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359)/ 이탈리아

 

아퀼레이아의 고고 지구와 가톨릭 성당

(Archaeological Area and the Patriarchal Basilica of Aquileia; 1998)

 

 

 

 

 

 

 

 

 

 

 

 

 

 

 

 

 

 

 

 

 

 

 

 

 

   초기 로마 제국의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던 아퀼레이아(Aquileia)는 우디네 주[Province of Udine]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Friuli-Venezia Giulia Region]에 속하며, 5세기 중반 아틸라(Attila)가 이끈 훈 족에 의해 파괴되었다. 고대 로마 유적지로서는 가장 큰 규모인 아퀼레이아는 아직 많은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채 지하에 묻혀 있다. 이곳의 성당은 바닥면이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 성당은 중부 유럽 지역의 복음 전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초기 로마 제국의 가장 크고 부유했던 도시들 중 하나였던 고대 아퀼레이아 유적은 아직 대부분 발굴되지 않은 채 온전히 남아 있다. 지중해 지역에 남아 있는 초기 로마 도시 유적 가운데 가장 완벽한 사례이다. 이곳의 가톨릭 성당은 중세시대 초기에 중부 유럽의 기독교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퀼레이아는 기원전 181년 포 강 유역의 북동쪽 모서리에 당시 야만족이었던 갈리아 인과 이스트리아 인에 대항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서 로마가 건설된 식민 도시이다. 이곳은 나티사(Natissa) 강을 따라 바다와 연결되어 중부 유럽과 지중해를 이어 주는 요충지로 빠르게 무역 중심지로 발달했으며, 하항을 통해 포도주・오일・모피・철・노예 등을 거래하였다. 선사시대부터 호박길의 남쪽 끝이기도 했으며, 발트 해로부터 들여온 귀중품을 아퀼레이아의 장인들은 세공하여 로마제국 곳곳에 팔았다. 그 중에서도 품질 좋은 유리 제품은 중요한 상품이었는데 유명한 포에니의 장인 엔니온(Ennion)은 1세기에 아퀼레이아에 유리 공장을 건설하였다. 기원전 90년경에 자치 도시의 지위로서 이곳 시민들은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도시가 부유해져서 웅장한 공공건물이 다수 건축되었으며, 부유한 상인들은 개인 주택을 호사스럽게 장식하였다. 4세기에는 아퀼레이아에 황제의 궁전이 건설되었으며, 이 황제의 궁전은 284~425년에 조폐국으로 이용되었다.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한 국교 승인에 이어, 4세기 초에는 성당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아퀼레이아의 모든 문화는 452년 아틸라가 이끈 훈 족이 쳐들어와 끔찍한 종말을 맞았다. 급격히 약화된 정착촌에서 생존자들은 성당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오늘날의 작은 마을이 되었으며, 로마 도시의 작은 일부가 되었다. 아퀼레이아의 상업 도시로서의 역할은 그 후 베네치아가 맡게 되었고 중부 유럽과 지중해 사이의 무역로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종교적인 의미가 깊었던 아퀼레이아는 총대주교의 관할 교구가 되어 1751년까지 존속하면서 이 지역의 복음 전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영역이 점차 서쪽으로 코모까지 확대되었고,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지역을 아울렀으며, 대성당은 여전히 종교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발굴된 유적지에는 광장과 로마의 성당・공화국의 환전소・목욕탕・2개의 화려한 주거 단지의 일부가 있으며, 도시의 성곽 밖으로는 당당한 인상을 주는 비석이 있는 묘지와 원형 경기장과 원형 극장이 있었다. 강둑을 따라 창고와 선착장이 길게 늘어서 있는 포구 시설은 로마 도시 유적들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유적이다. 아퀼레이아의 가장 특징적인 건축물은 성당이다. 테오도레(Theodore; Theodorus) 주교가 3개의 주회관이 있는 말굽 모양의 건물을 건설하였으나 참배자들과 순례자들을 수용하기에 부족하여 345년에 북쪽 부분을 더 큰 건물로 교체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훈 족에 의해 파괴된 후 재건되지 못했다가 일부 생존자들이 돌아와 파괴된 남쪽 회관에 집중하여 복구를 하였다. 한동안 유기되었으나 9세기에 샤를마뉴 대제의 지원을 받아 막센티우스(Maxentius) 주교가 다시 공사를 시작하였다. 10세기 마자르 인들의 습격과 988년 지진에 의해 심하게 파손되었으나 공사는 1031년에 완성되었다. 이 성당은 1348년 지진이 있은 후, 재건되면서 약간은 고딕 양식을 띠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내부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은 4세기 건물인 남쪽 홀의 거대한 모자이크로, 11세기에 와서야 발굴되었고 1909년에서야 바닥의 진흙을 제거하면서 실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모자이크에는 상징적 주제의 그림, 기증자들의 초상화, 복음서와 헌정 글귀들이 장식되어 있다. 동쪽 끝은 12명의 어부가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모자이크 그림은 예수의 제자들을 의미하며 예언자 요나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동쪽 끝 지하실의 프레스코 화는 6세기 또는 7세기의 것으로 순교자들의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었다. 성당 동쪽 끝에 있는 문은 발굴지의 지하실로 통하며, 20세기 초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는 4세기에 성당 부지로 선정된 1세기 교외 저택에서 나온 모자이크가 보존되어 있고, 북쪽으로 가로놓인 홀의 토대는 아틸라에 의해 파괴된 후 재건되지 않았다. 모자이크는 주제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난해한 것들로 가득하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서쪽 입구는 현대식 세례당으로 통한다. 입구는 9세기 초에 지어진 포르티코(portico)로 보호되어 있다. 세례당은 일반적인 팔각형 평면으로 예수의 성스러운 문자 도안[Chi Rho]을 재현하면서 육각형의 세례 연못을 둘러싸고 있다. 세례당을 둘러싼 콜로네이드 사이로 보행 길이 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031년에 건립된 이후 아무 탈 없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대한 종탑이 있다. 모나스테로(Monastero)에 있는 또 하나의 성당 건물은 현재 초기 기독교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인상적인 이 4세기 건물에도 역시 바닥 모자이크가 있어 주목할 만하다.

세계문화유산(358)/ 이탈리아

 

치렌토·발로 디 디아노 국립공원, 파에스툼과 벨리아 고고 유적지

(Cilento and Vallo di Diano National Park with the Archeological sites of Paestum and Velia, and the Certosa di Padula; 1998)

 

 

 

 

 

 

 

 

 

 

 

 

 

 

 

 

 

 

 

 

   캄파니아(Campania) 주 살레르노[Province of Salerno]에 속하는 치렌토(Cilento)와 그 일대 지역은 선사시대에서 중세시대까지 주요 무역로로서 문화적・정치적 교류의 중심지였다. 동서로 뻗은 3개의 산맥을 따라 있는 신전과 주거지는 당시의 역사적 발전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탁월한 문화 경관이다. 이 지역은 그리스 식민 도시들인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와 토착민인 에트루리아 인・루카니아 인이 세운 도시들 사이의 경계 지역에 있다. 고대부터 주요 도시였던 파에스툼(Paestum)과 벨리아(Velia)의 유적도 이곳에서 발견되어 고대에 이루어진 문화 교류를 증언하고 있다.

  치렌토 지역은 선사시대와 중세에 동서로 뻗어 있는 산맥의 등성이를 이용하여 보기 드문 방식으로 문화・정치・상업이 교류한 교통로였다. 아드리아 해와 티레니아 해 사이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던 치렌토는 우수한 문화 경관을 보여 주고 있다. 치렌토 국립공원은 본래 티레니아 해로 흘러 내려가는 강들 중 몇 개의 계곡에 의해 갈라진 산악 지역이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250,000년 전 최초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해안가 동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중석기시대에는 이 지역으로 네안데르탈 인들이 들어와 여러 곳에서 무스테리안(Mousterian)기의 가공 유물을 남겼다. 네안데르탈 인에 이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가 초기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에 계절에 따라 이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토양과 기후가 좋아 신석기시대에 정착 농경이 도입되었다. 리파리 제도[Lipari Islands]에서 발견된 흑요석을 통해 이즈음 해상 무역이 시작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루카니아 해안을 따라 비교적 좋은 항구들에서 이런 무역이 촉진되었고, 강의 계곡을 따라 지형적으로 교통로가 생긴 것임이 분명하다. 신석기 주거지는 국립공원 지역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가우도 문화[Gaudo Culture]는 보다 진보한 지중해 문화가 이탈리아 반도로 진입하는 데 있어서의 치렌토가 어떤 특별한 역할을 했는지 정의하는데 도움을 준다. 가우도 문화는 루카니아와 칼라브리아를 넘어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신석기 문화이다. 청동기 및 철기시대에 소규모 집단의 전사들과 상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이에 대응하여 흩어져 있던 이 지역 사람들이 스스로 큰 민족 집단을 형성하여 최초의 도시형 사회 경제 구조가 만들어졌다. 북부에서 소개된 이동식 유목이 기원전 제2천년기 초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인간의 주거에 특히 내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기원전 제2천년기 말에 미케네와의 무역이 늘어나고, 청동기 말의 세련된 문화와 기술이 그리스에 소개되었다. 미케네의 붕괴로 동지중해와의 무역이 크게 쇠퇴하면서 반도 안에서의 무역이 활발해져 치렌토도 역시 북부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 문화와 중요한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기원전 9~기원전 7세기에 볼로냐 지방으로부터 전사 계급 사회, 즉 빌라노반 문화가 들어와 퍼졌으며 여러 가지 경관에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스 식민지 건설이 기원전 7세기 말에 시작되어 치렌토 북부의 아그로폴리(Agropoli)와 ‘포세이돈의 도시’, 즉 로마의 파에스툼에 해안 무역 거주지가 세워졌다. 엘레아(Elea; Velia)는 기원전 540년에 세워져 고대 세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교육 중심지가 되었다. 정신세계의 독자성과 영원성을 토대로 한 엘레아 학파는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of Colophon]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후에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와 제논이 이끌어 갔다. 특히 천문학과 의학에 있어 경험적 방법의 발달로 유명하다. 기원전 5세기 말에 그리스 생활양식을 따르던 힉소스 왕이 이끄는 내륙의 루카니아 인이 엘레아를 제외하고 그리스의 해안 도시 동맹을 무너뜨렸다. 이때 엘레아는 지중해를 둘러싼 다른 그리스 식민지들과 상업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제외하였다. 새로운 도시 문화가 성장하고 새로운 마을들이 많이 건설되었으며, 넓은 삼림 지역은 농경을 목적으로 또는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를 심기 위해 벌목되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 3세기 말엽에 로마의 영토로 어쩔 수 없이 합병되었다. 치렌토를 가로지르던 고대의 도로 체계를 밀어 내고 로마 인들은 주요 도로망을 건설하였고, 그 결과 내륙의 도시들은 그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서로마제국이 약화되고 도로와 다리가 파손되고 나서야 이전의 소통 체계와 주거지가 다시 그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중세의 봉건시대의 성과 종교의 토대가 세워지고 이전 로마의 테두리 안에서 그리스와 루카니아 인 마을이 다시 살아나면서 그 경관이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고고학적 유적지는 그리스 도시인 ‘포세이돈의 도시’ 파에스툼 유적지이다. 도시의 성곽 안쪽에 남북으로 난 거리 카르도 막시무스(Cardo Maximus)와 ‘신성한 길[Sacred Way]’ 사이에는 특별한 공공건물들이 다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헤라(Hera) 신전, 케레스(Ceres) 신전, 포세이돈(Poseidon) 신전이다. 그 중 헤라 신전이 가장 오래되었고, 이곳의 다른 신전들처럼 도리아 양식이다. 케레스 신전은[아마도 아테나에게 헌납된] 기원전 500년경에 건설되었다. 파에스툼 신전의 규모는 가장 작지만 공간 사용과 비율은 헤라 신전보다 더 탁월하다. 포세이돈 신전의 건축가는 기원전 5세기 중반부터 아테네에 있는 포세이돈 신전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의 아고라 위쪽에 지어진 로마의 광장 유적지가 발굴되었으며 현재 전시 중이다. 이 널찍한 노천 공간은 회의실[bouleuterion], 법정[curia], 그리고 지붕 있는 시장[macellum]으로 밝혀진 공공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엘레아[벨리아]에는 별로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웅장한 로사 문[Porta Rosa]이며, 그리스의 아치형 문으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벽한 예이다. 다른 볼 만한 것들 중에는 기원전 6세기부터 있었던 아크로폴리스의 위풍당당한 방어벽과 아름답게 포장된 도로와 몇 개의 신전 유적지가 있다. 포카이아 인들이 해안 지역을 버리고 떠나자 벨리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내륙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였다. 노비 벨리아(Novi Velia)는 치렌토 중세 마을의 전형으로서 구릉의 꼭대기에 전략적인 방어 지역과 산등성이를 따라 고대의 교통로에 건설되었다. 집들은 중앙의 성이나 망루 주변으로 모여 있으며, 다른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교회와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 건물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발로 디 디아노의 파둘라(Padula)에 있는 체르토사 디 산로렌초(Certosa di San Lorenzo) 수도원이다. 1306년에 건립되기 시작했지만 현재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바로크 양식으로서 17, 18세기에 지어졌다.

세계문화유산(357)/ 이탈리아

 

폼페이·헤르쿨라네움·토레안눈치아타 고고 지구(Archaeological Areas of Pompeii, Herculaneum and Torre Annunziata; 1997)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로마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 폼페이(Pompeii)와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 그리고 이 지역의 많은 주택들이 화산재에 묻혀버렸다. 캄파니아(Campania) 주 나폴리 현[Province of Naples]에 속하는 이 지역은 18세기 중반부터 발굴되기 시작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상업 도시 폼페이의 광막한 공간은 폼페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보존 상태가 좋은 휴양지 헤르쿨라네움의 유적과 대비를 이룬다. 한편 토레 안눈치아타(Torre Annunziata)의 오플론티스(Oplontis) 저택의 벽화는 초기 로마제국의 부유한 시민들이 향유한 호사스러운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지역 주택과 마을의 인상적인 유적은 땅속에 묻혀 버렸다. 발굴된 이 유적은 마치 특정 순간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은 듯 그 순간의 일상생활과 사회를 완벽하고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현장성 있는 유적이다. 폼페이는 기원전 6세기의 오피시아(Opicia)를 기반으로 한다. 역사가인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헤라클레스가 고대 도시인 헤르쿨라네움을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두 곳 모두 다음 몇 세기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오스칸・삼니움・그리스・에트루리아의 동맹 도시를 거쳤고, 마침내 기원전 89년, 동맹시 전쟁(同盟市戰爭; Social War) 끝에 로마의 동맹 도시가 되었다. 바로 이 해에 폼페이는 콜로니아 코르넬리아 베네라 폼페이아나(Colonia Cornelia Venera Pompeiana; 시민권이 부여된 로마의 정식 공동체 도시)로 격상되었다. 반면 헤르쿨라네움은 그보다 격이 낮은 자치 도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지진 복구를 위한 재건 작업이 한창이던 두 도시는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폼페이는 화산재와 바위에 묻혔고, 헤르쿨라네움은 화쇄암과 흙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파묻힌 두 도시가 발견된 18세기 이후, 헤르쿨라네움보다는 폼페이의 유적이 더 많이 발굴되었다. 주 광장 양 옆으로는 카피톨리움(Capitolium; 세 주신인 주피터・주노・미네르바를 모시는 신전), 바실리카[재판정], 공중목욕탕의 유구와 같은 인상적인 공공건물들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오래된 삼각형 포럼(forum)에 2개의 극장이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 그리스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뒤에 로마 인의 취향에 맞게 개조된 것이다. 눈에 띄는 다른 공공건물로는 보존 상태가 훌륭한 기원전 2세기의 스타비안 목욕탕[Stabian Baths]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폼페이는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자리 잡고 있는 여러 주택들이 유명하다. 먼저 중앙에 안뜰이 있는 홀을 가진 아트리움 주택을 들 수 있는데 ‘외과 의사의 집[House of the Surgeon]’으로 이름 붙여진 집이 바로 이러한 양식의 좋은 예이다.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주택은 규모가 커지고 원주와 아케이드로 장식되었으며, 사교 모임을 위한 사회적 기능이 있는 큰 방들을 갖추었다. 로마 제국의 모든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주택 양식은 극단적으로 수많은 방이 있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제대로 갖춘 궁전과 같은 저택으로 발전했다. 파우누스 저택[Houses of the Faun] 그리고 ‘정숙한 연인의 집’이라 불리는 곳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폼페이에서 가장 이례적인 주택은 ‘수수께끼의 집’이라 불리는 곳일 것이다. 성 밖에 있는 이 커다란 시설물은 기원전 3세기에 지어진 소박한 타운하우스가 발전한 것으로 확연하게 눈에 띄는 트리클리니움(triclinium) 방의 (수수께끼로 가득 찬) 벽화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벽화에는 디오니소스 숭배를 위한 입회 의식이 묘사되어 있다. 폼페이의 또 한 가지 특성은 벽에 새겨진 수많은 낙서이다. 선거철이 다가올 무렵 화산이 폭발했기 때문에 벽에는 수많은 구호가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이고 상스러운 낙서도 있다. 나폴리 만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유적은 깊숙이 묻혀 있기 때문에 그 규모가 폼페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도시를 덮은 화산재의 특성 때문에 보존 상태는 더 좋은 편이다. 나무와 같은 유기물은 그대로 제자리에 있으며 많은 건물들의 2층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몇몇 인상적인 공공건물 또한 잘 보존되어 있다. 기념문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는 널따란 소운동장[palaestra], 그 크기와 활기찬 장식이 기념비적인 도시형 목욕탕을 비롯한 두 곳의 공중목욕탕, 아우구스투스의 성직자 학교, 전형적인 극장 한 곳 등이다. 주택들 또한 그 크기와 장식이 눈에 띄는데 ‘200주년을 기리는 집’이라 불리는 곳이 대표적이다. ‘사슴의 집’처럼 바다 앞쪽에 있는 주택들은 넓은 뜰과 호사스러운 장식을 자랑한다. 완벽한 상점 때문에 상가 역시 주목할 만하며, 포도주 병과 같이 생긴 수많은 그릇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최근의 항구 지역 발굴 과정에서, 재난을 피하려다 결국은 질식해 목숨을 잃은 불행한 시민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창고가 발견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모두 조각, 모자이크, 무엇보다도 벽화를 통해 그 예술 양식을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356)/ 이탈리아

 

포르토베네레, 친퀘 테레와 섬들[Portovenere, Cinque Terre, and the Islands(Palmaria, Tino and Tinetto); 1997]

 

 

 

 

 

 

 

 

 

 

 

 

 

 

 

 

 

 

 

 

 

 

 

 

 

 

 

 

 

 

 

  친퀘 테레(Cinque Terre)와 포르토 베네레(Porto venere) 사이의 리구리아 주[Liguria Region] 라스페치아 지방[Province of La Spezia]에 속하는 리구리아 해안[Ligurian coast]은 아름다운 풍경과 문화 유적을 지닌 문화경관이다. 가파르고 척박한 토양을 극복하며 작은 마을들이 모여 이루어 낸 주변 경관들이 과거 1,000년을 이어 이 지역에 뿌리 내리며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친퀘 테레와 포르토 베네레 사이에 있는 동부의 리구리아 리비에라(Ligurian Riviera) 해안은 탁월한 가치를 지닌 문화 유적지이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울려 보기 드문 멋진 경관을 자아내는 이곳은 1,000년 동안 존속해 온 전통적 삶의 방식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 지역의 삶에 중요한 사회 경제적 역할을 지속하고 있다. 유적지는 리구리아 극동 해안을 따라 약 15㎞에 걸쳐 레반토(Levanto)와 라 스페치아(La Spezia) 사이에 있다. 해안의 지형은 매우 들쭉날쭉한 절벽이지만 1,000년에 걸친 인간의 집약적인 노력으로 계단식 모양의 마을을 이루었으며, 얼마 안 되는 땅이지만 농경에 알맞은 곳에서는 포도와 올리브 등의 과수 농업을 하며 살아왔다. 절벽 위에 옹기종기 집을 짓고 구불구불한 길을 낸 모습을 보면 한눈에 봐도 이곳의 사람들이 거칠고 살기 힘든 자연에 적응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자연석 그대로를 기반으로 마을을 조성한 모습이 특징적이다. 집들은 주로 교회와 중세의 성채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 작은 항구들은 다른 전통 생활인 어업용 배들의 정박지이다. 친퀘 테레 다섯 마을[유명한 포도주 이름이며, 1973년에 명명되었으나 이 이름은 일찌감치 15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의 역사는 중세 말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들끼리 닮은 점들이 있지만, 각 마을 특유의 사회 경제적 특징도 가지고 있다. 친퀘 테레 경관의 특징이 되는 계단식 경작지는 길이가 12㎞나 되는 곳도 있는데 대부분 12세기에 바다를 건너온 사라센의 습격이 끝난 무렵에 만들어졌다. 마을은 사암 블록으로 조심스럽게 돌담을 쌓고, 해변의 자갈들로 이어 붙였다. 포도밭의 헥타르 당 130㎥의 벽과 올리브나무 밭의 헥타르당 300㎥의 벽은 현재 재건축이 시급하다. 북쪽에서부터 보면 첫 번째 마을은 요새화된 중심지인 몬테로소 알 마레(Monterosso al Mare) 마을이다. 성 크리스토퍼 언덕[St Christopher’s hill] 위에 있으며, 17세기 롬바르드 족의 침략이 있던 시기에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세시대에 여러 귀족 가문들이 이 마을을 두고 분쟁을 벌인 끝에 결국 제노바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계곡에 자리 잡은 이 해안 마을의 가장 유명한 요소로는 1244년에 지어진 세인트존 교회당[원래 망루로 쓰였던 종루가 딸려 있다], 옛 성채 유적지,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17세기의 카푸친 수도원[Capuchin monastery] 등이다. 베르나차(Vernazza) 마을은 1000년에 레기오(Reggio) 언덕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1276년에 제노바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집들은 베르나차 개울을 따라 바다 쪽으로 돌출해 있는 절벽 위에 있어 바다 쪽에서 다가가면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좁은 골목길이 큰길까지 아래로 이어져 있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광장으로 연결된다. 여기에는 리구리아의 고딕 양식을 보여 주는 대표적 건축물인 성 마가레트 안티오키아 교회[St Margaret of Antioch]가 있다. 코르닐리아(Corniglia) 마을은 유일하게 해안이 아니라 곶의 높은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성 피터 교회(1334)가 가장 높이 솟아 있으며,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볼라스트라(Volastra) 산악 마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건설한 작은 마나롤라(Manarola) 마을이 있다. 집들의 일부는 바다 쪽으로 내려가는 바위 절벽 위에 모여 있고, 일부는 그라파 개울을 따라 줄지어 있다. 이곳의 교회 건물들은 모두 14세기의 것이다. 가장 남쪽의 리오마조레(Riomaggiore) 마을은 중세에 건설된 또 하나의 마을이다. 집들은 마조레 개울[지금은 복개되어 있다]을 따라 줄지어 있다. 이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는 세인트존 침례교회[St John the Baptist; 1340]와 1260년에 건설되기 시작한 성채가 있다. 포르토 베네레는 중요한 문화 중심지였다. 바리그나노(Varignano) 해안에 있는 로마식 대저택과 아르파이아(Arpaia) 바위 절벽 위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원(Benedictine monastery)도 유적지에 포함된다. 이 수도원은 성 피터에게 봉헌된 것으로 원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였다. 성채 아래 마을에는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아울러 보여 주는 또 하나의 교회가 있는데 성 로렌스[St Lawrence]에게 헌납된 교회이다. 로마 시대에 건설된 포르투스 베네리스(Portus Veneris) 마을은 1113년에 제노바 사람들이 점령하였다. 집들이 조밀하게 모여 있는 마을은 12~16세기에 지어진 도리아 양식의 성채에서 정점에 달하고 있다. 이 성채는 정착지를 지배하는 역할을 했으며 이곳은 중세 이전의 흔적이 담겨 있는 역사적인 펠렘세스트(palimpsest; 건축에서 ‘오래된 도시’를 뜻함)이다. 팔마리아(Palmaria)・티노(Tino)・티네토(Tinetto) 등 포르토 베네레 연안의 3개 섬들은 그 천연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섬에 있는 초기 수도원 유적지로 주목할 만하다. 파나리아와 티노는 라스페치아 만에 있는 나토 기지와 가까이 있어 군사적으로 전략적 기능을 하고 있다. 접근하기가 어렵기 때문에[티네만 1년에 1번씩 들어갈 수 있다] 자연 환경이 특히 잘 보호되어 있다. 이 지역의 절경은 많은 작가들과 음악가들을 매료시켰다. 그들 중에는 이탈리아의 미술가와 작가들 외에도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퍼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와 바이런 경[Lord Byron],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 독일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등이 있다. 이 지역은 바다로 가는 길 외에는 거의 접근이 불가능했으나 1870년에 제노바-라 스페치아(Genoa-La Spezia) 철도가 건설되어 모든 마을과 포르토 베네레가 연결되었다. 이와 동시에 라 스페치아에 무기 공장이 건설되어 지역 주민들에게 또 다른 일터를 제공하였다. 이때부터 친퀘 테레포르토 베네레의 사회 경제적 생활 기반에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곳의 동물상과 식물상도 흥미롭다. 내건성 왜소식물[natural garrigue; 耐乾性 矮小植生]과 마키(maquis)가 가파른 산등성의 높은 곳에 자생하고 있다. 유기된 계단식 경작지의 지역에서는 여러 식물들이 어우러져 예외적이면서도 질적으로도 우수한 식물상을 보여주고 있다. 독특한 자연 지형과 초목은 이곳의 수많은 야생동물과 곤충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있으며 은신처가 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355)/ 이탈리아

 

파도바 식물원[Botanical Garden(Orto Botanico), Padua; 1997]

 

 

 

 

 

 

 

 

 

 

 

 

 

 

 

 

 

 

   베네토 주[Veneto Region] 파도바 시[City and Province of Padova]에 속하는 파도바 식물원은 1545년에 파도바(Padua, Padova)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식물원이다. 식물원 가운데에는 세계를 상징하는 원 모양의 작은 땅이 있고, 그 주변을 호수가 에워싸고 있는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훗날 입구와 난간 장식 등의 건축적인 요소와 펌프, 온실 등 실용적인 요소가 추가되었다. 이곳은 과학 연구 센터라는 애초의 기능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당시의 건축 배치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파도바 식물원은 전 세계를 통틀어 최초로 생긴 식물원이다. 또 과학의 생성과 교류, 자연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대표하는 곳이다. 식물원은 식물학, 의약, 화학, 생태학, 약학을 중심으로 수많은 현대 과학 분야에 큰 기여를 했다. 식물원이 만들어진 1222년부터 식물학 및 의약 분야의 많은 저명한 학자들이 파도바대학에서 연구해 왔다. 1223년 이곳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자연 과학의 수호성인이 된 알베르토 마그노(Alberto Magno; 1193 또는 1206~1622)를 중심으로 피에트로 다바노(Pietro d'Abano; 1250~1316), 자코모 오롤로조(Giacomo Dondi Orologio; 1298~1360), 도메니코 세노(Domenico Senno; 1461~1531)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1553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 대학의 약초학 강좌 교수로 프란체스코 보나파데(Francesco Bonafede; 1474~1558)를 임명했다. 그는 1543년 식물 표본실과 식물원을 만들 것을 청원했고, 1545년 6월 29일의 베네치아 공화국 칙령에 따라 식물원이 지어졌다. 베네딕트회의 결정에 따라 수도사들이 이미 약용 식물을 재배했던 장소에서 즉시 작업이 시작되었다. 비트루비우스(Vitruvius)의 <건축 십서(De architectura)>를 번역한 다니엘레 바르바로(Daniele Barbaro)가 이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았다. 식물원은 창립 이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중간에 많은 시설이 추가되었는데 17세기에는 10개의 분수에 물을 공급하는 펌프, 1704년에는 4개의 기념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는 새로운 석조 온실이 지어졌다. 이 시기를 전후해 좁고 꼬불꼬불한 길이 특징인 영국식 정원인 수목원[arboretum]과 야트막한 전망 언덕[Belvedere]이 증설되었다. 바르바로는 22,000㎡의 부지에 대양을 의미하는 호수를 고리처럼 둘러싸서 작은 파라다이스로 조성하려고 계획했다. 그는 41m의 사각형 부지를 둘러싼 지름 86m 짜리 원 모양의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hortus conclusus]을 계획했다. 식물원 전체는 각 방위를 향해 직각으로 뻗은 좁은 4개의 길로 나누어져 있다. 초기 자료에 따르면 식물원은 높은 벽돌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고, 중앙 광장을 가로지르는 2개의 좁은 길에 조성된 4개의 작은 광장은 돌로 경계를 만든 꽃밭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각 장소에는 단일 식물종이 재배된 것이 특징이다. 많은 구조물이 나중에 추가로 설치되었지만 현재까지도 기본적인 배치 형태는 남아 있다. 1704년, 4개의 출입구를 다시 단장하면서 내부를 순환하는 길에 연철 문을 설치했다. 또 8개의 기둥에 조상대(彫像臺)를 설치해 그 위에 연철로 만든 4쌍의 식물[패모, 파인애플, 백합, 유카]을 올려놓았다.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와 솔로몬(Solomon)을 재현한 식물원 밖의 이스트리아 양식 석조 분수 또한 같은 시기에 조성됐다. 그리고 전체 250m에 달하는 벽의 상단을 따라 이어진 우아한 난간 또한 18세기 전반기에 완공되었다. 겨울 날씨에 민감한 식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던 이동식 온실은 구워서 열처리한 석재로 만든 온실로 대체되었으며, 새 온실은 남쪽에 자리 잡았다. 식물원에는 또한 2가지 중요한 수집품이 보유된 공간이 있다. 하나는 역사적・서지학적으로 중요한 5만 권이 넘는 책과 필사본이 있는 도서관이고, 또 하나는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방대한 식물 표본실이다. 식물원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도입된 아주 희귀한 식물을 수집해 재배해 왔다. 현재 6,000종의 식물이 체계적이고 실용적인 기준별[약용식물, 에센스 추출 식물 등], 그리고 식생 환경 기준별[토탄 습지 식물, 지중해의 관목식물군, 고산식물 등]로 배치되어 있다. 또한 테마별[식충식물, 다육식물, 수생식물, 독초 등], 단일종별[버드나무속, 알리움속, 오르니토칼룸속, 쑥부쟁이속, 초롱꽃목 등]로 구분되어 있다. 식물원은 특히 희귀식물과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을 성공적으로 키워 내고 있다.

세계문화유산(354)/ 이탈리아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Costiera Amalfitana; 1997)

 

 

 

 

 

 

 

 

 

 

 

 

 

 

 

 

 

 

 

 

 

 

 

 

 

 

 

 

 

 

 

 

   캄파니아(Campania) 주 살레르노[Province of Salerno]에 속하는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Costiera Amalfitana; 아말피 연안)는 뛰어난 경치와 생물의 다양성을 지닌 곳이다. 중세 초기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아말피와 라벨로 마을처럼 중요한 건축물과 예술 작품이 있는 마을들도 많이 있다. 이 지역 농촌 사람들은 저지대 비탈의 계단식 포도밭과 과수원에서부터 고지대 넓은 목초지까지 특유의 다양한 지형적 특성에 적응하여 토지를 지혜롭게 이용하였다.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는 뛰어난 지중해 풍경을 보여 주는 곳으로 척박한 지형을 이겨낸 자연 경관과 역사적 발달에 따라 만들어진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포시타노의 산타마리아 교회의 벽에는 이름 모를 화가가 물고기를 잡는 여우 그림을 새겨놓았다. 이 그림은 아말피 해안을 상징하며 동시에 아말피의 두 가지 경관 요소인 ‘바다와 산의 변치 않는 관계’에 대해 설명해준다. 이 유산은 살레르노 지방에 11,231㏊에 걸쳐 있으며 총 15(16?)개의 거주 구역이 포함되어 있다. 피첸티니 언덕[Picentini hills]에서 티레니아 해[Tyrrhenian Sea]까지 뻗어 있는 라타리(Lattari) 언덕에 의해 형성된 반도의 남쪽 경사면이 자연적 경계를 이루면서 나폴리(Naples) 만과 살레르노(Salerno) 만을 갈라놓는다. 행정상으로는 페니솔라 아말피타나의 일부이며, 거의 정확하게는 고대 아말피 공화국의 영토에 해당한다. 아말피(Amalfi)아트라니(Atrani)레기나 마이오르(Reginna Maior)레기나 미노르(Reginna Minor) 등 4개의 쭉 뻗은 주요 해안과 포시타노(Positano)프라이아노(Praiano)세르타리아(Certaria)헤르클레(Hercle) 등 몇 개의 군소 해안, 그리고 스칼라(Scala)트라몬티(Tramonti)라벨로(Ravello)라는 산악 마을과 그 뒤로 콘카(Conca)와 푸로레(Furore)라는 아주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 구석기와 중석기시대의 유물들이 포시타노에서 발견되었으며, 포시타노미노리갈로 룽고의 저택들에서 보듯이 이 지역은 로마 인들이 선호한 장소였다. 그러나 중세 초기에 이르러서야 고트 족의 전쟁으로 이 지역이 피난처가 되면서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아말피는 기원후 4세기에 형성되었다. 가까운 루카니아에 새로운 로마 식민지가 건설되어 이방인들의 습격을 받아 주민들은 현재의 스칼라 지역 주변의 비옥하고 물이 충분한 지역으로 이동해 갔다. 아말피에 관한 첫 번째 기록(596)에 따르면 그곳은 이미 요새화된 마을이며 주교의 관할 구였다. 838년까지 롬바르드 족의 습격에 저항하였으나 결국 정복당하여 시카르도(Sicardo)의 약탈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그 다음 해에 단지 명목상 비잔티움 제국에 속해있던 이 마을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958년경 총독의 칭호를 받은 한 통치자가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고 통치를 하였다. 아말피는 이런 자율 정치 덕분에 9세기 초와 11세기 말 사이에 해상 무역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는데 이 당시 비잔티움의 해상 세력이 쇠퇴하면서 아말피의 자유 시장이 발달한 것이다. 아말피는 광범위한 교류로 티레니아 해에서 거의 독점 무역을 하면서 이탈리아의 상품들[목재, 철, 무기, 포도주, 과일]을 동양의 시장에 내다팔았고, 그것으로 향신료향수진주보석직물카펫을 사들여 서양에 팔았다. 발전된 문화는 그 중에서도 해상법과 동양과 긴밀하게 연결되던 항해법[항해용 나침반이 아말피에서 발명되었다]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거주지의 배치를 보면 동양의 영향을 받을 것을 알 수 있다. 가파른 비탈면을 따라 올라가면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골목과 층계는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어 레반트의 시장을 연상시킨다. 독특한 아랍 양식의 시칠리아 건축물이 아말피에서 시작되고 발전하였다. 동양과 교류하면서 석공제지제혁양잠과 견직, 그리고 여러 가지 색채의 유약을 바른 도자기 제작 기술 등 새롭고 발전된 기술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양모를 방적하여 이탈리아 전역에 수출하기도 하였으며, 산호를 이용하여 사치품을 만들고 파스타 요리도 세련되어졌다. 다른 해상도시인 제노바베네치아특히 피사가 융성하기 시작하면서 아말피는 무역에서 힘을 잃었고, 스페인에 정복당하면서 계속 쇠퇴하여 갔다. 단 하나의 의미 있는 변화는 해안을 따라 망루 체계가 강화되어 투르크의 공격에 대비한 경보와 보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말피 해안의 마을들은 기념비적 건축물이 많다. 세타라에 있는 토레 사라체나, 동양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말피 대성당과 ‘파라다이스 수도원[Cloister of Paradise]’, 아말피의 총독이 선출되었던 아트라니에 있는 산 살바토레 데 비레토 교회[Church of San Salvatore de’Birecto], 멋있는 성당과 아주 훌륭한 저택 루폴로가 딸린 라벨로가 있다. 코스티에라는 르네상스 시대에 호화 여행을 따라온 고급 귀족부터 지난 20세기의 수천 명의 평범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많은 문인 방문객들은 이곳의 뛰어난 절경을 칭송하는 글을 썼으며, 예술가들이 대를 이어가며 여러 가지 매체를 이용하여 이곳의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이곳의 훌륭한 건축물과 황홀한 그로타 델라 스메랄도 동굴, 푸로레의 깊은 피요르 계곡, 여러 갈래의 해변이 보여 주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내륙으로 가면 해안으로부터 가파르게 솟아오른 비탈면에 돌담을 쌓아 경계를 만든 계단식 경작지가 있다. 이곳에서는 감귤이나 다른 과일, 올리브, 포도, 온갖 종류의 채소가 재배된다. 내륙으로 좀 더 들어간 산비탈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낙농업 지대로 양, 염소, 소, 물소를 기르고 있다. 코스티에라의 일부 지역은 거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고 온전히 유지되어 있다. 그래서 머틀(myrtle)유향나무[lentisk; mastic]로뎀나무[broom]대극과[euphorbia] 식물 등의 전통적인 지중해성 식생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 밖에 털가시나무[holm oak]오리나무[alder]너도밤나무[beech]밤나무[chestnut] 등이 자란다. 기타 작은 관목으로는 범열대성 양치식물[pantropical fern]벌레잡이제비꽃[butterwort]난쟁이종려나무[dwarf palm], 그리고 고유종 식충식물이 있으며, 이 지역은 바다와 접해 있는데다 지형이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이처럼 매우 다양한 식생이 분포하였다. 이러한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3개의 보호구역이 생겨났다. 코스티에라에는 야생동물들도 다양하다. 갈가마귀와 송골매가 서식하고, 여우담비수달도 살고 있다. 곤충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여 이 지역이 다양한 생물의 서식지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악 지대로 높이 올라가면 이 지역 특유의 ‘노새 길[mulattiere]’이 주목할 만하다. 이 길은 흩어져 있는 마을들 사이의 교통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빗물을 모아 흐르게 하는 수로가 되기도 하였다. 아말피 공화국이 쇠퇴하고 난 후에는 밀수업자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작은 개울들이 여러 개 있어 장소에 따라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장관도 볼 수 있다. 이 개울들은 초기의 종이와 철공장에 전력을 공급하였고, 그 유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해안 마을에서부터 빽빽하게 경작지를 일군 낮은 비탈과 넓게 펼쳐진 목초지를 지나 인상적인 높은 산악 지대까지 한없이 다양한 풍경이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형과 기후로 인해 과학적 관심을 모으는 ‘미시 경관[micro-landscapes]’과 해수면과 지상의 석회석 카르스트 지형의 자연적 형성물도 눈에 띈다.

세계문화유산(353)/ 이탈리아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Villa Romana del Casale; 1997)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는 행정구역상 시칠리아[Sicily] 엔나 주[Province of Enna] 피아차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에 속한다. 로마의 지방 지역 개발은 시칠리아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로 상징된다. 서로마 제국의 지방 경제의 근간은 빌라 로마나와 같은 대규모 사유지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빌라 로마나는 이런 종류의 저택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게 건축된 것으로 거의 모든 내부를 풍부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하고 있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모자이크 장식은 로마 제국 모자이크 중에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아르메리나 광장에 있는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는 화려한 로마 저택의 탁월한 본보기로서 그 시대의 사회 경제 구조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저택에 장식되어 있는 모자이크는 규모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우수하고 독창적이다. 빈약한 증거에 의한 것이지만 농장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초기의 시골 주거지에 로마 저택이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방향은 별장의 목욕탕 방향과 같았고, 토대는 별장의 일부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저택 부지의 초기 단계에 목욕탕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곳이 부유한 소작인이나 부유한 지주의 집사가 거주했다고 짐작된다.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세기 말엽)의 것으로 추정되며, 집주인의 가족을 그린 것 같은 2개의 초상화가 발견되었다. 초기 이 집의 지질 층위를 분석해보면 1세기부터 3세기 말 사분 통치(四分統治; Tetrarchy) 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시칠리아의 역사에 있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기로서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던 전통적 라티푼디움(latifundium; 장원) 제도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이전의 가옥은 4세기 초 10년간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시기에는 아마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막시미아누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의 소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로마 군인 출신으로 장군이 된 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의 신임을 받아 황제의 지위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310년에 막시미아누스가 잔인한 죽음을 당하자 그의 아들이자 황제의 친구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entius)에게 권위를 물려주었고, 그는 312년에 로마의 밀비아 다리[Milvian Bridge] 전투에서 콘스탄니누스 대제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가옥이 붕괴된 자리에 310~340년에 건물이 다시 건설되었다. 다시 세워진 건축물이 매우 웅장하고 호화로운 점을 감안하면 영토를 가진 사람은 로마의 통치자가 아니라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고, 그의 명령으로 이 저택이 건설된 듯하다. 9세기에 아랍의 습격이 있기까지 이곳에는 사람이 살았으나 점점 상태가 악화되어 갔다. 1155년경 무렵 시칠리아의 노르만 족 통치자인 폭군 윌리엄 1세에 의해서 마지막으로 파괴되었다. 저택이라기보다는 ‘궁전’과 같은 가치를 지닌 이 건축물은 로마 저택의 전통에 따라 설계되었지만 크기와 화려함에 있어서는 로마 제국 저택과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수준이다. 발굴된 면적은 일부에 불과하였는데도 약 4,000㎡에 이르며, 총 4개의 구역[방으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바닥은 모두 최고급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저택은 지형에 따라 층층이 건축되었다. 첫 번째 구역은 다음과 같다. 기념비적인 입구는 안뜰로 통하고, 안뜰은 공들여 세심하게 만든 욕실과 직면하고 있다. 타원형의 팔라스트라(palaestra; 그리스 식 체력 단련장)은 인상적인 팔각형의 냉욕장[frigidarium]으로 통하며 거기에서 다시 미온 욕실[tepidarium]로 이어지고, 그 바깥에는 3개의 노천 온탕[caldaria]이 있다. 두 번째 구역은 강한 인상을 주는 페리스틸륨(peristyle)이다. 페리스틸륨에는 중앙에 분수가 있고 페리스틸륨에서 바로 방들로 연결된다. 한쪽에 작은 신전이 있다. 남쪽으로 세 번째 구역에는 타원형의 페리스틸륨으로 둘러싸여 있다. 널찍한 식당은 삼면에 반원형 공간이 있고 신화의 여러 장면들이 묘사된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그 중에 헤라클레스의 모험이 묘사된 그림이 특별히 눈에 띈다. 네 번째 구역은 중심 페리스틸륨의 동쪽에 있으며, 사냥 장면이 장식된 긴 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이 지역에는 가장 섬세하고 가장 유명하다고 할 만한 모자이크화가 바닥에 깔려 있으며, 중앙에서 지휘를 하는 주인과 그 부하들이 아프리카의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구역에 있는 큰 연회장인 바실리카의 바닥은 모자이크라기보다는 대리석으로 깔려 있다. 이 구역의 작은 개인 방들에는 대부분 좀 더 평화롭고 가정적인 활동을 묘사하는 모자이크화가 바닥에 깔려 있다. 모자이크 중에 오늘날의 비키니와 매우 비슷한 옷을 입고 운동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특히 유명하다. 모자이크들은 카살레 빌라 로마나의 자랑거리이다. 이 시기의 모자이크는 모자이크 예술이 가장 발전된 시기의 것으로 작업의 질과 묘사하는 장면으로 판단할 때 북아프리카의 예술가들의 작품일 것으로 보인다. 양식으로 미루어보아 최소한 2명의 모자이크 장인이 이 저택에서 작업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1명은 주로 신화의 장면에 더 고전적인 양식으로 일을 하고, 또 1명은 그 당시의 생활 장면을 담은 더 현실적인 접근 양식을 사용하여 작업한 것으로 생각된다. 모자이크의 주제는 신화, 사냥 장면, 식물, 동물, 집안에서의 생활 모습 등 매우 다양하고 폭넓다. 저택의 기둥과 벽도 회반죽으로 안팎을 장식하였으며 많은 부분이 아직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352)/ 이탈리아

 

아그리젠토 고고 지구(Archaeological Area of Agrigento; 1997)

 

 

 

 

 

 

 

 

 

 

 

 

 

 

 

 

 

 

 

 

 

 

 

 

 

 

 

 

 

 

 

 

 

 

 

 

 

 

 

 

 

   시칠리아 주[Sicily] 아그리젠토 시[Province of Agrigento]에 속한 아그리젠토(Agrigento)는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식민지로 건설된 후 지중해에서 가장 주도적인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웅장한 도리아 양식 신전에는 고대 도시를 지배한 그리스의 자부심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발굴된 유적을 통해 후기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의 도시 생활, 초기 기독교인들의 매장 풍습을 볼 수 있다. 유적의 지역이 평야와 과수원으로 덮여 오늘날에도 많은 유적들이 손상 없이 보존되어 있다.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 중의 하나인 아그리젠토의 유적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 웅장하게 늘어선 도리아 양식 사원은 그리스 예술과 문화를 가장 잘 보여 주는 탁월한 기념물 중 하나이다. 구전에 따르면 시칠리아 젤라(Gela)의 식민지 로데스(Rhodes)와 크레테(Crete)에서 온 이주자들이 그리스 도시 아크라가스(Akragas; 아그리젠트의 그리스 지명)를 건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발굴 조사 결과 기원전 7세기에 해안 언덕 사면에 초기의 그리스 정착지가 조성됐다고 한다. 이 전통 주거지는 그 입지 조건에 힘입어 (현재는 현대적인 도시들에 의해 대체된) 초기 아크로폴리스에서 6세기 식민화 이후 짧은 기간에 확장과 번성이 가능했던 것이다(기원전 570~기원전 550). 팔라리스 군주 치하에서 침입이 어렵도록 지세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성벽을 구축했다. 이 시기에 신전의 계곡 남서면에 ‘지하의 신들을 위한 신전[Chthonic temples]’이라 불리는 신전들이 건설되었다. 아크라가스의 정치적 확장은 팔라리스 시대에 시작됐으며, 테로(Thero) 군주의 지배(기원전 488~기원전 473) 동안 절정을 맞았다. 기원전 480년 이후, 히메라(Himera)에서 카르타고를 무찌른 이후 그는 시칠리아 북쪽 및 동쪽 해안으로 지배권을 넓혔다. 이로 인해 도시와 문화가 풍성해졌으며 이는 당시 언덕 남단에 지어진 거대 사원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을 받은 인물 중 하나는 철학자, 의사, 음악가였던 엠페도클레스(Empedocles)였다. 기원전 5세기 말에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됐으며, 도시는 비록 시라쿠사와 경쟁을 하기는 했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평화를 구가했다. 그러나 기원전 406년, 카르타고의 공격과 약탈로 인해 평화는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이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함으로써 기원전 340년에 카르타고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티몰레온(Timoleon) 치세 때는 잠시 안정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와 카르타고가 이 도시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했고, 기원전 262년 로마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새로운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기원전 210년에 마침내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공화국 마지막 시기와 초기 제국 시대에 걸쳐 아그리젠토는 시칠리아 남쪽 해안에서 유일하게 활발한 시장이 형성되어 여러 가지 도시의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고 기독교가 번창하면서 도시 인구가 감소하고 빈곤해지기 시작했다. 서기 7세기부터 도시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오래된 구역들이 없어졌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언덕에 밀집해 정착했다. 감소한 주거지는 829년에는 케르켄트(Kerkent) 또는 지르젠트(Girgent)라고 불리는 아랍 민족에게, 그리고 1086년에는 지르젠티(Girgenti)라 불렸던 노르망디 민족에게 점령당했다. 아그리젠토는 1927년까지 지르젠티라고 불렸다. 대부분의 고대 도시 건축물들과 공공 문화유산은 신전의 계곡[Valle dei Templi]에 있다. 이 계곡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아니라 신전들이 모여 있는 고대의 성전 역할을 한 지역으로 바다와 평행하게 이어진 산등성이가 가로막혀 있다. 아크로폴리스와 신전 사이에 있는 지역은 기원전 5세기 초에 전통적인 극장식 격자 문양으로 조성되었다. 성지가 조성된 때는 기원전 6세기 후반이며, 이는 등사면 서쪽 끝의 초기 신전들이 입증해 주고 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유적들은 테로 치하에 지어진 헤라클레스와 제우스, 헤라, 불카누스, 콩코르드의 신전 유적들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주요 제단인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은 거대한 그리스 신전 중의 하나로 일반적인 개방형인 주주식(周柱式) 대신 바깥의 도리아 양식 원주와 내부의 벽기둥에 따라 다른 벽으로 둘러싸인 흔치 않은 특징을 갖고 있다. 내부 벽 대신 두 줄로 만들어진 거대한 사각형 기둥이 신전을 떠받치고 있으며 천장은 뚫려 있다. 콩코르드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뒤를 이어 그리스에 현존하는 가장 인상적인 도리아 양식 신전이다. 4층짜리 받침돌[stylobate], 34개의 원주로 이루어진 이 신전은 서기 6세기, 교회로 쓰인 덕분에 최상의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헤라 라치니아 신전은 같은 시기에 지어져 콩코르드 신전과 유사한 양식을 갖고 있으며, 옛 그리스 요새의 자취를 아직 살펴볼 수 있는 언덕의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카르타고 인들이 기원전 405년에 불태웠고, 아직도 당시 화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헤라클레스 사원은 언덕에 있는 다른 도리아 양식 신전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지하의 신들인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그리고 디오스쿠로이 신전은 기원전 6세기에 지어졌다가 기원전 480~기원전 460년에 개축되었다. 이와 같은 탁월한 유산뿐만 아니라 아그리젠토의 헬레니즘 및 로마식 주거 지역이 상당수 발굴되었는데 얼마간의 주택들에는 잘 보존된 모자이크 형으로 포장된 곳이 있다. 또 언덕과 남쪽 지역에는 방대한 고대 묘지 및 이교도와 기독교 시대의 무덤과 기념물들이 있다. 이른바 테론의 무덤[Tomb of Theron]은 초기 로마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소규모 이오니아식 연단과 같이 그 형식은 소아시아에 뿌리를 둔 그리스 아시아 양식이다. 이 밖에 고지대와 저지대의 아고라, 복잡한 지하 수로망도 특징적이다.

세계문화유산(351)/ 이탈리아

 

수 누락시 디 바루미니(Su Nuraxi di Barumini; 1997)

 

 

 

 

 

 

 

 

 

 

 

 

  

 

 

 

 

 

 

 

 

 

 

   샤르데냐 주[Sardinia] 메디오캄피다노[Province of Medio Campidano]에 위치한 수 누락시(Su Nuraxi) 디 바루미니는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누라기(nuraghi; 돌탑 형태로 이와 유사한 것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라는 돌탑 유적이다. 누라기는 기원전 제2천년기 동안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특수한 종류의 방어용 구조물로 사르데냐 섬에 있다. 이 돌탑 구조물은 상부가 잘려진 원뿔 모양으로, 내부에는 코벨 아치형 지붕[corbel-vault]이 있는 방이 있다. 500년 경 카르타고의 영향력 속에서 확장된 바루미니에 있는 이 복합 구조물 단지는 선사시대 건축물로서 가장 정교하고 완전한 사례이다.

   샤르데냐의 누라기, 그중에서도 출중한 사례인 수 누락시는 선사시대 사르데냐 섬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창의적・혁신적 기술을 이용하여 건설한 것이다. 수 누락시는 당시 사람들이 건축을 통해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대응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청동기시대 중후반기인 기원전 1500~기원전 800년경에 샤르데냐에서는 독특한 형태의 건축술이 발달하였다. 즉, 상부가 잘려진 원뿔형 돌탑이 건축되었는데 이 방어용 돌탑의 내부에는 코벨 아치형 지붕의 방이 있다. 바루미니에 있는 돌탑은 중앙의 탑을 중심으로, 거대한 탑 4개가 돌 벽으로 연결되어 울타리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돌탑을 거점으로 해서 주변 마을이 발달했는데 마을에는 작은 원형의 돌로 지은 집들이 있다. 샤르데냐에 누라기가 건설된 정확한 연대는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한 결과와 종래의 고고학적 층위학 연구에 있어 견해 차이가 있어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그러나 코벨 아치형 지붕은 미케네 문명의 원형 무덤의 영향으로 보여 오늘날에는 누라기의 건설 연대를 더 이른 시기로 보고 있다. 바루미니에 있는 중앙의 탑의 건설 연대는 기원전 제2천년기 말경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중앙의 방어용 구조물은 하나의 일가나 씨족에 의해 건설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샤르데냐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계급이 형성되면서 사회적 방어 목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던 탑에 더 많은 구조물을 추가하게 되었다. 샤르데냐가 카르타고의 급습을 당하였던 철기시대 초엽(기원전 10~기원전 8세기)에 바루미니는 방어 공사를 확대하면서 방어를 위해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형태의 더 큰 누라기 마을은 해상 공격에 취약한 해안이나 섬 동쪽의 넓은 해안 평원에 있다[수 누락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기 바루미니와 그 밖의 지역에서는 마을을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중앙의 방어 시설을 중심으로 방어 시설을 강화・확장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스스로 생산 활동을 하며 자급자족하는 공동체였으며, 실제로 작은 도시로 발전해갔다. 기원전 7세기경에는 수 누락시가 카르타고에 의해 약탈당했는데 이때는 방어 공사를 하찮게 여겼다. 어쨌든 주거지로서는 계속되었고, 집의 건축은 다른 양식으로 지어졌다. 기원전 2세기에 로마가 이 섬을 정복한 후에는 대부분의 누라기가 쓸모없어졌다. 그러나 발굴된 유물을 보면 기원후 3세기까지도 수 누락시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수 누락시에서 가장 초기에 지어진 누라기는 거대한 중앙 탑이다. 이 탑은 모르타르[벽돌을 접착할 때 쓰이는 흙]를 사용하지 않고 건조한 커다란 돌로 건축된 것이다. 이 탑은 3개의 방을 갖추고 있는데 나선형 계단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이 탑의 세 번째 방의 돌은 부서져 있다. 내부의 천장은 코벨 아치형 구조이다. 그 구조물은 원래 높이가 최소 18.5m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후에 중앙 탑 모퉁이에 보조 탑 4개를 추가하여 거대한 돌 벽으로 연결하였다. 돌 벽 안에 있는 안뜰은 남동쪽에 바닥면으로 난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간다. 이 문을 후에 막아 버렸기 때문에 사다리를 이용하거나 내부에서 작동하는 다른 시설을 이용하여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벽들이 차례차례 커지고 강화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울타리가 만들어져 성 주변으로 건설된 내부 건물들을 감싸고 있다. 주변의 집들은 대부분 작은 원형 석조 구조물로서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벽 내부로 의자가 둘러져 있고 지름이 7m 정도로 크다. 이것은 일종의 도시 행정과 관련된 회의실인 것으로 생각된다. 카르타고에 의해 주거지가 약탈되고 방어 시설이 해체된 후 집들은 새로 건설되었다. 이전의 집들과는 다른 형태로 작은 돌을 사용하여 건축하되 내부에는 몇 개의 방을 두었다. 이 집은 여러 곳에서 이전의 방어 시설에 인접해 있거나 그 위에 가로놓여 있다.

세계문화유산(350)/ 이탈리아

 

사보이 궁중 저택(Residences of the Royal House of Savoy; 1997)

 

 

 

 

 

 

 

 

 

 

 

 

 

 

 

 

 

 

 

 

 

  사보이는 피에몬테 지역[Piedmont Region] 토리노 주[Province of Torino]에 속한다. 1562년에 수도를 토리노로 이전한 사보이의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Emmanuele Philiberto; 1528~1580)는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프로젝트는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이어 나갔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하고 예술가들이 장식한 뛰어난 건축물 단지는 토리노의 ‘사령 지역[Command Area]’ 내의 왕궁에서 주변 전원 지역까지 넓은 방사형으로 퍼져 있다. 여기에는 수많은 촌락과 사냥터용 별장[hunting lodge]이 포함된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사보이 공작은 1562년에 자신의 궁정 위치를 샹베리(Chambery)에서 토리노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그는 토리노에 예상치 못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선사하였다. 당시만 해도 공작 영지의 새로운 수도는 요새화된 작은 중세 마을로서 르네상스 문화의 주된 발전에서 소외된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었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그의 후계자들이 17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건축 프로그램을 추진한 결과, 이 작은 마을과 주변 지역은 바로크 양식으로 변모하였다. 그 중심에는 공작의 저택들이 자리를 잡았다. 유희와 사냥을 위해 포(Po) 강을 따라 전원 마을과 언덕 위, 더 멀게는 광활한 숲에 건설한 저택은 경제와 전략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대(大)사유지 시스템을 평가하는 기준점 역할도 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한 나라 및 유럽의 수도를 건설하였던 사보이 지배자들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였다. 그들은 비토리오 아메데오 세바스티아노 2세(Vittorio Amedeo Sebastiano Ⅱ; l713)와 함께 시칠리아 왕국의 왕관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Ⅱ; 1861)와 함께 이탈리아 왕국의 왕관을 차례로 획득하였고, 1946년에 공화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왕좌를 유지하였다. 이들 건축물의 구조는 한 궁정과 다른 궁정, 또 궁정과 마을 사이를 연결하는 도시 계획 체계를 내포하였고, 동시에 권력의 옥좌가 놓인 지역에 건축의 통일성과 위엄을 불어넣었다. 따라서 ‘사령 지역[Command Area]’에 세운 일단의 건물은 팔라초 마다마(Palazzo Madama), 팔라초 디 카리냐노(Palazzo di Carignano) 등 사보이 가문의 궁정과 함께 방사형 설계에 따라 외딴 전원의 저택들과 직접 관련을 맺는 중심점을 형성하였다. 그 형태를 추적해 보면 중앙에는 토리노가 있었다. ‘사령부’의 건물들은 공작 저택을 출발점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이한 정치, 행정, 문화의 형태로 중앙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들 저택은 직선으로 곧게 뻗은 3개의 도로망 덕분에 수도에서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전체 조화에서 일관된 기능적 측면도 완성할 수 있었다. 거대한 규모의 도시 계획 프로젝트가 이 체계를 보강하였다. 토리노의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엠마누엘 필리베르토의 주요 관심사이기는 하였으나 그는 옛 주교 궁정에 자신의 저택을 짓는 데 성공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은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카스텔로(Castello) 광장을 중심으로 3차례에 걸친 대규모 확장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Carlo Emanuele I; 1562~1630)가 추진한 최초의 도시 및 건축 재개발 계획은 건축가 아스카니오 비토치(Ascanio Vitozzi;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가 설계하였다. 이 계획의 애초 구상은 토리노 시 북동부 지역에 군왕의 지위에 더욱 걸맞으면서도 방어 시설로 한층 실용적인 ‘사령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기존의 공작 궁정은 새로운 방향으로 재건함으로써 카스텔로 광장과 곧바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원에 있었던[지금은 붕괴하였다] 미라피오리(Mirafiori) 공작 저택 방향으로 새로운 도로[현재의 비아로마(Via Roma)]를 개통(1612~1615)하여 공작 궁정과 도시 남쪽도 연결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도시와 영지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양극성을 조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1638~1675)는 1673년에 아메데오 디 카스텔라몬테(Amedeo di CastelIamonte)에게 마을을 포 강 방향인 동쪽으로 확장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빌라 델라 레지나(Villa della Regina)가 서 있는 언덕 방향으로 강을 횡단하는 다리와 카스텔로 광장을 연결하는 비아포(Via PO)가 새로운 중심축이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카스텔로 광장을 동쪽으로 확장하였으며, 훗날 같은 축을 따라 외무사무국과 왕립 극장을 축조하였다.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Victor-Amadeus Ⅱ; 1675~1730)가 미켈란젤로 가로베(Michelangelo Garove), 안토니오 베르톨라(Antonio Bertola), 그리고 1716년부터 필리포 유바라(Filippo Juvarra)에게 의뢰하여 세 번째 확장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번에는 도시를 가로질러 포르타 수시나(Porta Susina)에서 카스텔로 디 리볼리(Castello di Rivoli)와 팔라치나 디 스투피니지(Palazzina di Stupinigi)로 이어지는 서쪽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1730~1773)는 아버지가 진행하던 몇 가지 프로젝트를 이어받았다. 그는 팔라초 레알레(Palazzo Reale)와 외무 사무국를 설계하였고, 카스텔로 광장에는 극장을 계획하였다. 그는 또한 처음에는 유바라가 주도하다가 1735년에 토리노를 떠난 후부터는 베네데토 알피에리(Benedetto Alfieri)가 주도하여 저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거대한 재건축과 확장 프로젝트를 조직하였다. 사보이 가문이 파리와 런던, 마드리드(Madrid), 뮌헨(Munich), 빈(Vienna)의 궁정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들과 맺은 돈독한 친분과 혈연 관계 덕분에 토리노의 궁정에는 예술과 문화의 국제적 환경이 형성되었다. 엠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이전까지만 해도 토리노에는 없었던 궁정 전통의 토대를 놓았다. 1682년에 출간된 2권으로 된 놀라운 책 <테아트룸 사바우디아이(Theatrum Sabaudiae; 사바우디아이 원형 극장)>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역대 사보이 공작들은 지칠 줄 모르는 건축가들이었다. 그들은 불굴의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 가문의 유산을 풍부하게 가꾸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예술가, 조경 전문가 들에게 공사를 의뢰하였다. 그 전문가들은 아스카니오 비토티(Ascanio Vitoti), 카를로 디 카스텔라몬테(Carlo di Castellamonte)와 아메데오 디 카스텔라몬테(Amedeo di Castellamonte), 과리노 과리니(Guarino Guarini), 필리포 유바라, 미켈란젤로 가로베, 베네데토 알피에리, 다니엘 자이터(Daniel Seiter), 프란체스코 솔리메나(Francesco Solimena), 세바스티아노 리치(Sebastiano Ricci), 샤를앙드레 방로(Charles-Andre Van Loo), 클라우디오 프란체스코 보몽(Claudio Francesco Beaumont), 프란체스코 라다테(Francesco Ladatte), 미셸 베나르(Michel Benard)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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