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 영 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935년>

 
 모란동백 / 조영남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일이 끝나 저물어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1978년>

Homeland / Isla Grant  


 오산 인터체인지 /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1971년>
 
 Mr.Lonely / Hajime Mizoguchi & New Japan Philharmonic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2003년> 
 
Lincoln's Lament(링컨의 애도) / Michael Hoppe  
                                     

 비망록  /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아베 마리아(구노) / David Agnew 


 인파이터 - 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Don't Cry For Me Argentina / Giovanni Marradi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2005년>


Capture the Moment / David  London

 

 감나무 / 이재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1996년>
 

Big Big World / Gheorghe Zamfir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1997년>
 

 자전거 / 한태주(오카리나연주)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2006년>

 
밤의 찬가 / 김인배(트럼펫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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