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350)/ 이탈리아

 

사보이 궁중 저택(Residences of the Royal House of Savoy; 1997)

 

 

 

 

 

 

 

 

 

 

 

 

 

 

 

 

 

 

 

 

 

  사보이는 피에몬테 지역[Piedmont Region] 토리노 주[Province of Torino]에 속한다. 1562년에 수도를 토리노로 이전한 사보이의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Emmanuele Philiberto; 1528~1580)는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프로젝트는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이어 나갔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하고 예술가들이 장식한 뛰어난 건축물 단지는 토리노의 ‘사령 지역[Command Area]’ 내의 왕궁에서 주변 전원 지역까지 넓은 방사형으로 퍼져 있다. 여기에는 수많은 촌락과 사냥터용 별장[hunting lodge]이 포함된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사보이 공작은 1562년에 자신의 궁정 위치를 샹베리(Chambery)에서 토리노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그는 토리노에 예상치 못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선사하였다. 당시만 해도 공작 영지의 새로운 수도는 요새화된 작은 중세 마을로서 르네상스 문화의 주된 발전에서 소외된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었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그의 후계자들이 17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건축 프로그램을 추진한 결과, 이 작은 마을과 주변 지역은 바로크 양식으로 변모하였다. 그 중심에는 공작의 저택들이 자리를 잡았다. 유희와 사냥을 위해 포(Po) 강을 따라 전원 마을과 언덕 위, 더 멀게는 광활한 숲에 건설한 저택은 경제와 전략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대(大)사유지 시스템을 평가하는 기준점 역할도 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한 나라 및 유럽의 수도를 건설하였던 사보이 지배자들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였다. 그들은 비토리오 아메데오 세바스티아노 2세(Vittorio Amedeo Sebastiano Ⅱ; l713)와 함께 시칠리아 왕국의 왕관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Ⅱ; 1861)와 함께 이탈리아 왕국의 왕관을 차례로 획득하였고, 1946년에 공화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왕좌를 유지하였다. 이들 건축물의 구조는 한 궁정과 다른 궁정, 또 궁정과 마을 사이를 연결하는 도시 계획 체계를 내포하였고, 동시에 권력의 옥좌가 놓인 지역에 건축의 통일성과 위엄을 불어넣었다. 따라서 ‘사령 지역[Command Area]’에 세운 일단의 건물은 팔라초 마다마(Palazzo Madama), 팔라초 디 카리냐노(Palazzo di Carignano) 등 사보이 가문의 궁정과 함께 방사형 설계에 따라 외딴 전원의 저택들과 직접 관련을 맺는 중심점을 형성하였다. 그 형태를 추적해 보면 중앙에는 토리노가 있었다. ‘사령부’의 건물들은 공작 저택을 출발점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이한 정치, 행정, 문화의 형태로 중앙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들 저택은 직선으로 곧게 뻗은 3개의 도로망 덕분에 수도에서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전체 조화에서 일관된 기능적 측면도 완성할 수 있었다. 거대한 규모의 도시 계획 프로젝트가 이 체계를 보강하였다. 토리노의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엠마누엘 필리베르토의 주요 관심사이기는 하였으나 그는 옛 주교 궁정에 자신의 저택을 짓는 데 성공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은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카스텔로(Castello) 광장을 중심으로 3차례에 걸친 대규모 확장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Carlo Emanuele I; 1562~1630)가 추진한 최초의 도시 및 건축 재개발 계획은 건축가 아스카니오 비토치(Ascanio Vitozzi;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가 설계하였다. 이 계획의 애초 구상은 토리노 시 북동부 지역에 군왕의 지위에 더욱 걸맞으면서도 방어 시설로 한층 실용적인 ‘사령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기존의 공작 궁정은 새로운 방향으로 재건함으로써 카스텔로 광장과 곧바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원에 있었던[지금은 붕괴하였다] 미라피오리(Mirafiori) 공작 저택 방향으로 새로운 도로[현재의 비아로마(Via Roma)]를 개통(1612~1615)하여 공작 궁정과 도시 남쪽도 연결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도시와 영지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양극성을 조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1638~1675)는 1673년에 아메데오 디 카스텔라몬테(Amedeo di CastelIamonte)에게 마을을 포 강 방향인 동쪽으로 확장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빌라 델라 레지나(Villa della Regina)가 서 있는 언덕 방향으로 강을 횡단하는 다리와 카스텔로 광장을 연결하는 비아포(Via PO)가 새로운 중심축이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카스텔로 광장을 동쪽으로 확장하였으며, 훗날 같은 축을 따라 외무사무국과 왕립 극장을 축조하였다.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Victor-Amadeus Ⅱ; 1675~1730)가 미켈란젤로 가로베(Michelangelo Garove), 안토니오 베르톨라(Antonio Bertola), 그리고 1716년부터 필리포 유바라(Filippo Juvarra)에게 의뢰하여 세 번째 확장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번에는 도시를 가로질러 포르타 수시나(Porta Susina)에서 카스텔로 디 리볼리(Castello di Rivoli)와 팔라치나 디 스투피니지(Palazzina di Stupinigi)로 이어지는 서쪽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1730~1773)는 아버지가 진행하던 몇 가지 프로젝트를 이어받았다. 그는 팔라초 레알레(Palazzo Reale)와 외무 사무국를 설계하였고, 카스텔로 광장에는 극장을 계획하였다. 그는 또한 처음에는 유바라가 주도하다가 1735년에 토리노를 떠난 후부터는 베네데토 알피에리(Benedetto Alfieri)가 주도하여 저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거대한 재건축과 확장 프로젝트를 조직하였다. 사보이 가문이 파리와 런던, 마드리드(Madrid), 뮌헨(Munich), 빈(Vienna)의 궁정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들과 맺은 돈독한 친분과 혈연 관계 덕분에 토리노의 궁정에는 예술과 문화의 국제적 환경이 형성되었다. 엠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이전까지만 해도 토리노에는 없었던 궁정 전통의 토대를 놓았다. 1682년에 출간된 2권으로 된 놀라운 책 <테아트룸 사바우디아이(Theatrum Sabaudiae; 사바우디아이 원형 극장)>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역대 사보이 공작들은 지칠 줄 모르는 건축가들이었다. 그들은 불굴의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 가문의 유산을 풍부하게 가꾸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예술가, 조경 전문가 들에게 공사를 의뢰하였다. 그 전문가들은 아스카니오 비토티(Ascanio Vitoti), 카를로 디 카스텔라몬테(Carlo di Castellamonte)와 아메데오 디 카스텔라몬테(Amedeo di Castellamonte), 과리노 과리니(Guarino Guarini), 필리포 유바라, 미켈란젤로 가로베, 베네데토 알피에리, 다니엘 자이터(Daniel Seiter), 프란체스코 솔리메나(Francesco Solimena), 세바스티아노 리치(Sebastiano Ricci), 샤를앙드레 방로(Charles-Andre Van Loo), 클라우디오 프란체스코 보몽(Claudio Francesco Beaumont), 프란체스코 라다테(Francesco Ladatte), 미셸 베나르(Michel Benard)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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