 이탈리아 북쪽 베네토 지방의 베리치(Berici) 산과 레시니(Lessini) 산 사이의 낮은 언덕에 자리하여 천연의 통행로가 되었다. 비첸차는 기원전 2~기원전 1세기경 베네티에 의해 최초로 건설되었고, 기원전 49년 무니키피움(municipium)이라는 로마 도시로서의 법적 지위를 부여 받았다. 동서로 나 있는 팔라디오 거리[Corso Palladio]가 데쿠마누스 막시무스(decumanus maximus; 중앙 도로)가 되고, 남북으로 이어지는 포르티 길[Contra Porti]이 카르도 막시무스(cardo maximus; 넓은 광장)가 되는 식으로 오늘날의 도시에서도 비첸차의 고대 도시 계획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재위 아래 세워진 공공건물 중 극장이 현존하고 있으며, 좀 더 현대적인 건축물이 추가되어 도시의 북쪽으로 수도를 연결하는 구간으로 통합이 되었다. 이 도시는 4세기 말에 기독교 교구의 관할권이 되었다. 그러나 5세기 들어 야만인들이 끊임없이 출몰하여 도시를 유린하고 약탈했으며, 끔찍한 역병이 돌아 인구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이어 랑고바르드 왕국의 일부가 되어 36공국 가운데 하나의 수도가 되었다. 로마 교황이 샤를마뉴 대제를 시켜 롬바르드 족을 내몰아 버리자 비첸차는 프리울리(Friuli)의 프랑크 족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산 펠리체와 산 피에트로의 최초 베네딕트 공동체가 성립되었다. 침략자들은 카롤링거 왕조의 붕괴를 지켜보았고, 마자르 시대에 약탈이 잦아지자 이에 대비하여 도시의 성벽을 축조하게 되었다. 12, 13세기 동안 주교의 영지를 받은 가신들과 황제 당원간의 잦은 유혈 사태로 비첸차의 대부분이 훼손되었다. 이 지역은 봉건 군주의 영지로 작게 나눠지고 서로 싸움이 끊이지 않았지만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할 경우에는 함께 뭉쳐서 봉기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로마 도시와 같이 비첸차도 나름대로 행정력이 발전하여 1208년에는 성곽 내부에 세운 건물을 관리하고 통제하였다. 새로운 도시 주변 시설물이 델라 스칼라 가문에 의해 시내 주요 도로를 중심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 지역의 작은 영주들이 서로 연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고요한 도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위협을 느끼고 1404년에 전 지역을 통합했다. 18세기 후반 공화국이 쇠퇴할 때까지 비첸차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로서 평화와 경제적 번영을 누리며 탁월한 예술 활동을 했다. 봉건 귀족들의 권력은 떠오르는 상공인 계급층에게로 넘어갔다. 봉토를 몰수해 베네치아 귀족 가문에 팔아넘겼고, 이들은 그 땅에 호화로운 대저택을 짓고 대규모 농토를 개간했다. 현존하는 4개의 주요 광장 주변으로 마을이 양극화되었으며, 14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도시는 제한적으로나마 동서로 확장되었지만 기본 틀은 이후로도 계속 유지하였다. 부유층이 생기면서 베네치아풍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치스러운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출현으로 베네치아의 취향에 내구성을 더한 형태가 마련되었다.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고대 로마제국의 생생한 건축물과 로마의 건축가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의 작품을 연구하고 깊이 감명 받았다. 그는 비첸차에 바실리카(Basilica), 로지아 델 카피타니아토(Loggia del Capitaniato), 테아트로 올림피코(Teatro Olimpico) 등의 공공건물과 일반 건축물을 건설했다. 반원 모양의 영구적인 실내 극장 테아트로 올림피코는 팔라디오가 마지막으로 설계한 작품으로 완공은 그의 제자 빈센초 스카모치(Vincenzo Scamozzi)에 의해 이루어졌다. 시내에는 23개의 건축물과 주변에 3동의 빌라가 있다. 궁전이나 마을의 집들은 중세 도시의 외형과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앙상블을 연출하고 있으며, 쭉 뻗은 도로의 외관에서 베네토 고딕 양식과 팔라디오의 독특한 고전주의 양식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극장 설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시의 건축은 현실과 환상이 서로 교차되는 느낌으로 비첸차에 독특함을 더해 주고 있다. 라 로톤다(La Rotonda)로 알려진 외곽에 자리한 빌라의 위치도 크리콜리(Cricoli)에 있는 빌라와 유사한 느낌을 자아낸다. 오스트리아제국과 이탈리아제국의 통치를 받던 19세기에는 전반적인 도시 형태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지난 직후에 비로소 도시는 서쪽을 향해서 상당히 많은 주택이 들어서고 산업이 팽창하게 되었다.

세계문화유산(338)/ 이탈리아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 교회

(The Sassi and the Park of the Rupestrian Churches of Matera; 1993)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교회는 지중해 연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동굴 주거지로 당시 사람들이 주변 지형과 생태계에 완벽하게 적응하여 생활한 모습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초기 구석기시대부터이며, 이후에 나타난 주거 흔적은 인류 역사상 수많은 중요한 단계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마테라는 바실리카타 주[Region of Basilicata]의 남부 지방에 있다.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 교회는 바위를 파서 만든 거주지로 지형적 조건과 생태계에 완벽하게 적응하여 2,000년 이상 지속적으로 보존된 보기 드문 유산이다. 전통적인 인간의 거주 형태를 보여 주는 마을과 정원은, 토지를 사용한 흔적으로 미루어 진보된 문화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주변 자연 환경과 오랫동안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마테라 지역에는 초기 구석기시대부터 인간이 살았다. 마지막 빙하 시대를 지나고 농업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영구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삼림이 없는 지역은 심각한 침식 작용과 물 관리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정착 농민들은 들판에 지중해성 기후대의 대표적인 가리그(Garrigue; 低木郡林)인 마키(Maquis; 코르시카 섬의 관목림)가 무성해지자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방목으로 바뀌어갔다. 마테라는 특별한 지형적인 조건으로 인해 발달하게 되었다. 계곡의 하단부 350~400m 지대에는 부드러운 탄산석회의 침전 지대가 있는데 이곳에 자연 침하되어 파진 곳[grabialioni] 두 곳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거주지가 형성되게 되었다. 위쪽의 점토질 고원은 농경과 목축용으로 이용되었다. 금석병용시대(金石倂用時代; Metal Ages, Chalcolithic,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도기)를 맞아 도구가 발달하면서 계곡에 노출된 부드러운 석회암을 보다 쉽게 파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시스턴(cistern; 지하 저수조)과 무덤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이 두 곳은 중앙 공간[jazzi]을 향해 밖으로 나오도록 되어 있는 독특한 주거 형태이다. 발굴된 석회 벽돌은 담벼락이나 탑의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다. 석회화되어 약해진 지층이 노출된 계곡 측면에 이 벽돌을 사용하면 효과적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그리스 식민 통치 시기에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앞선 기술과 정치적 구조를 도입하였다. 식민지 초기에 부족의 형태에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도시 중심 국가 형태로 기반을 잡으면서 마을 형태는 확산되었다. 이 지역민들은 황량한 환경 탓에 굳건한 독립심을 기르게 되었고, 덕분에 계속되는 비잔틴 인들의 침략에 강인하게 맞설 수 있었다. 또한 이 지역 공동체는 금욕적이고 이상향적인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형학적 특성을 바탕으로 발달한 마테라는 18세기까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19세기, 20세기에 이루어진 정착지에 대한 개입이나 확장은 점토 지역인 고원 지대에서 물을 공급 및 배수했던 고대인의 토지 관리법을 그대로 적용하지 않았다. 최초의 집은 동굴 입구를 블록 벽으로 닫아 놓은 단순한 석회암 동굴이었다. 그러나 이 형태는 점차 개방 공간이 있는 아치형 공간[lamione]의 형태로 발달하였고, 이곳은 나중에 개조하거나 증축할 수 있었다. 둥근 공동 마당을 두고 집단으로 거주한 이곳 사람들은 저수조와 같은 시설을 공유하는 사회적 구조[vicinato]로 발전하였다. 2개의 사씨(Sassi; 동굴 주거) 사이, 대성당이 자리한 마을에는 마을의 중심 요새인 시비타(civita)도 건설되었다. 작업장과 곡물 저장고는 주로 시비타 외곽에 있으며, 이곳은 좁은 길과 계단을 통해 사씨와 연결되도록 되어 있다. 물의 공급은 상당히 조직화되어 있었다. 높은 지대의 고원에서 물을 받아두었다가 이를 중력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 보내 마을 공동체에 분배되도록 하였다. 마을이 점점 성장하면서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서 더 많은 집을 짓거나 동굴 주거지를 팠다. 어떤 집의 지붕은 위쪽에 새로 생긴 집의 길이 되기도 했다. 집은 점점 규모가 커졌고, 르네상스 시기에는 정원 형태 테라스를 집 외부에 증축했다. 12세기의 지리학자인 엘 이드리시(El Idrisi)는 마테라를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찬양했지만 마테라는 점차 쇠락해 갔다. 소설가 카를로 레비(Carlo Levi)는 유명한 소설 <예수는 에볼리에서 멈추었다(Cristo si B fermato ad Eboli; Christ stopped at Eboli)>(1945년)에서 마테라를 남부 이탈리아 농민의 비참한 생활의 상징인 것처럼 묘사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탈리아 정부는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1952년 통과된 법안에 의해 1950년대에 옛 구역의 주민들을 새로운 건물로 이주시키게 되었다.

세계문화유산(337)/ 이탈리아

 

산 지미냐노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San Gimignano; 1990)

 

 

 

 

 

 

 

 

 

 

 

 

 

 

 

 

 

 

 

 

 

 

 

 

 

 

 

 

 

 

 

 

 

   ‘아름다운 탑의 도시[delle Belle Torri]’로 알려진 산 지미냐노는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56㎞ 떨어진 지점의 토스카나 주[Tuscany] 시에나 현[Province of Siena]에 있다. 이곳은 로마를 왕래하는 순례자들이 거치는 프란치제나 길[Via Francigena]의 연결 지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도시를 지배했던 귀족 가문들은 그들의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약 72채의 고층 주택을 세웠는데 이 중 몇몇은 높이가 50m에 달했다. 현재는 그 중 14채의 건물만 보존되어 있지만 산 지미냐노는 봉건 시대의 분위기와 형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14, 15세기 이탈리아 예술의 걸작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산 지미냐노는 광장, 거리, 주택, 궁전, 우물, 분수 등 전형적인 도시 생활을 보여 주는 모든 구조물들이 좁은 지역 안에 모여 있다는 점에서 중세 문명의 우수한 증거를 간직하고 있다. 산 지미냐노는 피렌체에서 56㎞ 남쪽의 델사 계곡[Val d'Elsa]에 있다. 이곳의 성벽과 요새화된 가옥은 에트루리아 지역 경관의 심장부에서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한다. 산 지미냐노는 로마를 왕래하는 순례자들이 거치는 프란치제나 길의 중요한 연결 지점이었다. 이곳은 원래는 볼테라 주교의 관할 지역이었으나 1199년에 처음으로 행정관이 주재하게 되면서 독립하였다. ‘아름다운 탑의 도시’로 알려진 이 자유 도시는 1353년까지 오래도록 번성하였으나 이후 피렌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262년에는 2177m 둘레의 성벽이 이 소도시를 둘러쌌고, 후에 5개의 원통형 망루가 성벽에 증설되었다. 교황을 지지하는 아르딩헬리(Ardinghelli) 가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지하는 살부치(Salvucci) 가문이 이 도시를 지배하였다. 서로 경쟁하는 이 두 가문이 사이에는 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72채의 고층 주택을 건설했다. 이 중 14채가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쿠그나네시(Cugnanesi) 주택은 예전의 프란치제나 길[산조반니 길] 쪽에 있고, 페시올리니(Pesciolini) 주택은 산 마테오(San Matteo) 길 쪽에 있다. 당시에는 1225년에 제정된 건축 제한 규정이 있었는데 건축물의 폭은 양팔 너비의 12배를, 앞뒤 길이는 양팔 너비의 24배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그런데 유서 깊은 카스텔로(Castello) 길에 있는 프란체시 체카렐리(Franzesi-Ceccarelli) 대저택은 이 같은 건축 제한 규정을 교묘하게 피하려고 비대칭적인 파사드(facade)를 건축하였다. 도시는 치스테르나(Cisterna) 광장과 두오모(Duomo) 광장의 두 주요 광장을 빙 둘러서 발달하였다. 삼각형의 치스테르나 광장 중앙에는 아름다운 우물이 있다. 광장은 고층 주택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광장의 서쪽에는 아르딩헬리(Ardinghellis) 가의 쌍둥이 탑이, 남쪽에는 베누치스(Benuccis) 탑과 로돌피(Rodolfi) 저택, 라치(Razzi) 궁이 있고, 북쪽에는 코르테시(Cortesi) 궁이 있다. 두오모 광장은 13세기 후반에 더욱 복잡한 형태로 배치되었으며, 공공건물 및 개인 기념물 대다수가 이곳에서 발견된다. 서쪽에는 산타마리아 아순타(Santa Maria Assunta) 성당이 있다. 동쪽에는 로그노사(Rognosa) 탑과 치기(Chigi) 탑이 있는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 건물은 1239년에 행정관의 궁전으로 건설되었으며, 나중에 여관으로 개조되었다가 이후 극장으로 바뀌었으나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남쪽에는 포폴로(Popolo) 궁과 54m 높이의 그로사(Grossa) 탑이 있으며, 그로사 탑은 북쪽에 있는 살부치 가의 쌍둥이 탑을 마주 보고 있다. 산 지미냐노 역사 지구에는 14, 15세기 이탈리아 예술 걸작들이 본래 건축물에 설치되었던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성당에는 타데오 디 바르톨로(Taddeo di Bartolo)가 1393년에 그린 프레스코 벽화,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과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가 그린 <성 세바스찬의 순교[Martyrdom of St. Sebastian]>,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가 그린 <성 피나의 장례식>과 <성 요한 세례당의 수태고지>와 같은 훌륭한 벽화들이 있다. 이 외에 성 세바스찬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묘사한 베노초 고촐리의 거대한 벽화도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이다. 포폴로 궁에 있는 행정관의 사무실을 장식한 벽화는 멤모 디 필리푸초(Memmo di Filippuccio)가 산 지미냐노 시의 의뢰를 받아 1303년에 그린 것이다. 가정 내의 세부적인 면까지 묘사된 이 벽화는 14세기 초기의 일상생활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자주 모방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세계문화유산(336)/ 이탈리아

 

피사의 두오모 광장(Piazza del Duomo, Pisa; 1987)

 

 

 

 

 

 

 

 

 

 

 

 

 

 

 

 

 

 

 

 

 

 

 

 

 

 

 

 

 

 

 

 

 

 

 

 

 

   토스카나 주[Tuscany] 피사[City and Province of Pisa]의 넓은 녹지에 자리 잡은 피사의 두오모 광장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념물이 많이 있다. 그 중 대성당과 세례당, 종탑[Leaning Tower; 피사의 사탑], 납골당은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것으로 11~14세기 이탈리아의 기념물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등재 기준/ 기준 (ⅰ) : 공간 설계 면에서 독특한 예술성을 보여 주는 ‘기적의 광장[Campo dei Miracoli]’에는 완벽한 건축물 걸작이 4개 있다. 그것은 대성당, 세례당, 종탑, 캄포 산토(Campo Santo)이다. 이들 기념물 안에는 대성당의 청동 모자이크 문, 세례당과 대성당의 설교단, 납골당의 프레스코화와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 유물들이 있다. 기준 (ⅱ) : 기적의 광장에 있는 기념물들은 역사상 서로 다른 두 시기의 기념물 예술과 건축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먼저 11세기에 시작하여 피사가 번영의 절정을 누리던 시기인 1284년까지, 건물을 다양한 색으로 채색하는 것과 로지아(loggia; 한쪽 면 이상이 트여 있는 방이나 갤러리)가 있는 교회 건축의 새로운 양식이 확립되었다. 대성당의 건축에서 처음 등장한 피사 양식은 토스카나의 루카(Lucca) 시와 피스토이아(Pistoia) 시같이 잘 알려진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피사의 해상 영토였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의 ‘피에베(pieve)’처럼 투박한 양식으로도 나타난다. 이후 14세기에는 대성당의 설교단을 조각(1302~1311)한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의 기념물적 건축 양식이 토스카나 지방의 건축을 주도하였다. 흑사병이 유행한 이후에는 트레첸토(Trecento)라 일컫는 회화 예술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 예로는 프란체스코 트라이니가 1350년에 캄포 산토에 그린 프레스코화 <죽음의 승리[Triumph of Death]>가 있다. 기준 (ⅳ) : 기적의 광장에 있는 유적들은 서로 다른 특수한 기능을 가진 전형적인 종교 건축물로 구성된 중세 기독교 건축의 뛰어난 사례이다. 기준 (ⅵ) :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e; 1564~1642)는 19세에 바티스타 로렌치(Battista Lorenzi)가 만든 청동 샹들리에의 진자 운동을 보고 소규모 진자 운동의 등시성 이론을 발견하였다. 이는 동역학 분야에서 갈릴레이가 이룬 선구자적 업적의 전주곡이었다.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실시한 실험 결과를 이용하여 낙하 물체를 지배하는 법칙을 만들었다. 이처럼 기적의 광장에 있는 두 주요 건물은 물리학 역사상 결정적인 단계와 직접적이고도 실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335)/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석호(Venice and its Lagoon; 1987)

 

 

 

 

 

 

 

 

 

 

 

 

 

 

 

 

 

 

 

 

 

 

 

 

 

 

 

 

 

 

 

 

 

 

 

 

 

 

 

 

 

 

 

 

 

 

 

 

 

 

 

 

   5세기에 세워진 베네치아는 베네토 주[Veneto Region] 베네치아 현[Province of Venezia]에 속하며, 118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고, 10세기에 주요한 해양 세력이 되었다. 베네치아는 도시 전체가 특별한 건축 걸작으로 아주 작은 건물에까지도 조르조네(Giorgione), 티치아노(Tiziano), 틴토레토(Tintoretto), 베로네제(Veronese)를 비롯한 세계 최고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118개의 작은 섬들이 있는 석호(潟湖)에 있는 베네치아는 독특한 예술적 성취물이다. 베네치아가 보유하고 있는 뛰어난 건축물들은 건축과 기념물 예술의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베네치아의 건축물은 완벽한 유형별 공간 구성을 보여 주며, 이러한 사례로서의 가치는 이곳의 특수한 요건에 적용되어야 했던 도시적 환경이 지니는 탁월한 개성과도 관련되어 있다. 50,000㎢에 달하는 이 지역의 석호에서는 베네치아 주민이 이민족의 공습을 피해 토르첼로(Torcello), 이에솔로(Iesolo), 말라모코(Malamocco)의 모래섬으로 피난한 5세기 이래로 자연과 역사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다. 이들 임시 거주지는 점차 영구 정착지가 되었고, 농민과 어부의 최초 피난처였던 이곳은 해양 국가로 변화하여 작은 섬인 리알토(Rialto)가 새로운 도시의 핵심부로 선정되었다. 서기 1000년에 베네치아는 달마티아 해안을 지배하게 되었고, 1112년에 지중해 동부 연안의 시돈(Sidon) 항구에 교역 시장이 세워졌다. 1204년에 베네치아는 십자군과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이때 획득된 풍부한 전리품 중에는 산마르코 성당에 서 있는 청동 말들이 있는데 이는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가 동맹들과 함께 비잔티움에서 공수해 온 많은 전리품 중에서도 훌륭한 것으로 꼽힌다. 엔리코 단돌로의 지배 하에서 필적할 수 없는 세력을 지닌 해양 제국이 된 베네치아는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이오니아 해의 섬 및 크레타 섬에 이르는 해안 전체로 확장되었다. 베네치아의 팽창기 내내 아랍, 제노바, 오스만 제국은 물론 베네치아의 세력을 질시한 유럽 군주들의 상업 활동에 대항하여 교역 시장을 방어해야 했던 시기 동안 베네치아는 석호 지역에서 그 위치를 끊임없이 확고히 하였다. 바다에 대한 베네치아의 위상은 ‘바다와의 결혼[Lo Sposalizio del Mare; The marriage with the sea]’이라는 의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바다와의 결혼’은 1172년 이래 베네치아의 도제(Doge; 총독, 697년에 최초로 시민 집회로 선출된 도시국가의 총독으로 라틴어 Dux에서 온 말)가 부친토로(bucintoro; 총독의 바지선)를 타고 바다로 나가 아드리아 해에서 반지를 바다에 던지는 의식을 말한다.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았던 이 내륙해의 작은 군도 한복판에는 중세 시대에 드물게도 건물이 가득 들어선 지역 중 하나가 있다. 북쪽으로는 토르첼로(Torcello)에서부터 남쪽의 키오자(Chioggia)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은 섬들에는 고유의 정주지, 도시, 어촌, 장인 마을 무라노(Murano)가 있다. 그러나 석호의 한가운데에 있는 베네치아는 그 자체로 중세 세계에서 가장 큰 중심지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었다. 여러 개의 작은 섬들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원시시대의 지형에서는 주데카(Giudecca) 운하, 산마르코 운하, 대운하와 같이 운하가 된 부분과 수상 도시의 실질적 동맥이라 할 수 있는 조그만 ‘리(rii)’의 네트워크로 변한 부분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육지의 콘셉트의 개념이 아닌 믿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이 공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특별한 건축 박물관 중 하나이며, 이곳의 예술품들은 1,000년을 넘게 축적된 것들이다.

세계문화유산(334)/ 이탈리아

 

피렌체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Florence; 1982)

 

 

 

 

 

 

  

 

 

 

 

 

 

 

 

 

 

 

 

 

 

 

 

 

 

 

 

 

 

 

 

 

 

 

 

 

 

 

 

 

 

 

 

 

 

 

 

 

 

 

 

 

   토스카나 주[Tuscany]의 피렌체 시와 현[City and Province of Florence]에 속한 피렌체는 에트루리아 인들의 옛 거주지에 건설된 15세기, 16세기에 메디치 가문이 다스리며, 아름다운 문화와 경제적 풍요를 꽃피운 르네상스 시대를 상징하는 도시이다. 13세기에 지어진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 대성당을 비롯하여 산타크로체(Santa Croce) 성당우피치 궁전(Uffizi)피티(Pitti) 궁전 등의 뛰어난 건축물과 조토(Giotto)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otti)와 같은 대가의 예술 작품들이 남아 있다. 피렌체에는 600년에 걸쳐 일어난 탁월한 예술 업적이 도시 곳곳에 펼쳐져 있다.

  피렌체는 15세기부터 건축과 기념물 예술 분야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러한 영향은 이탈리아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피렌체 역사 지구는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상업 도시로서, 이곳을 차지하고 있던 세력의 모습을 탁월하고 일관적으로 드러낸다. 14~17세기에 피렌체에는 은행가와 권력가의 후원으로 조성된 훌륭한 건물이 가득했다. 기원전 59년에 로마의 식민지인 플로렌티아(Florentia)가 지금의 피렌체 위치에 세워졌다. 그리고 11세기 들어서야 피렌체 자유 지방 자치제로서 정치적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토스카나의 다른 도시들이 쇠퇴하는 가운데 피렌체는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꾸준히 번성하면서 1557년에 시에나를 병합하였다. 15세기에는 번영기의 정점에 도달했다. 이처럼 번영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으나, 부분적으로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물론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화가 마사초(Masaccio),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보티첼리, 그리고 조각가 도나텔로(Donatello),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루카 델라 로비아(Luca della Robbia) 등의 훌륭한 예술가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았다. 15세기에 공화당 정부가 폐지되고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공화국을 재건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메디치 가문이 1737년에 단절될 때까지 토스카나 대공국을 통치하였다. 이후 피렌체는 1859년에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될 때까지 로레인(Lorraine)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피렌체는 1865~1870년에 이탈리아의 정치적문화적 수도였다. 로마 도시 위에 세워진 피렌체 역사 지구는 예술과 건축 작품의 보고(寶庫)라 할 만하다. 14세기에 만들어진 성벽 안에 있는 피렌체는 이후 2세기 동안 황금기를 구가하며 거대한 상업 및 경제적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 도시의 정신적 중심지는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으로, 대성당 광장의 한쪽에는 조토의 종탑이 있고, 앞쪽에는 기베르티의 작품인 ‘천국의 문[Gates of Paradise]’이 있는 산 조반니 세례당이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미켈로초(Michelozzo)가 만든 메디치-리카르디 궁전과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산 로렌초 성당이 있으며, 대성당 내에는 도나텔로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구실이 있다. 대성당의 더 앞쪽에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걸작이 소장되어 있는 산마르코 박물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1501~1504)이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 그리고 산티시마 안눈치아타(Santissima Annunziata) 성당이 있다.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성당에는 르네상스 최고의 건축가로 추앙받던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한 보육원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Ospedale degli Innocenti)’가 있다. 대성당의 남쪽은 피렌체의 정치 및 문화의 중심지로, 가까이에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이 있고, 근처에는 바르젤로 미술관과 성십자가 대성당이 있다. 베키오 다리 건너편의 올트라르노(Oltrarno) 구역에는 피티 궁전과 보볼리 정원을 비롯하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성령 대성당[The Holy Ghost Basilica], 마솔리노, 마사치오, 필리포 리피가 작업한 프레스코 벽화가 보존된 카르멜 교회가 있다. 대성당의 서쪽에는 스트로치 궁전과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파사드(facade)를 설계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이 있다. 이 주변을 둘러싼 언덕에서는 피렌체 역사 지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 미니아토(San Miniato) 성당 바로 아래에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과 피에솔레(Fiesole)에서는 아르노 계곡에서 가장 화려한 전망들 가운데 일부를 볼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333)/ 이탈리아

 

로마 역사 지구-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Historic Centre of Rome, the Properties of the Holy See in that City Enjoying Extraterritorial Rights and San Paolo Fuori le Mura; 1980)

 

 

 

 

 

 

 

 

 

 

 

 

 

 

 

 

 

 

 

 

 

 

 

 

 

 

 

 

 

 

 

 

 

 

 

 

 

 

 

 

 

 

 

 

 

 

 

 

 

 

 

 

   로마는 로마 공화정과 로마제국의 중심지였으며, 4세기에는 기독교 세계의 수도였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가 세웠다고 한다. 이 지역은 라지오 주의 로마 지역[Province of Roma, Lazio region; 이탈리아]과 바티칸 시국[Vatican City State; 바티칸 시국]에 해당하며, 198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래 1990년에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 Urban VIII)의 성벽까지 확장 지정함에 따라 포룸(Forum)아우구스투스 영묘(靈廟)하드리아누스 영묘판테온트라야누스 원주[Trajan’s Column]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원주교황령 로마 내의 종교 건축물공공 건축물과 같은 고대 기념물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치외 법권[extraterritorial]’이 보장되는 바티칸 시국의 문화유산은 산타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 성 요한 라테란[St John Lateran] 성당, 성 바울[St Paul] 성당과 같은 독창적인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유산은 여러 세기에 걸쳐서 기독교 세계의 건축과 기념물 및 예술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와 바티칸 시국이 1929년에 체결한 라테란(Lateran) 협정에 의해 많은 유산에 치외 법권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탈리아 영토에 있는 유산은 바티칸 시국의 독점적인 자산으로 남게 되었다. 앞의 세 성당 외에도 칸첼레리아(Cancelleria; 1483~1517), 마페이(Maffei) 궁전, 산 칼리스토(San Callisto) 궁전, 그리고 건축가 베르니니(Bernini)와 보로미니(Borromini)가 수리했던 프로파간다 피데(Propaganda Fide) 궁전과 같은 여러 훌륭한 궁전들이 있다.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은 종교와 도시 계획 면에서 예술적으로 가장 중요한 로마 바실리카(basilica; 교황으로부터 특권을 받아 일반 성당보다 격이 높은 성당)의 네 곳 중 한 곳이다. 교황령 로마에서 이 성당은 식스투스 5세(Sixtus V)의 도시 설계에서 지렛대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 되었다. 대표적인 종탑과 둥근 천장이 있는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은 로마 전경에서 특징적인 부분이다. 이 바실리카의 특징은 모자이크의 수가 많고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36개의 패널로 구성된 신도석의 모자이크와 5세기에 만들어진 아치형의 모자이크 장식, 그리고 1295년에 완성된 애프스(apse)의 모자이크가 대표적이다. 아름다운 건물 뒤편에 있는 카를로 라이날디(Carlo Rainaldi)의 작품(1673년)은 바로크 건축물 중 가장 엄숙한 이미지를 풍긴다.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San Giovanni in Laterano) 성당은 312년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에게 주교좌(主敎座)를 놓을 수 있도록 허용했던 로마의 첫 대성당이다. 교황은 클레멘스 5세(Clemens V, Clement V; 재위 1305~1314)가 아비뇽(Avignon)으로 교황좌(敎皇座)를 이전할 때까지 라테란 궁전에 살았다. 현재의 명칭은 이 교회 세례당의 중요성과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 성자들에게 헌정한 베네딕트 수도원[Benedictine monastery]의 영향으로 지어졌다. 이곳에는 5개의 신도석이 있으며, 외관은 단순하지만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첫 대형 복원 공사는 교황 성세르기우스(Saint Sergius; 재위 687~701)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교황 세르기우스 3세(Segius Ⅲ; 재위 904~911)는 지진으로 파손된 바실리카를 이전의 성당 토대들을 사용해서 과거의 외벽 안에 완벽하게 재건하였다. 그리고 재건 이후에 바실리카를 정식으로 세례 요한에게 봉헌하였으며, 이후 교황 루치우스 2세(Lucius Ⅱ; 1144~1145)를 거쳐서 사도 요한에게 봉헌하였다. 1646년에 이 바실리카는 붕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Innocentius Ⅹ; Innocent Ⅹ)는 1650년 성년(聖年)에 대비하여 보로미니에게 재건 임무를 위임하였고, 보로미니가 건물을 재건하면서 교회는 바로크식 외관을 갖추게 되었다. 산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San Paolo fuori le Mura) 대성전은 314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의 요구로 지어진 로마의 원로 대성당[patriarchal basilica]의 네 곳 중 한 곳으로 이후에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1823년 화재로 거의 전소된 이후, 이 성당은 건축가 폴레티(Poletti)가 재건하여 1854년에 공사를 마쳤다. 현재 이 대성당의 내부는 80개의 몬토르파노(Montorfano) 산 화강암 기둥에 의해 신도석이 5개로 나누어져 있다. 커다란 창문 사이에는 이집트 산 설화 석고 평판으로 마감한 벽이 있으며, 벽의 상단에는 성 바울의 삶을 표현한 36개의 프레스코가 있다. 그리고 벽 아래에는 프리즈(frieze; 건물 윗부분에 그림이나 조각으로 띠 모양 장식을 한 것)가 전체 중간 복도까지 이어진다. 건물 정면의 안쪽 벽에는 이집트 총리가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y XVI]에게 바친 6개의 대형 설화 석고 기둥이 있다.

세계문화유산(332)/ 이탈리아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와 도미니크 수도원 및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Church and Dominican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with

The Leonardo da Vinci; 1980)

 

 

 

 

 

 

 

 

 

 

 

 

 

 

 

 

   롬바르디아 주[Lombardy] 밀라노 현[Province of Milano]에 속한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은 1463년에 준공되어 15세기 말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가 증축개축하였다. 특히 식당 건물은 이 건축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며, 이 건물 북쪽 벽에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1495~1497)이 있다. 다빈치의 이 작품은 회화 역사의 새 지평을 연 독보적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켈트 족이 세운 도시 밀라노는 4차례에 걸쳐 번영기를 누렸다. 4, 5세기에는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으며,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11~13세기에는 ‘자유 자치제[Free Communes]’가 수립되고 통합되면서 단시간 내에 인접 영토들보다 강대해졌다. 독일의 지배에 대항하여 자주권 투쟁과 레냐노 전투[Battle of Legnano; 1176]의 선봉에 섰다. 14세기와 16세기에는 비스콘티 가문이 밀라노를 지배했으며, 그 후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 하에서 밀라노 공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밀라노는 처음에는 프랑스, 그 다음에는 스페인에 예속되었다. 이 시기는 르네상스 시대로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Gian Galeazzo Visconti),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 루도비코 일 모로(Ludovico il Moro)는 두오모(Duomo)스포르체스코(Sforzesco) 성과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산 산티로(San Satiro) 성당과 같은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뛰어난 예술가인 도나토 브라만테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활발하게 작업 활동을 펼쳤다. 밀라노는 점차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하여 1800년대에는 웅장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전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밀라노는 나폴레옹 치하에서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정치적 부흥기에는 애국 운동의 발상지였다. 1463년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공작은 자신의 토지 일부를 도미니크 수도회에 기증하였다. 이 토지 안에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는 수도원이 있었다. 수도사들은 기니포르테 솔라리(Guiniforte Solari)에게 교회와 수도원의 건축을 위임하였고, 1463년에 건축이 시작되었다. 밀라노의 새로운 지배자 루도비코 일 모로(Ludovico il Moro)는 교회 건물의 확장을 위해 애프스(apse)와 사제관을 철거할 것을 명령하고, 브라만테에게 이 작업의 감독을 맡겼다. 우르비노 출신의 브라만테는 교회를 구조적으로 확장하고, 대규모 애프스와 기둥으로 둘러싸인 북 형태의 돔과 회랑식당을 증축하였다. 성당 안의 프레스코화는 1495년에 시작되어 1497년에 완성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수가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한 직후의 순간을 묘사하였다. 다빈치의 작품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제자 12명의 움직임과 표정을 훌륭하게 포착하여 예수의 발언이 제자들에게 미친 영향과 그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과거를 묘사하던 전통적인 방식을 파괴한 것으로 몇 가지 관념을 뒤흔든 것이었다. 예술가로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은 빛과 강한 원근법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식탁에 앉아 있는 이들 뒤편에 있는 3개의 창문과 그 너머의 풍경은 인물들을 측면에서 조명하는 역광에 대조되는 빛을 만들어 낸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피렌체 양식과 명암을 배합한 원근법이 조합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작품을 카스타뇨(Castagno)와 같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과 비교할 때, 그 차이점은 분명해진다. 전통적인 해석에서 유다는 홀로 묘사되어 있는 반면 예수와 다른 제자들은 테이블 건너편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러한 해석 방식을 거부하여 예수를 제자들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예수의 양쪽에 3명씩 네 무리의 제자들을 배치하였다. 왼쪽에 나란히 있는 바돌로메소(小)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안드레는 예수의 선언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두 번째 무리는 베드로유다와 요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베드로는 요한 쪽으로 기대어 있고, 요한은 예수 옆에 앉아 유다를 앞으로 밀고 있다. 유다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을 분리하지 않으면서 강조되었다. 오른쪽의 무리는 마태와 다대오, 시몬으로 구성되는데 그들은 열띤 토론에 빠져서 예수를 보지 않고 있다. 가운데에서 깜짝 놀라 예수 쪽으로 기대는 제자들은 도마와 대(大)야고보[요한의 형제 야고보]빌립보이며, 이들은 예수에게 자신들의 충성을 확인하느라 열심이다. 벽화 중심부의 소실점(消失點)에는 예수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기름이 아닌 템페라(tempera)를 사용하여 습기에 약한 두 층의 회벽에 작업했기 때문에 작품이 손상되었다. 1568년에 바사리(Vasari)는 이러한 회화 기법의 문제점을 최초로 지적하였다. 그림의 보존 프로그램이 반복 시행되었으며, 최근 20년간 복원 작업이 실시되었다.

세계문화유산(331)/ 이탈리아

 

발카모니카의 암각화(Rock Drawings in Valcamonica; 1979)

 

 

 

 

 

 

 

 

 

 

 

 

 

 

 

 

 

 

 

 

 

 

 

 

 

 

 

 

   롬바르디아 주[Lombardy], 브레시아 현[Province of Brescia]의 롬바르디아 평원에 위치한 발카모니카(Valcamonica)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사 시대의 암각화[바위그림]가 모여 있다. 선사시대의 농업과 항해, 전쟁, 마술에 관련된 주제를 담고 있는 기호 및 그림은 140,000여 점에 달하며 약 8,000년 넘는 오랜 기간 동안 그려진 선사시대 암각화 뿐 아니라 로마 시대, 중세시대, 근대에 걸쳐 그려진 암각화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8,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발카모니카의 암각화는 선사시대 인류의 관습과 사고방식에 대한 뛰어난 조형적 기록이다. 이들 암각화에 대한 체계적 해석과 유형학적 분류 및 연대기적 연구는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와 사회학민족학 분야에 크게 기여하였다. 발카모니카에는 이탈리아의 알프스 산록 지방 최대의 암각화 집단이 있다. 여기에는 농경과 항해, 전쟁, 마술 등의 장면을 묘사한 약 140,000점의 암각화가 지표에 노출된 2,400개의 바위에 그려져 있다. 암각화가 가장 많은 지역은 콘카레나(Concarena) 봉우리와 피초 바딜레 카무노(Pizzo Badile Camuno) 봉우리 사이의 계곡 저지대이다. 암각화의 몇몇 시기는 카무니크(Cammunic) 사회의 발전에 맞춰 판별할 수 있다. 후기 구석기시대인 기원전 8000년 무렵의 그림에서는 사냥과 초기 문명의 장면들이 나타나고, 기원전 4000~기원전 3000년의 신석기시대에서 빙하기 말기의 그림에는 종교적인 묘사가 처음 선보인다. 이 시기는 카무니크 예술의 절정으로 일상생활의 묘사와 함께 사람을 그리는 것이 점차 중요해졌다. 기원전 3000~기원전 2000년의 동석시대(銅石時代)에는 그림의 수준이 높아져서 사냥과 농촌 생활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는가 하면 거의 서사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특히 여성의 성년식을 묘사한 장면이 나타난 것은 이 시기의 중요한 요소이다. 기원전 1000년 이후에는 카무니크 사회의 고립이 끝나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남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영토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종종 일어났다. 전투 장면이 바위에 조각되었고, 오두막마차수확무기를 나타내는 그림도 새겨졌다. 카무니크 예술은 이 시기에 최고점에 달한 뒤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바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제8천년기의 전한랭기(前寒冷期)로, 당시에는 울창한 숲에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주요 수종을 차지하고 있었다. 카무니크 부족 가운데 최초로 수렵 활동을 한 사람들은 산비탈에 집단으로 거주하였다. 특히 해빙기 때에는 눈사태가 빈번했기 때문에 계곡 바닥 지역에는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다. 기원전 16세기부터 기원후 476년 사이에 로마가 발카모니카를 점령하였다. 이 지역에는 철광산이 있어서 켈트족 장인은 여기서 채굴한 철로 좋은 품질의 철강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완전한 정치적 자치권과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하지만 발카모니카는 로마시대에도 이민족의 공격을 받았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헤룰리 족[Herulians]이 침략을 하고, 곧이어 542년의 동고트 족의 침략으로 대규모 살상과 파괴가 일어났다. 랑고바르드 왕국(568~774)이 발카모니카 계곡을 지배하고 있을 때 프랑크 족이 다시 이 지역을 빼앗았다. 발카모니카에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찾아온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은 교회와 구호소를 설립하여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구제 활동을 펼쳤다. 서기 1000년 무렵, 발카모니카 계곡의 농경 공동체는 일종의 자기 정체성을 자각하고 자치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단위 공동체 비치니(vicini)의 연합체인 레 비치니(Le vicini)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1164년 이후 황제의 승인으로 자치 공동체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1428년 발카모니카는 베네치아 공화국 치하에 편입되었고, 이후 25년 동안 밀라노와 베네치아 사이에서 이 계곡의 합병을 두고 수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발카모니카의 경제적 번영은 수도승들이 생산하는 양털 산업에 달려 있었으나 고지대의 목축업 역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철광산을 보유한 마을들 또한 중요한 위치를 점하기 시작하였다. 1769년 프랑스가 브레시아(Brescia)를 점유하면서 발카모니카는 ‘칸토네 델라 몬타냐’(Cantone della Montagna)라는 지명으로 바뀌며 7개의 마을로 분할되었다. 1797년에는 세리오(Serio) 자치구가 형성되어 오글리오(Oglio) 강 오른쪽 강변의 자치체를 포함시켰고, 왼쪽 강변의 공동체는 브레시아에 귀속되었다. 1801년에 발카모니카의 모든 지역은 브레시아의 관할에서 벗어나 세리오에 합병되었다. 농업과 목축업은 나폴레옹 치하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계곡 지역을 세리오에 재합병시켰다. 1815~1818년에 발카모니카는 기아와 전염병에 시달렸다. 이탈리아 왕국이 창건될 무렵, 발카모니카 계곡의 52개 자치체는 브레노(Breno), 에돌로(Edolo), 피소그네(Pisogne)의 세 지역으로 나뉘었으며, 브레노가 중심 지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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