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이상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1938년>
    

    추한 세상을 뒤로 하고 나타샤, 함께 산골로 가자

    Tombe La Neige / Paul Mauriat



    
    
    
    ▲ 일러스트=클로이
    
     마치…처럼 / 김 민 정 
    
    내가 주저앉은 그 자리에 
    새끼고양이가 잠들어 있다는 거
    물든다는 거
    얼룩이라는 거 
    빨래엔 피존도 소용이 없다는 거
    흐릿해도 살짝, 피라는 거
    곧 죽어도 
    빨간 수성사인펜 뚜껑이 열려 있었다는 거 
    <2007년>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얼룩'


    Lost Love / Bobby Darin



    
    
    
    ▲ 일러스트=이상진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 라 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 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1990년>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아… 당신과 함께라면"  
    

    Sad Remembrance / Praha



    
    
    
    ▲ 일러스트=클로이
    
     마른 물고기처럼 / 나 희 덕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 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장자(莊子)》의〈대종사(大宗師)〉에서 빌어옴.
    사랑은 속박하지 않는 것, 네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
    

    L'orphelin (고아) / 남택상



    
    
    
    ▲ 일러스트=이상진
    
     서귀포 / 이 홍 섭
    울지 마세요 
    돌아갈 곳이 있겠지요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구멍 숭숭 뚫린 
    담벼락을 더듬으며 
    몰래 울고 있는 당신, 머리채잡힌 야자수처럼 
    엉엉 울고 있는 당신
    섬 속에 숨은 당신 
    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
    울지 마세요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2005년>
    

    당신한테서 밀감 향기가…

     

    You needed me / Anne Murray



    
    
    
    ▲ 일러스트=클로이
    
     바람 부는 날 / 김 종 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1990년>
    사랑해서 괴롭다… 당신이 보고 싶다 
    

    Je t aime Mon Amour(사랑하는이여)/ Richard Clayderma



    
    
    
    ▲ 일러스트=이상진
    
     어느 사랑의 기록 / 남 진 우
    
    사랑하고 싶을 때 
    내 몸엔 가시가 돋아난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은빛 가시가 돋아나 
    나를 찌르고 내가 껴안는 사람을 찌른다 
    가시 돋친 혀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핥고 
    가시 돋친 손으로 부드럽게 가슴을 쓰다듬는 것은 
    그녀의 온몸에 피의 문신을 새기는 일 
    가시에 둘러싸인 나는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이 
    다만 죽이며 죽어간다 
    이 참혹한 사랑 속에서 
    사랑의 외침 속에서 내 몸의 가시는 단련되고 
    가시 끝에 맺힌 핏방울은 더욱 선연해진다 
    무성하게 자라나는 저 반란의 가시들 
    목마른 입을 기울여 샘을 찾을 때 
    가시는 더욱 예리해진다 가시가 사랑하는 이의 
    살갗을 찢고 끝내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때 
    거세게 폭발하는 태양의 흑점들 
    사랑이 끝나갈 무렵 
    가시는 조금씩 시들어간다 저무는 몸 
    저무는 의식 속에 아스라한 흔적만 남긴 채 
    가시는 사라져 없어진다 
    가시 하나 없는 몸에 옷을 걸치고 
    나는 어둠에 잠긴 사원을 향해 떠난다 
    이제 가시 돋친 말들이 
    몸 대신 밤거리를 휩쓸 것이다 
    <1996년>
    더 발칙해져라 사랑에 관한 상상이여
    
    

    Your Love / Dulce Pontes & Ennio Morricone



    
    
    
    ▲ 일러스트=이상진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 용 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이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2002년>
    

           휘영청 밝은 저 달은 당신 얼굴

 


           .
                      Moonlight Dancing  / Vicki Delor

 



    
    
    
    ▲ 일러스트=이상진
    
     거미 / 김 수 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1954년>
     다가올 설움을 알기에 더 악착같이 사랑하리  
    

    사랑 / 백남옥



    
    
    
    ▲ 일러스트=클로이
    
     사랑의 역사 / 이 병 률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힌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혔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

 

     '상처'에 아픈 나, 그래도 심장은 또 뛰네

     

                     Always  /  Chris Sphee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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