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이상진
    
     찔레 / 이 근 배
    
    창호지 문에 달 비치듯
    환히 비친다 네 속살꺼정 
    검은 머리칼 두 눈 
    꼭두서니 물든 두 뺨 
    지금도 보인다 낱낱이 보인다 
    사랑 눈 하나 못 뜨고 헛되이 흘려버린 불혹 
    거짓으로만 산 이 부끄러움 
    네게 던지마 피 걸레에 싸서 
    희디흰 입맞춤으로 주마 
    내 어찌 잊었겠느냐 
    가시덤불에 펼쳐진 알몸 
    사금파리에 찔리며 너를 꺾던 
    새순 돋는 가시 껍질 째 씹던 
    나의 달디단 전율을 
    스무 해전쯤의 헛구역질을 
    <2004년>
    
    어찌 잊으리, 첫사랑의 '달디단 전율'을 
    

    Le Temps Des Fleurs / Dalida



    
    
    
    ▲ 일러스트=클로이
    
     사랑 사랑 내 사랑 / 오 탁 번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1999년>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온몸이 눈동자'   
    

    Send Me The Pillow That You Dream on / Dolly Parton



    
    
    
    ▲ 일러스트=이상진
    
     파문 / 권 혁 웅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2001년>
    오래된 라디오 같은… 그 사람의 목소리  
    

    I Can't Stop Loving You / Ace Cannon



    
    
    
    ▲ 일러스트=클로이
    
     세상의 등뼈 / 정 끝 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2006년>
     
    너에게 한 공기 '밥'같은 존재가 되리  
    


    Together / Giovanni Marradi



    
    
    
    ▲ 일러스트=이상진
    
    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 도 현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1991년>
    

    사랑이란 그대의 앞이 아닌 옆에 서는 것

    Je t aime Mon Amour(사랑하는이여)/ Richard Clayderma



    
    
    
    ▲ 일러스트=클로이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 희 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1974년>
     
    70년대, 그 '가파른 시대'의 사랑 
    

    Love Prayer(사랑의 기도) / T.S.Nam



    
    
    
    ▲ 일러스트=이상진
    
     원 시 (遠 視) / 오 세 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1992년>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다운 사람아 
    

    Melancholy Smile / T.S.Nam (쓸쓸한미소)



    
    
    
    ▲ 일러스트=클로이
    
       질투는 나의 힘 / 기 형 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1988년>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 '질투'라니
    

    Message Of Love / Don Bennechi



    
    
    
    ▲ 일러스트=이상진
    
      민 들 레 / 신 용 목 
     
    가장 높은 곳에 보푸라기 깃을 단다 
    오직 사랑은 
    내 몸을 비워 그대에게 날아가는 일 
    외로운 정수리에 날개를 단다 
    먼지도 
    솜털도 아니게 
    그것이 아니면 흩어져버리려고 
    그것이 아니면 부서져버리려고 
    누군가 나를 참수한다 해도 
    모가지를 가져가지는 못할 것이다 
    <2004년>
    

    사랑이 아니면 부서져 버리리라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제8번(비창) 3악장

     



    
    
    
    ▲ 일러스트=클로이
    
     한(恨) / 박 재 삼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1962년>
     
    내 사랑은 서러운 노을빛, 감나무를 닮았네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제8번(비창)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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