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헨티나(ARGENTINA) : 총 8건 / 협약 가입일: 1978년 8월 23일

▪ 로스 글래시아레스 국립공원 / Los Glaciares (1981)

▪ 과라니 족의 예수회 선교단 시설 / Jesuit Missions of the Guaranis: San Ignacio Mini, Santa Ana, Nuestra Señora de Loreto and Santa Maria Mayor (Argentina), Ruins of Sao Miguel das Missoes (Brazil) (1983)

▪ 이과수 국립공원 / Iguazu National Park (1984)

▪ 리오 핀투라스 암각화 / Cueva de las Manos, Río Pinturas (1999)

▪ 발데스 반도 / Península Valdés (1999)

▪ 이치구알라스토 타람파야 자연공원 / Ischigualasto / Talampaya Natural Parks (2000)

▪ 코르도바의 예수회 수사 유적 / Jesuit Block and Estancias of Córdoba (2000)

▪ 우마우카 협곡 / Quebrada de Humahuaca (2003)

■ 칠레(CHILE) : 총 5건 / 협약 가입일: 1980년 2월 20일

▪ 라파 누이 국립공원 / Rapa Nui National Park (1995)

▪ 칠로에 교회 / The Churches of Chiloe (2000)

▪ 발파라이소 항구 도시의 역사지구 / Historic Quarter of the Seaport City of Valparaíso (2003)

▪ 움베르스똔과 산따 라우라의 초석 작업장 / Humberstone and Santa Laura Saltpeter Works (2005)

▪ 씨웰 광산촌 유적지 / Sewell Mining Town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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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리비아(BOLIVIA) : 총 6건 / 협약 가입일: 1976년 10월 4일

▪ 포토시 광산도시 / City of Potosí (1987)

▪ 치키토스의 예수회 선교단 시설 / Jesuit Missions of the Chiquitos (1990)

▪ 수크레 역사도시 / Historic City of Sucre (1991)

▪ 사마이파타 암벽화 / Fuerte de Samaipata (1998)

▪ 노엘 캠프 메르카도 국립공원 / Noel Kempff Mercado National Park (2000)

▪ 티와나쿠 / Tiwanaku : Spiritual and Political center of the Tiwanaku Culture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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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루(PERU) : 총 11건 / 협약 가입일: 1982년 2월 24일

▪ 마추픽추 역사 보호 지구 / Historic Sanctuary of Machu Picchu (1983)

▪ 쿠스코 市 / City of Cuzco (1983)

▪ 차빈 고고 유적지 / Chavin (Archaeological Site) (1985)

▪ 후아스카란 국립공원 / Huascarán National Park (1985)

▪ 찬찬 고고 유적 지대 / Chan Chan Archaeological Zone (1986)

▪ 마누 국립공원 / Manú National Park (1987)

▪ 리마 역사 지구 / Historic Centre of Lima (1988)

▪ 리오 아비세오 국립공원 / Río Abiseo National Park (1990)

▪ 나스카와 후마나 평원의 선과 지상그림 / Lines and Geoglyphs of Nasca and Pampas de Jumana (1994)

▪ 아레큐파 역사 도시 / Historical Centre of the City of Arequipa (2000)

▪ 카랄-수페 신성 도시 / Sacred City of Caral-Supe (2009)

■ 이탈리아(ITALY) : 총 49건 / 협약 가입일: 1978년 6월 23일

▪ 발카모니카 암각화 / Rock Drawings in Valcamonica (1979)

▪ 산타마리아의 교회와 도미니카 수도원 및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 Church and Dominican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with (1980)

▪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 Historic Centre of Rome, the Properties of the Holy See in that City Enjoying Extraterritorial Rights and San Paolo Fuori le Mura (1980)

▪ 플로렌스 역사 센터 / Historic Centre of Florence (1982)

▪ 베니스와 석호(潟湖) / Venice and its Lagoon (1987)

▪ 피사의 두오모 광장 / Piazza del Duomo, Pisa (1987)

▪ 산 지미냐노 역사지구 / Historic Centre of San Gimignano (1990)

▪ 이 사시 디 마테라 주거지 / The Sassi and the Park of the Rupestrian Churches of Matera (1993)

▪ 비센자 市와 팔라디안 건축물 / City of Vicenza and the Palladian Villas of the Veneto (1994)

▪ 나폴리 역사지구 / Historic Centre of Naples (1995)

▪ 시에나 역사지구 / Historic Centre of Siena (1995)

▪ 크레스피 다다 / Crespi d'Adda (1995)

▪ 르네상스 도시 페라라와 포 삼각주 / Ferrara, City of the Renaissance, and its Po Delta (1995)

▪ 라베나의 초기 그리스도교 기념물 / Early Christian Monuments of Ravenna (1996)

▪ 몬테 성 / Castel del Monte (1996)

▪ 알베로벨로의 트룰리 / The Trulli of Alberobello (1996)

▪ 피엔차 市 역사지구 / Historic Centre of the City of Pienza (1996)

▪ 까세르따 18세기 궁전과 공원, 반비텔리 수로 및 산 루치오 / 18th-Century Royal Palace at Caserta with the Park, the Aqueduct of Vanvitelli, and the San Leucio Complex (1997)

▪ 모데나의 토레 씨비카와 피아짜 그란데 성당 / Cathedral, Torre Civica and Piazza Grande, Modena (1997)

▪ 사보이 궁중 저택 / Residences of the Royal House of Savoy (1997)

▪ 수 누락시 디 바루미니 / Su Nuraxi di Barumini (1997)

▪ 아그리젠토 고고학 지역 / Archaeological Area of Agrigento (1997)

▪ 카잘레의 빌라 로마나 / Villa Romana del Casale (1997)

▪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라 / Costiera Amalfitana (1997)

▪ 파두아 식물원 / Botanical Garden (Orto Botanico), Padua (1997)

▪ 포르토베네레, 생케 테레와 섬들 / Portovenere, Cinque Terre, and the Islands (Palmaria, Tino and Tinetto) (1997)

▪ 폼페이 및 허큐라네움과 토레 아눈치아타 고고 유적지 / Archaeological Areas of Pompei, Herculaneum and Torre Annunziata (1997)

▪ 시렌토, 발로, 디 디아노 국립공원 / Cilento and Vallo di Diano National Park with the Archeological sites of Paestum and Velia, and the Certosa di Padula (1998)

▪ 아퀴레이아 고고 유적지 및 가톨릭 성당 / Archaeological Area and the Patriarchal Basilica of Aquileia (1998)

▪ 울비노 역사 유적지 / Historic Centre of Urbino (1998)

▪ 안드리아나 고대 건축 / Villa Adriana (Tivoli) (1999)

▪ 베로나 도시 / City of Verona (2000)

▪ 아씨시, 성 프란체스코의 바실리카 유적 / Assisi, the Basilica of San Francesco and Other Franciscan Sites (2000)

▪ 에올리안 섬 / Isole Eolie (Aeolian Islands) (2000)

▪ 티볼리에 있는 르네상스식 빌라 / Villa d'Este, Tivoli (2001)

▪ 발 디 노토의 후기 바로크 도시(시실리아 동남부) / Late Baroque Towns of the Val di Noto (South-Eastern Sicily) (2002)

▪ 피에드몽과 롬바르디의 지방의 영산 / Sacri Monti of Piedmont and Lombardy (2003)

 ▪ 발도르시아 / Val d'Orcia (2004)

▪ 체르베테리와 타르퀴니아의 에트루리아 인 네크로폴리스 / Etruscan Necropolises of Cerveteri and Tarquinia (2004)

▪ 시라쿠사와 암석 묘지 / Syracuse and the Rocky Necropolis of Pantalica (2005)

▪ 제노바의 롤리 왕궁 및 신작로 유적지 / Genoa: Le Strade Nuove and the system of the Palazzi dei Rolli (2006)

▪ 만투아와 사비오네타 / Mantua and Sabbioneta (2008)

▪ 알불라·베르니나 문화경관 지역의 라에티안 철로 / Rhaetian Railway in the Albula / Bernina Landscapes (2008)

▪ 돌로미테스 / The Dolomites (2009)

▪ 몬테 산 조르조 산 / Monte San Giorgio (2010)

▪ 알프스 주변의 선사시대 호상 가옥 / Prehistoric Pile dwellings around the Alps (2011)

▪ 이탈리아의 롱고바르드 / Longobards in Italy. Places of the power (568-774 A.D.) (2011)

http://cafe.daum.net/_c21_/home?grpid=1NGD9 ('불개 댕견'의 세계유산 참조)

세계문화유산(373)/ 산마리노

 

산마리노 역사 지구와 티타노 산

(San Marino Historic Centre and Mount Titano; 2008)

 

 

 

 

 

 

 

 

 

 

 

 

 

 

 

 

 

 

 

 

 

   13세기 탄생한 산마리노 공화국의 도시 국가와 티타노 산을 포함하는 유산 지역이다. 산마리노 역사 지구는 중세 이후로 자유공화국 체제를 유지해 온 증거로 등재되었다. 티타노 산은 전체 지역이 55㏊에 달하며, 이곳의 역사 유적에는 요새의 탑성벽성문보루,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교회당, 14~16세기 양식의 수도원과 19세기의 팔라초 푸블리코(Palazzo Publico), 18세기의 티타노 극장[Titano Theatre] 등이 있다. 이 건물들은 지금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고, 본래의 기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티타노 산 정상에 자리 잡은 덕분에 산업혁명 이후의 도시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최초의 공동체는 로마제국 후기에 성 마리노[Saint Marino]가 세웠다고 한다. 이 도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6세기 초부터이며, 티타노 산의 정상에 작은 수도원이 있었다는 내용도 있다. 885년에 일반 신도로 구성된 공동체가 있었고, 951년에 최초의 교구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 시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13세기 중반에 산마리노는 법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도시의 독립을 입증하는 최초 문서의 날짜는 1296년이다. 1295~1302년의 법령에서는 단체와 기관 설립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정치 체계에서도 여전히 유지되는 체제이다. 이때도 도시의 핵심을 이루는 기본 구조는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산 정상의 남서쪽 끝자락에 첫 번째 탑[Rocca 또는 Guaita]이 있고, 첫 번째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지역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교회가 있으며, 거기서 서쪽으로 가면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티타노 산기슭에 있는 보르고 마지오레(Borgo Maggiore)라는 분리된 지역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13~14세기 후반에는 두 번째 도시의 성벽이 보다 대규모 지역을 둘러쌌다. 북쪽으로 교회와 시가지 구역이 있다. 이 성벽의 일부가 여전히 남아 있고, 남아 있지 않은 부분은 복원이 많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이와 같은 시대에 티타노 산 능선에서 더 남쪽 방향으로 또 다른 방어 탑 두 개를 세웠다. 두 번째 탑은 체스타 탑[Cesta 혹은 Fratta], 세 번째 탑은 몬탈레(Montale)이다. 체스타 탑도 마찬가지로 성벽을 둘렀다. 1360년에 도시 성벽 밖에는 중요한 성 프란시스 수도원[Saint Francis’ Convent] 단지가 생겼다. 공화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며, 지금도 남아 있다. 15세기 중반에 3개의 출입구가 달린 세 번째 방어벽을 세우게 된다. 이는 서쪽으로 대단한 규모로 확장한 것을 의미했고, 오늘날 역사지구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성벽은 16세기에 강화되었다. 보루 2개는 1549년과 1559년에 세웠다. 1463년에 산마리노는 예전에 리미니(Rimini)의 통치 아래 있던 많은 영토들을 손에 넣었으며, 그 이후로 공화국의 국경은 더 이상 변화가 없었다. 16세기에 캐퓨친 수도회[Capuchin Fathers] 수도원이 남쪽 성벽 밖에 들어섰고, 콘트라다 오메렐리(Contrada Omerelli) 거리를 따라 성 글라라 수도원[the Convent of Saint Chiara]과 가장 권위 있는 귀족 가문들이 사는 궁전 건물들이 대부분 들어섰다. 이 건축물들은 이 시대 귀족들의 영향력과 부가 어느 정도로 성장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1663년의 판화와 1884년의 지적도는 거리의 기본 구조와 성벽의 서쪽 지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건물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지역은 20세기에 주로 건물이 들어서면서 남쪽으로 넓어졌다. 19세기에 두 개의 주요 건축물이 더 생겼는데 고대 교회를 대체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성당(1825년에 시작)과 신고딕 양식으로 지은 새로운 팔라초 푸블리코이다. 이는 공화국의 조직 개편과 현대화를 보여 주지만 여전히 중세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이후 1862년에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자유와 통치권을 정식으로 승인받았고, 1865년에 최초의 대국민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1916년에 ‘문화재 및 예술품 보존을 위한 의회 위원단’이 발족했고, 1919년에 기념물 보호를 위한 법안이 통과되었다. 같은 해에 체스타 탑이 무너졌다. 이후 산마리노 출신의 기술자 지노 자니가 요새를 복원하는 일에 관한 광범위한 보고서를 발간했고, 건축물의 원래 형태를 추정하는 고문서와 출간된 책을 대상으로 연구를 계속했다. 1925~1940년에 자니는 성 프란시스 성당의 와관과 티타노 극장, 그리고 여러 궁전들과 마찬가지로 세 개의 탑, 많은 건축물들, 성벽을 복원했다. 그는 성 아가타 광장[Piazza Sant'Agata]과 자비병원[Misericordia]을 확장하고 새로운 비아 돈나 펠리치시마(Via Donna Felicissima)도 확장했다. 1935년에 그는 역사 지역 전체에 대한 계획서를 제출했지만 그 중 일부만 진행했다. 현대식 건물은 카사 데 리스파르미오(Cassa de Risparmio) 은행이다. 또 1935년에 자니는 도시 성벽[완충 지역 내] 바깥 남동 지역의 확장 공사를 위한 도시 계획서 초안을 작성했다. 이 초안에는 역사 지역으로 관통하는 새로운 출입구가 들어 있었다. 20세기 후반에는 관광객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다른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이를테면 도시 주변의 주차 시설이나 보르고 마지오레와 산마리노를 잇는 공중 케이블 등이다. 강력한 상업 특화 지구가 생겼고, 휘황찬란한 상점들이 하나 둘씩 문을 열었다. 높은 성벽에 이르는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역사 지역 외의 다른 지역에도 유명한 건축가들의 솜씨로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곳의 역사 보존은 1916년의 문화재 및 예술품 보존 위원회[the Commission for the Conservation of Monuments, Antiquities and Art Objects]의 발족과 1919년의 관련 법안으로 시작했다. 역사 지구의 복원 사업은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이어져 중세 도시의 특징을 강화하자는 강한 요구가 주를 이루었다. 지금도 역사 지역의 복원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372)/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568~774년 권력의 장소)

[Longobards in Italy. Places of the power(568~774 A.D.; 2011]

 

 

 

 

 

 

 

 

 

 

 

 

 

 

   이탈리아 랑고바르드 유적지는 이탈리아 반도의 전역에 있는 요새, 교회, 수도원 등의 중요 건축물이 있는 7개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역들은 롬바르드 족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보여 준다. 롬바르드 족은 북유럽에서 내려와 6~8세기까지 이탈리아의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며 그들 특유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롬바르드 족이 고대 로마의 유산, 기독교 정신, 비잔틴의 영향력, 게르만 족의 북유럽 유산 등의 문화를 융합하였는데 이러한 건축 방식은 고대에서 중세 유럽으로의 이행 과정을 나타낸다. 이 일련의 유산은 롬바르드 족이 특히 수도원 운동을 지지하면서 중세 유럽의 기독교 정신과 문화 발달에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는 연속 유산이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 : 이탈리아 랑고바르드 유적지는 오늘날 이탈리아에 남아 있는 롬바르드 인들의 예술 유산과 건축 유적의 진수를 보여 준다. 게르만 혈통의 롬바르드 인들은 이곳으로 이주 정착한 뒤 기독교로 개종하여 로마 시대 후기의 물질적・문화적 가치를 받아들였다. 또한 비잔틴, 헬레니즘, 중동의 영향을 받아 문화・건축・예술의 독특한 융합을 이루었다. 이들 유산은 다양한 기념물과 다양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유산을 세속적・종교적으로 다양하게 이용한 점에서도 특이하다. 이것은 유럽 중세 세계의 시작과 서양 기독교의 확립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성 : 이탈리아 랑고바르드 유적지는 특히 일련의 등재 기준에 대해 유산의 완전성을 충족한다. 엄격한 선정 기준을 적용하여 고대 롬바르드 왕국의 수도를 제외하고 정확하게 경계를 설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적지는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전달하는 데 필요한 제반 요소들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구성 요소들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진정성 : 기념물에 나타난 장식과 금석학적 요소의 진정성은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건축・예술・고고학・역사에 관한 세부적인 기록이 함께 남아 있어 이곳을 유산으로 선정하기에 충분한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보존 및 관리 체계 : 지정된 모든 유산 지구는 2004년 1월 22일 제정된 법령 No. 42(Codice dei beni cultruali e del paesaggio)의 수준 높은 법적 보호 체계에 따라 보존되고 있다. 고고학적 유물과 그림, 치장 벽토 등 본질적으로 보존에 취약하고 섬세한 중요 요소들이 많은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당국의 적절한 보존 체계가 잘 시행되고 있다. 유산의 7개 구역에 대해 소유권과 관련하여 이해 당사자들로 구성된 특별한 관리 체계가 시행되고 있다. 이탈리아 랑고바르드 지역 연합회는 일련의 유산들을 조화롭게 지켜 가는 대단히 중요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관리 방안에는 매우 포괄적인 계획이 담겨 있다. 그러나 유산의 영구적 보존과 유산의 탁월한 가치의 환경적 표현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 어떤 유적지는 지진과 강물의 침식 작용의 위험이 있는 것도 있으며, 그 밖에 관광 산업의 개발 압력은 사람의 손길에 가장 취약한 유산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등재 기준 : 기준 (ⅱ) - 롬바르드의 기념물은 6~8세기에 고대 로마의 유산과 기독교 정신, 비잔틴의 영향과 게르만 세계의 가치들이 문화적・예술적으로 통합된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 증거이다. 카롤링거 왕조의 문화 예술의 번영을 위한 길을 닦아 놓았다. 기준 (ⅲ) - 롬바르드 인의 힘의 고적지가 보여 주는 기념비적인 새로운 예술 형식은 유럽에서 절정을 이룬 중세 롬바르드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문화 형식을 띠고 있으며, 롬바르드 문화에 담긴 의미와 목적들은 롬바르드의 지배 계급의 권력을 표현한 것이다. 기준 (ⅵ) - 롬바르드 고고 유적지와 그것이 중세 유럽 기독교의 정신적・문화적 구조물에 남긴 유산은 매우 중요하다. 롬바르드 인들은 수도원 운동을 강화하고, 성 미카엘[St Michael] 숭배를 널리 퍼뜨리며, 몬테 산탄젤로(Monte Sant’Angelo)를 대 순례지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또한 고대부터 내려오던 문학・기술・건축・과학・역사・법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발생기의 유럽 세계에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문화유산(371)/ 이탈리아

 

만토바와 사비오네타(Mantua and Sabbioneta; 2008)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Lombardia) 주의 포 계곡에 있는 만토바와 사비오네타는 르네상스 도시 계획의 두 유형을 보여 준다. 로마 시대 건설된 만토바는 기존 도시를 재개발하고 확장한 도시인 데 반해 32㎞ 떨어진 사비오네타는 당대의 ‘이상 도시[ideal city]’ 계획 이론을 실행하여 건설한 도시이다. 일반적으로 만토바의 배치는 불규칙하지만 균형 잡힌 부분들은 로마 시대 이후 건설된 도시의 성장 단계라고 할 수 있다. 11세기에 지어진 원형 건물과 바로크 양식의 극장 등 많은 중세 건물들이 있다. 사비오네타는 16세기 후반에 베스파시아노 곤차가 콜로냐(Vespasiano Gonzaga Colonna; 1531~1591)가 지배한 단일 시대에 건설된 도시이며, 도시 배치는 직각 그리드 레이아웃[right angle grid layout; 직각 격자 배치]으로 되어 있다. 두 도시들은 건축 양식의 가치에서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문화를 전파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당시 지배 세력 곤차가 가문이 장려한 르네상스 이상은 두 도시의 형태와 건축 표현에 녹아 있으며, 이상의 실천을 통해 실현된 만토바와 사비오네타는 르네상스의 도시・건축・예술의 뛰어난 사례이다.

   만토바는 원래 에트루리아 인의 주거지로 시작되어 로마 시대에 작은 요새 마을로 발전했다. 당시에 민초(Mincio) 강 주위의 습지 지역의 한 섬이었으며, 마을은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날의 도시 구조에서 그 때의 벽과 주요 거리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804년에 만토바는 주교 관할 지역이었으며, 예수의 핏자국 유적 덕분에 중요한 종교 중심지가 되었다. 10세기에 성벽과 해자를 새로 만들었고, 1115년에는 자유 구역이 되었다. 역사를 통틀어 치수(治水) 문제는 만토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유명한 수문 공사가 많이 이루어졌다. 1190년에 댐을 만들고 강 위에 다리를 건설하면서 도시 주변에 호수 체계를 조성하여 강의 수위를 4m 이상 높였다. 댐에서는 12개의 물레방아가 돌면서 물의 흐름을 조절하였다. 13세기에는 도시 남부에 리오 운하를 팠다. 리오 운하는 곧바로 확장된 도시의 경계가 되었는데 이것이 두 번째 성장고리라고 할 수 있다. 운하의 동쪽 끝에는 보호를 받는 카테나 항구가 건설되었다. 13세기에 이 도시에 몇 개의 탑과 궁정을 짓고, 현재의 브롤레토(Broletto) 광장과 에르베(Erbe) 광장을 만들었다. 1272년에 보나콜시(Bonacolsi) 가문이 권력을 잡고 건설 사업을 실시했다. 1328년에 루이지 곤차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곤차가 가문은 이후 1433년에 후작의 작위를 얻고, 1530년에 공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1707년까지 권력을 잡았다. 영토는 더욱 확장되고 수로의 가항성을 개선하고 방어 시설을 지었다. 동시에 농업 생산성과 상업도 발전하였다. 14세기 중반 무렵 곤차가 가문이 더 많은 재산을 획득하면서 오늘날의 공작궁 모습이 서서히 갖추어졌다. 14세기 말에 남쪽으로 세 번째 성장고리가 시작되면서 넓은 해자가 있는 포사 마지스트랄레(Fossa Magistrale)가 외곽의 경계가 되었다. 잔프란체스코 곤차가(Gianfrancesco Gonzaga; 1407~1444)의 통치로 르네상스를 맞을 준비를 하였으며 인문주의 학문을 통해 새로운 사상이 들어왔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피렌체로부터 초대하고,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피사넬로의 작품도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도시 체계화의 한 방법으로서 도시 공간을 기획하고 남쪽의 새로운 지역에 왕궁을 건설하는 도시 재개발을 하였다. 15세기 후반 루도비코 2세(1444~1478)의 시대에 만토바는 르네상스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건축가, 예술가, 장인들이 몰려와 새로운 예술 형식이 자리 잡았다. 1459년에 교황 비오 2세가 투르크 인들의 위협을 받아 식사 초대를 하여 많은 외국 사절단들을 불러들였다. 건축에서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와 루카 판첼리(Luca Fancelli)가 특히 중요한 인물들이었으며, 그림에서는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460년대와 1470년대에 새로운 궁전들과 건물들을 많이 건설하고 옛 건물들에도 변화를 주었으며, 도로와 야외 공간의 바닥을 포장하는 등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 알베르티가 설계한 산세바스티아노 교회(1460)와 성안드레아 교회(1472)는 건축학적으로 특히 의미 있다. 도시의 중심축도 새로 만들어졌다. 1478년에 루도비코 2세가 죽은 뒤 이 영토는 몇 개의 독립주로 갈라져 곤차가 가문의 여러 분가에서 통치하였다. 16세기 후반에 그 중 한 곳에 건설된 도시가 사비오네타이다. 만토바 궁정은 르네상스의 으뜸가는 문화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이전 세기와 마찬가지로 계속 발달되고 도시는 공고해졌다. 1524년에 건축가이자 화가인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가 로마에서 만토바로 들어와 이후 20년 동안 예술계를 지배하였다. 1525년에는 해자 밖 교외의 테 궁전(Palazzo Te) 공사가 시작되어 도시 중심축의 남쪽 끝이 되었다. 이 궁전은 건축과 미술에서 이 궁은 가장 영향력이 큰 매너리즘 작품 중의 하나가 되었다. 로마노는 만토바 시의 공사 감독이자 궁정 화가로서 많은 재개발 계획을 책임졌다. 도시와 문화생활은 번영을 누려 16세기 말에 이르면 거주민의 수가 오늘날의 인구와 거의 맞먹는 4만 명이 넘었다. 17세기에 들어 만토바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곤차가 직계 가문이 멸망하고 전쟁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1630년에 만토바는 적의 포위를 당하는 한편, 전염병이 돌았다. 전쟁이 끝난 후 만토바는 1707년에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요새 도시로서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맞았다. 새로운 공공건물이 세워지는 가운데 아카데미 궁전[Palace of the Academy]이 건설되었다. 성 안드레아 궁전에는 돔을 얹고, 1797년에는 기념비적인 비르질라나 광장[Piazza Virgilana] 공사가 시작되었다. 도시 전역의 건물 외관은 단색으로 칠하였다. 1866년에 만토바는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면서 경제가 서서히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요새 시설을 해체하고 해자를 덮어 버렸다. 지금은 역사적 중심지의 남쪽 경계를 따라 넓은 도로가 나 있고, 서쪽과 남쪽을 따라 철도가 건설되었다. 도시 중심부의 야외 공간은 복원되어 이전의 역사적 특징을 되찾았다. 1942년과 1950년에 이 역사 중심지를 위한 계획안이 마련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옛 건물 대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리오 운하도 부분적으로 복개하였다. 사비오네타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작은 주의 주도로 만토바가 1478년에 몇 개 부분으로 갈라졌을 때 생겨난 도시이다. 이 지역들은 여전히 곤차가 가문의 분가에서 통치하였다. 사비오네타는 로마 시대 이후 비텔리아나 도로변의 한 지방으로 알려져 왔다. 역사는 길지만 새로 건설된 곳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비오네타는 베스파시아노 곤차가 콜로냐 일인 통치 하에 건설된 창작물이다. 이상적인 도시 계획에 관한 저술과 이론들을 연구하였던 그의 목표는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주도로 기능할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사비오네타는 군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그 자신이 직접 설계한 것으로 생각된다. 공사는 1554~1556년에 시작되었다. 1588~1590년에는 빈첸초 스카모치(Vincenzo Scamozzi)를 고용하여 고대 극장을 건설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현대식 실내 극장이며, 극장의 요건을 충족하도록 특별 공간이 설계되었다. 베스파시아노가 죽은 후 사비오네타도 쇠퇴했다. 17세기에 에스파냐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었으나 1703년에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에 반환되었다. 그러나 5년 후 다시 구아스텔라(Guastella) 공국에 합병되었다가 1743년에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다.

세계문화유산(370)/ 이탈리아

 

제노바: 르 스트라다 누오보와 팔라치 데이 롤리

(Genoa: Le Strade Nuove and the system of the Palazzi dei Rolli; 2006)

 

 

 

 

 

 

 

 

 

 

   제노바 주[Genoa Province] 리구리아 현[Liguria Region]에 속한 역사 중심지 제노바의 르 스트라다 누오보(Le Strade Nuove; 신작로)와 팔라치 데이 롤리(Palazzi dei Rolli; 롤리 궁전)는 제노바 공화국의 경제력과 해상력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건설된 유적이다. 이 유적은 유럽 최초로 공공기관에서 진행한 통합적 도시 개발 계획의 사례이다. 1576년 의회의 주최로 민간 저택 안에 ‘공공 숙박소’라는 특이한 공간을 만들어 냈다. 또한 ‘르 스트라다 누오보’라 불리는 새로운 길을 따라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의 궁전들이 들어섰다. 이 궁전과 고급 저택을 묶어 ‘팔라치 데이 롤리’라고 부른다. 팔라치 데이 롤리는 독특한 특성과 특수한 사회 경제 조직의 요구에 맞추어 건축된 건물이라는 점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팔라치 데이 롤리는 국가를 공식 방문하는 원수나 주요 인물들이 머물 수 있는 건물로 개인 저택을 공용화한 대표적 사례이다.

   리구리아의 옛 항구 제노바는 7세기 롬바르드 족[Lombards]에 의해 정복되고 10세기에는 사라진 족[Sarazins]에 의해 수차례 약탈되었다. 11세기부터 다른 도시 국가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제노바는 그들과의 무역 관계를 강화하였다. 이들은 조선업・항해술・지도 제작법・산업 기술 등의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무역업에서 투자하였으며, 파트너십을 가능하게 하는 계약서 작성에 있어서 선구적이었다. 12~13세기, 제노바는 유럽의 가장 큰 도시들 중 하나로 1300년경 100,000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었다. 15세기에 이 도시는 쇠퇴했으며 프랑스나 밀라노의 지배를 받았다. 중세가 되자 제노바는 바다와 골짜기 사이에 인구가 밀집한 자유 코뮌[Libero Comune]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제노바는 4개의 근교 지역, 알베르기(Alberghi), 다시 말해 귀족가문의 영향력이 있는 지역으로 나누어진 4개의 도시 지역과 연결되는 콘드라드 콘솔티리(Contrad consortili)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일자 또 다른 도지 페르페튀(Dogi perpetui) 시스템을 적용하였고 이 시스템은 1528년까지 사용되었다. 명성이 높은 제노바의 해군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 1468~1560)는 교황과 유럽의 여러 왕들을 섬겼으며 함대를 구축하였다. 그 함대의 영향력은 지중해에 있는 해적선들을 능가했다. 1528년 제노바에서 그는 새롭게 상류사회를 분할하고 새로운 귀족법을 만들었다. 이 귀족법은 1789년까지 유지되었다. 도리아의 지휘 아래, 스페인과의 동맹을 맺으면서 제노바 재력가들은 나폴레옹과 스페인과의 무역을 관리하게 되었고 신대륙에서 오는 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570년, 재력가들은 가톨릭 유럽의 주요한 은행가들이었고, 제노바는 가두 정치에 의해 안정적으로 통치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사・은행장・추기경과 같이 특별한 손님들은 엄청난 부자인 몇몇 귀족을 만나서 이곳을 방문했고, 그 방문자를 위한 새 저택을 지었으며, 1551년부터 르 스트라다 누오보가 만들어졌다. 1576년 공식적인 대표단을 위해 채택된 궁정의 공식적인 목록[롤로]이 선포되었다. 이 귀족적인 궁정은 큰 규모의 공간[현관, 기념비적인 계단, 아트리움, 정원]을 만들고 르네상스 말기와 이탈리아 기교파 예술 풍의 내부 장식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중세 초기의 유형과는 분명히 차별화되었다. 이 모델은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도 적용되었다. 궁정 설계도를 연구하고 발간한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빈센초 스카모치Vincenzo Scamozzi), 요제프 푸르텐바흐(Joseph Furttenbach) 같은 몇몇 예술가들의 열정은 제노바 궁정에 그대로 녹아 있다. 이들의 훌륭한 궁정 유형은 유럽의 다른 도시들 중 바스크 지방과 대영제국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17세기 말과 18세기에 제노바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영향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도시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에게, 그 다음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 이탈리아 시대가 오자 제노바는 항구 도시로 부상하였고, 역사적 도시 배치도 그대로 보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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