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359)/ 이탈리아

 

아퀼레이아의 고고 지구와 가톨릭 성당

(Archaeological Area and the Patriarchal Basilica of Aquileia; 1998)

 

 

 

 

 

 

 

 

 

 

 

 

 

 

 

 

 

 

 

 

 

 

 

 

 

   초기 로마 제국의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던 아퀼레이아(Aquileia)는 우디네 주[Province of Udine]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Friuli-Venezia Giulia Region]에 속하며, 5세기 중반 아틸라(Attila)가 이끈 훈 족에 의해 파괴되었다. 고대 로마 유적지로서는 가장 큰 규모인 아퀼레이아는 아직 많은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채 지하에 묻혀 있다. 이곳의 성당은 바닥면이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 성당은 중부 유럽 지역의 복음 전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초기 로마 제국의 가장 크고 부유했던 도시들 중 하나였던 고대 아퀼레이아 유적은 아직 대부분 발굴되지 않은 채 온전히 남아 있다. 지중해 지역에 남아 있는 초기 로마 도시 유적 가운데 가장 완벽한 사례이다. 이곳의 가톨릭 성당은 중세시대 초기에 중부 유럽의 기독교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퀼레이아는 기원전 181년 포 강 유역의 북동쪽 모서리에 당시 야만족이었던 갈리아 인과 이스트리아 인에 대항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서 로마가 건설된 식민 도시이다. 이곳은 나티사(Natissa) 강을 따라 바다와 연결되어 중부 유럽과 지중해를 이어 주는 요충지로 빠르게 무역 중심지로 발달했으며, 하항을 통해 포도주・오일・모피・철・노예 등을 거래하였다. 선사시대부터 호박길의 남쪽 끝이기도 했으며, 발트 해로부터 들여온 귀중품을 아퀼레이아의 장인들은 세공하여 로마제국 곳곳에 팔았다. 그 중에서도 품질 좋은 유리 제품은 중요한 상품이었는데 유명한 포에니의 장인 엔니온(Ennion)은 1세기에 아퀼레이아에 유리 공장을 건설하였다. 기원전 90년경에 자치 도시의 지위로서 이곳 시민들은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도시가 부유해져서 웅장한 공공건물이 다수 건축되었으며, 부유한 상인들은 개인 주택을 호사스럽게 장식하였다. 4세기에는 아퀼레이아에 황제의 궁전이 건설되었으며, 이 황제의 궁전은 284~425년에 조폐국으로 이용되었다.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한 국교 승인에 이어, 4세기 초에는 성당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아퀼레이아의 모든 문화는 452년 아틸라가 이끈 훈 족이 쳐들어와 끔찍한 종말을 맞았다. 급격히 약화된 정착촌에서 생존자들은 성당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오늘날의 작은 마을이 되었으며, 로마 도시의 작은 일부가 되었다. 아퀼레이아의 상업 도시로서의 역할은 그 후 베네치아가 맡게 되었고 중부 유럽과 지중해 사이의 무역로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종교적인 의미가 깊었던 아퀼레이아는 총대주교의 관할 교구가 되어 1751년까지 존속하면서 이 지역의 복음 전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영역이 점차 서쪽으로 코모까지 확대되었고,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지역을 아울렀으며, 대성당은 여전히 종교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발굴된 유적지에는 광장과 로마의 성당・공화국의 환전소・목욕탕・2개의 화려한 주거 단지의 일부가 있으며, 도시의 성곽 밖으로는 당당한 인상을 주는 비석이 있는 묘지와 원형 경기장과 원형 극장이 있었다. 강둑을 따라 창고와 선착장이 길게 늘어서 있는 포구 시설은 로마 도시 유적들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유적이다. 아퀼레이아의 가장 특징적인 건축물은 성당이다. 테오도레(Theodore; Theodorus) 주교가 3개의 주회관이 있는 말굽 모양의 건물을 건설하였으나 참배자들과 순례자들을 수용하기에 부족하여 345년에 북쪽 부분을 더 큰 건물로 교체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훈 족에 의해 파괴된 후 재건되지 못했다가 일부 생존자들이 돌아와 파괴된 남쪽 회관에 집중하여 복구를 하였다. 한동안 유기되었으나 9세기에 샤를마뉴 대제의 지원을 받아 막센티우스(Maxentius) 주교가 다시 공사를 시작하였다. 10세기 마자르 인들의 습격과 988년 지진에 의해 심하게 파손되었으나 공사는 1031년에 완성되었다. 이 성당은 1348년 지진이 있은 후, 재건되면서 약간은 고딕 양식을 띠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내부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은 4세기 건물인 남쪽 홀의 거대한 모자이크로, 11세기에 와서야 발굴되었고 1909년에서야 바닥의 진흙을 제거하면서 실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모자이크에는 상징적 주제의 그림, 기증자들의 초상화, 복음서와 헌정 글귀들이 장식되어 있다. 동쪽 끝은 12명의 어부가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모자이크 그림은 예수의 제자들을 의미하며 예언자 요나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동쪽 끝 지하실의 프레스코 화는 6세기 또는 7세기의 것으로 순교자들의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었다. 성당 동쪽 끝에 있는 문은 발굴지의 지하실로 통하며, 20세기 초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는 4세기에 성당 부지로 선정된 1세기 교외 저택에서 나온 모자이크가 보존되어 있고, 북쪽으로 가로놓인 홀의 토대는 아틸라에 의해 파괴된 후 재건되지 않았다. 모자이크는 주제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난해한 것들로 가득하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서쪽 입구는 현대식 세례당으로 통한다. 입구는 9세기 초에 지어진 포르티코(portico)로 보호되어 있다. 세례당은 일반적인 팔각형 평면으로 예수의 성스러운 문자 도안[Chi Rho]을 재현하면서 육각형의 세례 연못을 둘러싸고 있다. 세례당을 둘러싼 콜로네이드 사이로 보행 길이 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031년에 건립된 이후 아무 탈 없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대한 종탑이 있다. 모나스테로(Monastero)에 있는 또 하나의 성당 건물은 현재 초기 기독교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인상적인 이 4세기 건물에도 역시 바닥 모자이크가 있어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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