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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ilanka History-스리랑카) (Sigirya Ancient City Photo)
인도양 위에 떠 있는 섬나라 스리랑카는 적도의 북 회귀선 사이의 열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푸르른 자연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섬이다. 총면적은 65,609평방km로 남한의 3분의 2정도의 크기이며 북쪽으로 가면서 점점 좁아지는 이 섬의 형상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인도 대륙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것 같다고 한다. 전에는 국호를 실론이라 했는데 1972년 새 헌법을 공포하면서 스리랑카로 국호를 바꾸웠다.
스리랑카는 찬란하게 빛나는 섬이라는 뜻이며 이 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국호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나 실론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도처에 남아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홍차 이름으로도 우리 귀에 익숙하다. 이 섬은 변화가 풍부한 지형을 가지고 있으며 베이지색 모래밭이 100km이상이나 이어지는 해안과 키가 작은 나무들이 무성한 정글 그리고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은 작은 섬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지형들은 대부분 오염되지 않은 자연상태 그대로 남아 있으며 특히 정글지대에는 많은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교도이며 고대로부터 불교 왕국으로 번영을 누려왔다. 지금도 남아 있는 불교의 거대한 유적들은 세계 유네스코에 의해 보수공사가 계속되고 있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역대 왕들이 남긴것은 불교 유적들뿐이 아니며 이 섬에서 드라이 존이라 불리는 건조지역 여기저기에는 거대한 저수지들이 있다.
역대 왕들이 건설한 이 위대한 유산들은 농업국인 스리랑카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켜 온 소중한 재산으로 지금은 완전히 자연의 일부가 되여 인간분만 아니라 새와 짐승까지도 생활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스리랑카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석이다. 그 역사는 아득히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0세기에 솔로몬왕이 시바의 여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건물한 루비가 스리랑카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섬을 자배해 온 여러나라가 탐내던 것도 충푸한 보석때문이었으며 영원한 빛을 발하며 사악한것은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고 전해지는 이 보석의 대표적인 산지인 산속의 작은 마을 라트나푸라에서는 오늘도 남자들이 소박한 방법으로 계속 꿈을 캐고 있는 것이다. 천혜의 자연환경 그리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씨 모든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스리랑카는 우리들의 여행을 낭만적인 시간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기후)
작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어딜 가더라도 기후가 같을것 같은 스리랑카는 그러나 몬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지형이 다양하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기후가 많이 다르다. 인도가 망고를 떨어 뜨렸다는 표현이 그롷듯하게 들리는 섬 스리랑카는 인도의 끝 동남쪽에 위치해 있어 어딜 가더라도 덥고 매일 세찬 소막비가 심하게 내릴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열대 기후라고는 하지만 의외로 지내기 좋고 기온은 연간 2-3도 정도의 차이로 변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지형에 따른 기온차이는 아주 심하다. 해안지방의 낮은 지역은 열대지방 답게 일년내내 덥지만 중앙 고원 지대인 누와라 엘라야 같은 곳은 연평균 섭씨 16도로 항상 봄 날씨이다 스리랑카 전체는 열대성 몬순 기후에 속하며 적도 부근에서 불어 오는 남서 몬순과 벵골만에서 불어오는 동북 몬순의 영향으로 우기와 건기가 찾아온다.
11월-3월
동북 몬순기로 벵골만에서 오는 몬순이 섬의 동북부를 중심으로 하여 스리랑카 전체에 비를 뿌린다.
4월
일년중 가장 더운 시기이며 때때로 저기압에 의한 비나 해양풍에 의한 뇌우가 있다.
(주 식사인 카레)
스리랑카 사람들은 오로지 카레만 먹고 살며 아침에도 카레 점심에도 카레 물론 저녁에도 카레를 먹는다. 스리랑카는 불교국이지만 고기에 대한 제약은 없으며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등 무엇이던 먹으며 국토가 자연의 혜택을 입어서인지 몰라도 풍부한 생선이나 야채를 넣어 만든 카레 종류도 매우 많다. 그런 카레를 밥이 담긴 접시에 조금씩 옮겨 담아 손으로 주물럭 주물럭 섞어서 먹는 것이다.
그런데 스리랑카 카레의 특징은 맵다는 것이며 여러 종류의 향신료를 섞어 혀끝이 찌리할 정도로 매운 카레를 만든다. 외국인에게 특별히 덜 매운 카레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그렇게 매운 카레를 먹을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스리랑카의 빵은 의외로 맛이 좋의며 별로 맛이 없을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식빵이나 핫도그용의 가늘고 긴 빵도 있으며 스리랑카의 음료수라고 하면 뭐니뭐니 해도 홍차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론티의 원산지인 만큼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홍차를 즐긴다. 날씨에 관계없이 뜨거운 홍차에 설탕을 듬뿍 넣어 마시는 것이 스리랑카식 홍차이다. 설탕물처럼 단 홍차를 마시고 싶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별도로 설탕을 요청하는것이 현명하다 매운 카레와 뜨겁고 달콤한 홍차는 단연 스리랑카의 먹거리의 상징인 것이다.
(역사)
지금도 신할라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얼리 퍼져 있으며 옛날 인도에서 숫사자와 뱅골의 여왕사이에서 쌍둥이 남매가 태여났다. 아들은 커서 사자를 죽이고 여동생과 결혼하여 라라국을 건설했다 지삭복이 많았지만 큰 아들 윗샤야는 무리를 지어서 온 나라를 어지렵히고 돌아 다녔다.
그래서 결국 배애 태워 추방해 버렸는데 스리랑카에 도착한 그는 야차를 정복하고 신할라 왕국을 건설했다. 이 일족은 사자를 죽인 신할라라고 불리게 되였다.이 이야기는 6세기경에 편찬된 책인 마하완사에도 있는 왕권신화의 한 대목이다.안타깝게도 스리랑카는 민족주의 자들은 이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으며 따라서 신할인은 북인도에서 왔다.
이 섬에서는 신할라인이 최초로 개화된 민족이며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은 신할라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학문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오히여 19세기에 이르기 까지 인도 남부에서 온 이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고대에는 작은 나라가 여기 저기 있었는데 어느 한 나라가 불교를 받아 들여 강대화한것 같다는것이 합리적인 스리랑카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왕조사 채색되는 고대에서 중세로)
기원전 3세기 부렵부터 아누라다푸라를 도읍으로 하는 신할라 불교 왕국이 번성했으며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로마와의 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도읍은 불교의중심지가 되여 법현과 같은 승려는 멀리 중국에서도 유학을 왔다. 이러한 번영은 대규모 저수지를 이용한 관계로 풍부한 쌀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이며 판디야나 쵸라등 타밀의 여러나라로 부터 온 원정군과 자주 전쟁을 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민족적 대립관계는 없었다.
전쟁은 왕권간의 문제이며 신할라 왕실의 왕위 계승 다툼에 타밀인이 용병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동맹이나 혼인관계도 있었다. 불교도와 힌두교 사이에도 항쟁이 전혀 없었는데 그 이유는 7세기경 남인도에서 힌두교 복고주위가 강해지기 전까지는 타밀 지방의 여러 나라들도 불교를 널리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도읍은 풀론나루와로 옮겨 졌는데 13세기 무렵에는 건조지대를 중심으로 한 국가가 급속도로 쇠퇴한다.
왕과 백성들은 남부의 습지지대로 계속 이주했고 건조지대에 세워졌던 사원과 왕궁 저수지는 버려져 정글로 변해갔다. 그 무렵 자후나 지방에는 타밀 왕국인 아루파나무가 건설되었다. 이주의 원인에 대해서는 타밀 세력의 압박 또는 기후의 변화 말라리아의 발생과 과잉개발등의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독림을 향한 길)
19세기 중반에 커피농장이 생기자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 났으며 노동력이 필요해 남이도에서 타밀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토착민인 싱할라인 타밀인 무술림 사이에서 발생한 상업 자본가를 중심으로 엘리트층이 형송되었다. 이들은 점차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며 종교 부흥운동이였다. 사원 학교와 부료 학교가 건설되였고 불교 교육이 추진 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경제적 종교적 배타주의의 색채를 짙게 띠고 있었다. 그들의 공격은 그리스도를 믿는 지배자인 영국인에게만이 아니라 타밀인과 무술림 카토릭 교도인 심할라인에게도 겨누워졌다. 스리랑카에 있어서 최초의 민족 폭동이라 할수 있는 신할라와 카톨릭의 충돌은 이미 1883년에 콜롬보에서 일어 났다.
(고뇌하는 현대사)
저항운동의 파도는 점점 높아 졌으며 마침내 의회제도의 도입과 헌정개혁의 과정을 거쳐 1948년2월4일에 독립이 실현되였다. 그러나 여전히 스리랑카 민족주의는 형성되지 않았다.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는 통일국민당과 자유당 두 정당 사이의 정권다툼으로 일관되였다. 1956년 자유당의 반다라나이케 정권이 신할라어 공용어법을 제정하자 타밀족은 강력하게 반발하여 연방제 아래에서 자치를 요구했다.
1972년 자유당 평등사회당 공산당의 통일 전선 정권이 헌법으로 불교에 준 국교적인 지위를 부여하자 타밀인들은 드디어 타밀 이라무국의 불리 독립을 요구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절은이들은 독립을 부르짖으며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1983년에 반 타밀 대 폭동이 일어나 많은 희생자가 나오자 타밀 게릴라들의 반격은 거세어 졌다 마침내 1987년에는 인도가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연방제의 태두리안에서 타밀인들에게 대폭적인 자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일단 타협이 이루어 졌다.
분리 독립은 타밀인들의 2류 시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거부하는 방편이었지만 민족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타밀 이라무 국이 독립한다고 해도 그 지역안에는 또 신할라인과 무술림 등 소수민족이 포람되여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부의 무슬림은 몇년전부터 독자적인 정치 조직을 만들어 타밀인의 지배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현대정치는 통치의 잔재 이웃 아라인 인도의 정치 상황등과 깊은 관계를 지니며 민족분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분출되어 온 셈이다.
(카스트 제도)
스리랑카에도 카스트 제도가 있으며 이 제도에 대하여는 인도와 비교(인도의 카스트 제도에도 뚜렸한 차이가 있음)해 보면 쉽게 알수 있다.우선 인도의 브라만에 해당하는 최고 지위가 없고 위계제도(브라만을 최고로 하고 수드라를 최하위에 두는 제도)가 없는 것이 특색이다. 신할라인과 타밀인이 각각 웰라라 고이가라 하는 농민 카스트가 상위라고 하지만 실은 이 카스트가 인구의 약 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가 여러가지 기능을 전통적으로 담당하는 직업 카스트이다.
신할라의 카스트는 옛날 왕조의 정치체재와 관련이 있다. 1818년에 멸망하기전까지 고지에서 이어져 온 왕국의 영토는 국왕의 직활지와 국왕이 귀족(관료)사원등에 하사한 토지로 나누워져 있다. 이들 토지의 영주는 국왕에게 하사받은 토지의 점유권을 가지고 수확의 일부나 부역을 국왕에게 바치는것이 의무였다. 토지를 실제 경작하던 사람들이 농민 카스트이고 그들의 촌락주위에는 여러 카스트의 촌락이 있어 상호 보완 적인 분업체재였다.
이와 같은 체재를 라자카이라 제(라자 국왕 카리야 부역)라 부른다. 이처럼 카스트제도는 국왕-영주-농민형태의 경제적 사회적 계층구조로 이해 하는것이 적절하다 영국의 식민지 체재가 들어선 이후에 이 제도가 해체되어 카스트의 구성원도 농지를 보유하게 되면서 전통적인 직업 집단으로서의 기능도 거의 사라져 갔다. 애초 카스트를 의미하는 신할라어는 없고 이들을 표현할때에는 신할라어로 친구 또는 사람들의 모임등을 의미하는 캇티야란 말을 사용했다.
분명히 스리랑카의 카스트는 인도의 영향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유럽인들이 분업 집단의 분류를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같은 용어로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했던데서 오해가 생겨 오늘날에 이른것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그러나 의식을 할때에는 그 의식을 주재하는 특별한 역활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해 정 또는 부정 이란 개념이 뚜렸해 진다. 옛날부터 살던것이 아니고 떠 돌아 다니며 살던 집단도 정착해 가는 중에 기존제도와 사회구조의 밖에 있다고 하여 아주 낮은 카스트로 구별되였다.
타밀 사회에서 최고 지위가 없다는것은 이미 이야기 했지만 브라만이 종교 직능자라는 지위에만 존재하는 점이 인도와 다르다 그러나 소위 건드릴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점에서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유사하다고 할구 있다.
(스리랑카의 별 점보기)
스리랑카에서는 인도와 마찬가지로 별을 보고 점보기가 성행하고 있으며 신문지사에도 그 날의 길시 흉시 운세등이 게제되여 있고 일요일판에는 점성술에 관한 화제가 특집으로 꾸며지는 일이 매우 많다. 개인의 생일과 출생시간에 근거한 별 점이 그사람의 그때 그때 운세 특히 결혼 할떼의 궁합등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뿐 아니라 국가적인 행사의 개시 시간을 결정할 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옛날 우리나라에서 길흉을 여러가지 행사를 계획했던 것과도 상통하는것이라고 볼수 있다. 이처럼 우주의 운행에 근거한 생활규제는 특히 젊은이가 결혼을 생각할 때 카스트 신분과 여성의 지참금 그리고 궁합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스리랑카 신문의 일요일판에는 구혼광고란이 있어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광고가 게제되는데 그 광고에도 이러한 단서가 붙어 있다.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라고 애세우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이런 조건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볼수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부모나 친척등이 중간에 끼는 맞선을 통한 결혼이 대부분이고 자유로운 연애결혼 특히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은 큰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특정 카스트로 태어나는것은 그 사람의 업에 근거한 운명이며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인 것이다. 그리고 넓게는 그 사람이 타고 난 별의 영향이라 생각한다.
결혼이 개인간의 매듭이 아니라 가족간의 매듭이란 성격을 강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미 혼인관계가 있는 친족간의 결합을 선호하는데 이때는 지참금이 별로 무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관계가 성립 될때나 도시의 부유층에서는 신부측이 신랑측에게 지참금을 보내야 한다. 이퍼럼 스리랑카에는 인도의 영향아래 별 보고 점보기등 우주의 운행을 기준으로 한 세계관이 일상생활을 크게 지배하고 있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은 서구와 인도등의 복잡한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해와 달을 기준으로 한 몇가지 체계가 혼란을 낳고 있는 것이다.
(스리랑카아의 풍습)
(인사방법)
인사는 양손을 잡고 가슴께에 모아 합장한다음 아유보완이라고 한다. 아주편리한 말로 만날때나 해어질때 언제나 쓸수 있는 인사말이다. 또 이에 대답하는 말로 아유보완이라고 하면 된다.
(카레는 오른손으로)
스리랑카 사람들이 손으로 카레 먹는 모습을 보고 경멸하는 여행자들은 흔히 볼수 있으며 밥에 섞여 있는 작은 고기가 생선의 뼈를 포크나 나이프로 초리하기에는 어렵다 오른 손의 제1관절을 이용하여 카레를 섞어 먹는것이 자연스런 모습이다.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잘 관찰하여 흉내 내 보는 것도 하나의 좋은 체험이 될것이다.
(사원방문)
사원을 방문할때는 모자와 신발을 벗고 조용히 참배하십시다. 사원은 신성한 지역이며 큰 소리로 이야기 한다거나 소리내어 웃지 말아야하며 불탑등을 구경하러 가면 바닥이 햇볕에 데워져 발바닥이 따가운 경우도 있음으로 양말은 그데로 신고 들어 가는것이 매우 좋다 근처에 꽃을 파는 곳이 있다면 꽃을 사서 헌화하고 깨끝한 마음을 가져 본는것도 바람직 하다.
(주요 여행지 소개
(코롬보)
콜롬보는 스리랑카의 최대의 도시이며 아시아와 유럽을 있는 해상수송의 중계지로서 발전해 왔으며 지금은 이 나라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콜롬보시의 인구는 1987년에 약 67만명 그 뒤로 계속 증가한 것을 감안한다면 수도권의 인구는 120만명을 훨씬 넘어 보인다. 현재도 인구는 계속 증가 콜롬보는 점차 비대해져 가기만 하다 남국의 풍취가 물신 느껴지는 스리앙카니지만 콜롬보만은 특별하다. 아침 저녁의 러쉬 아워에는 교통체증이 다반사이며 그 소란도 대단하다. 길 가는 사람들로 다른 도시에 비해 멋을 부린 젊은이블과 부유해보이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뜬디.
1985년1월 콜롬보에서 동쪽으로 약10km떨어진 곳에 스리 자야와르다나풀라라는 새로운 수도가 생겼지만 .실질적인 수도는 아직도 콜롬보라고 할수 있다. 콜롬보 시 북쪽에 있는 케라니야는 비교적 역사가 짧은 이 주변에서 아주 귀중하고 오래된 불교 사원이 있는 도시이다. 또 남쪽에는 마운트 라비니아라고 하는 휴양지가 있어 식민지시대에 세워진 리조트 호텔 등이 있으며 언뜻 보기에 대도시로서의 모습만 눈에 비치는 콜롬보이지만 주변에 국경거리가 상당히 재미있는 곳이다.
(캔디)
열대의 섬나라 스리랑카는 중앙부 일대에는 1000m가 넘는 산들이 줄지어 있으며 이지역은 열대이면서도 기후가 온난하고 물이 풍부해서 영국 식민지 시대에 홍차 재배로 개발된 곳이다. 구래서 이 지역은 산은 거의 홍차밭이다. 산의 정상까지 홍차가 프르게 덮여 있고 그 사이를 아름다운 폭포와 푸른 시내가 수 놓는다. 줄지어 서있는 산들의 남서 분지에는 보석의 마을로 알려진 라트나푸라가 있다.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토산품인 보석이 대부분 이 마을의 주변에서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채굴되고 있다.
(세계 유네스코 1988년 제298호 문화유산 지정)
(담블라)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 사원이 있는 담불라는 캔디의 아누라다푸라를 연결하는 간선도로에 있는 마을이며 마을이라 해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사원이 있다는것 조차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될 아주 작은 마을이다. 간선도로와 쿠루에갈라에서 뻗어 나온 길이 닿는 부근에 펼쳐지는 시니가는 그래도 아름답게 북적이지만 2km정도 남쪽에 있는 구 시가는 양쪽 도로변에 집들이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다.
그래도 담불라가 스리랑카에서도 널리 알려진 마을이 된것은 그만큼 이 석굴사원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바위산 정상 부근에 뚫린 이 천연 동굴에는 극채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고 아주 많은 불상이 조각되여 있다. 이 석굴에 들어가면 그것들이 놀라운 박력으로 다가와 신성한 느낌을 받지 않을수 없게 된다. 불교 설화를 그린 수많은 벽화가운데는 신할라인과 타밀인 사이의 전쟁을 그린것도 있다.
(시기리아)
시기리아는 고대부터 불교 승려들의 수련장이였으며 5세기 후반에 1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곳을 다스리며 장대한 바위산의 걸작을 남긴 광기의 왕 카샤파의 전설은 스리랑카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있다. 카샤파는 459년 477년에 아누라다푸라를 통치했고 넓은 저수지를 건조한 다투세나 왕의 장남이였다. 카샤파에게는 배 다른 동생 목갈라나가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왕족 혈통의 여인이였고 카샤파의 어머니는 평민이였다.
이때문에 카샤파는 동생에게 계승권을 빼앗길가바 두려워 아버지인 다투세나 왕을 감금하고 왕위를 박탈했다. 동생 목갈라나는 형의 이런 행동을 증오하며 인도로 망명했다. 그후 카샤파는 아버지에게 감춘 재산을 전부 내 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다투세나 왕은 아들을 자신이 건설한 칼라웨아 저수지로 대려가 저수지를 가리키며 이것이 내 재산의 전부다라고 말 했다. 이에 분노한 아들 카샤파는아버지에게 원한을 품고 부하를 시켜 살해한다.
동생 목갈라나의 보복이 두려워 했기 때문이였는지 아버지를 살해한 후회와 고통때문에 카샤차는 신들린 사람처럼 시기리아의 깍아지른 듯한 바위산 위에 궁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7년 후 그는 그의 왕좌를 산 정상의 궁전으로 가져갔으며 그리고 11년후 이복동생 목갈라나가 인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그의 형과 싸우러 왔다. 형재간의 싸움이 한창일때 카샤파가 타고 있던 코끼리가 전진하던 방향에 나타난 수렁에 다리가 빠졌다
통제력을 잃은 카샤파의 군대는 후퇴한다. 혼자 남겨진 카샤파는 단검으로 목을 찔러 자살하고 말았다. 그후 목갈라는 시기리아의 왕궁을 불교 승려들에게 기증하고 수도를 다시 아누다라푸라로 옮겼다. (세계 유네스코 1982년 제294호 문화유산 지정)
(프론나루와)
10세기 말에서 11세기에 걸쳐 스리랑카는 격동기를 맞았는데 남인도의 쵸라 왕조는 대군을 보내 신할라 왕조의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정복하자 신할라 왕조는 어쩔수 없이 수도를 플론나루와로 옮겼으며 신할라 왕인 비자야바후 1세는 관개설비를 복구하고 국가건설과 불교 보급에 힘을 쏟았다.
그 뜻을 이어받아 12세기에 비자야 바후1세의 손자인 파라쿠라마 바후1세는 관개용 저수지 파라투라마 사무드라와 다수의 건축물을 세우고 플론나루와를 불교 도시로 개발했다 사원이 많아짐에 따라 성역이 되여 태국이나 버마등지에서 승려들이 많이 찾아 오고 있다. (세계 유네스코 1982년 제295호 문화유산 지정)
(아누라다푸라)
석양속에서 거대한 탑이 그림자를 남기며 천천히 어둠속으로 사라져간다. 아누라다푸라 약2500년젼에 이곳은 스리랑카의 최데의 도시였으며 그 문명을 상징이라도 하듯 거리의 곳곳있는 탑은 하늘을 향해 장대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고 수많은 조각은 어느것이나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불교는 이 지역에서 스리랑카 전역으로 그리고 버마 타일랜드 캅보디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이 지역에서 번영했던 왕조는 매우 수준이 높은 문명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쓰고 있는 관개시설이나 상하수도는 그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누라다푸라에서 번영했던 이 왕조는 남인도에서 펴 들어온 침입자와의 거듭된 전쟁끝에 1400여년에 걸친 영화의 막을 내리게 된다. 아직도 스리랑카에서는 민족간의 문제가 끊이지 않지만 분쟁의 시초라 할수 있는 도시는 마치 그런일 따위는 잊은 듯이 평화로운 전경으로 여행객을 맞아준다.
스리랑카 방방곡곡에서 순례하러 온 가족 일행과 근엄한 표정으로 경을 외우는 수도승 나무위에서는 원숭이들이 장난을 치며 오가고 한가라게 오가는 우마타는 마치 유구한 시간속을 지나는듯 하다 (세계 유네스코 1988년 제297호 문화유산 지정)
(관광 명소 소개)
(불치사)
불치사는 캔디 호반의 차분한 풍취를 보여 주고 있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교사원이며 불치사는 살색 벽에 갈색 지붕을 한 신할라 건축양식의 팔각형 불당이 아름답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사원 내에는 크리스탈 바위를 깍아 만든 석가의 좌상 정밀한 조각이 새겨진 돌문 옅은 감색의 화려한 당초 모양으로 만들어진 천장등이 차분한 사원 내부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사원 안에 봉납되여 있는 불치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석가를 화장할때 입수한것이라고 말한다.
그후 4세기에 인도의 오릿사주 카링가 왕자가 머리카락 속에 감춰 실론에 들려와 아누라다풀에 봉납했다. 그 뒤로 수도를 롦길때마다 불치도 함께 이동했으며 마지막에는 캔디에 보관되였다. 불치가 캔디로 옮겨진 것은 1590년 캔디 왕 수리야1세 때였는데 그는 불치를 모시기 위해 2층 건물의 사원을 지었다. 그리고 3대 아래인 신하 왕이 사원을 신축하였으며 불당은 캔디의 마지막 왕 라자신하에 의해 건설되것이다.
팔각형 탑은 19세기 전반 영국점령시대 1796년-1948년에 유치장으로 바뀌었으나 지금은 야자잎 사본이 소장된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불치를 매우 소중한것으로 여겨 왔으며 왕권의 상징으로서 불치가 있는곳이 바로 스리랑카의 수도였다. 16세기 후반 그리스도교인 포르투갈인이 불교도의 혼이라 할수 있는 불치를 빼앗아 인도의 고아지방에서 부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신할라인들은 가짜 불치로 포르투갈인을 속여 진짜 불치는 캔디에 안전하게 보존할수 있었다는 사연도 있다.
사원은 새벽부터 황홍무렵까지 개방되여 있어 참배가 자유롭지만 불치가 있는 방의 문이 열리는 것은 하루에 세번 행해지는 푸쟈때 이다. 이때는 스리랑카 각지에서 모여든 참배객으로 원내가 북적거린다. 악기소리와 더불어 공손히 공물을 바치는 의식이 행해지고 사람들의 진지한 기도가 이어진다. 불치 실물이 공개되는 일은 극히 드물며 실제로 볼수있는것은 작은 다고마 모양을 한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금제 상자이다. 이 상자는 일곱 겹으로 되여 있으며 그 안에 불치가 있다. 불치의 실물이 공개될 때는 금으로 만든 연꽃 모양의 접시위에 놓여진자.
(페라데니야 식물원)
캔디관광에서 빼 놓을수 없는 곳 가운데 하나이며 총면적6평방km의 넓이로 걸어서 전부 구경하려면 꼬박 하루라도 부족할 정도이며 식물의 종류가 4천종 이상이나 된다 그 때문인지 식물원내에는 자가용이나 자전거로도 돌아 볼수 있다. 1821년 식물원으로서 문을 열었는데 그대까지는 14세기의 왕 파라쿠마라 바후3세가 왕비를 위해 만든 정원으로 유명했으며 별명인 로얄 가든은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붙은 것이며 원내는 지금도 그 궁전의 유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또 가는곳마다 동물의 모습을 볼수 있어 자연을만끽할수도 있는 곳이다.
(가달라 데니야 사원)
캔디 주변에는 작지만 매력있는 옛날 사원이 매우 많으며 그러나 한결같이 교통이 불편한 산속에 있다는 것이다. 우선 페라데니야의 서쪽 캔디에서 6km떨어진 가달라데니야 사원이 있다. 스리랑카에서도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1344년에 건립된 석조건물이다. 석상이나 옻칠이 되여 있는 문이 볼거리이며 이곳에서 3km정도 남쪽에는 랑카릴라케내부의 벽화는 300년젼의 것이라고 한다. 반대로 캔디 동쪽으로 약9lkm지점에는 데갈도루와 사원이 있는데 18세기 왕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캔디 왕조기의 양식으로 벽화가 매우 유명하며 당시의 관습이나 풍속을 소개하도 있어 매우 흥미롭다.
(담블라 석굴사원)
도로에서 조금 들어가 토산품을 파는 가게가 늘어선 지역을 빠져 나오면 작은 건물이 서 있다. 이곳에서 표를 사며 너무 작아서 지나치기 쉬운 곳이지만 표를사지 않으면 사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여기서부터 울퉁불퉁하고 미끄러운 바위의 경사면을 올라 간다 중간에 비교적 평평한 곳까지 오면 여기서부터는 계단이다. 상당히 힘이들지만 15분정도 오르면 사원입구에 닿는다.이곳의 높이는 180m정도이지만 평원에 우뚝 솟은 바위산이어서 주변의 숲을 내려다 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20km가량 떨어진 시기리야도 멀리 보이며 입구에서 신발을 맡기고 맨발로 들어간다.
제1동굴(데바 라자 비하라)
이름은신들의 왕의 절 이란 의미이며 가장 오래된 석굴인데 여기에는 이 사원 최대의 불상인 열반불이 누워 있다. 벽과 같은 자연석으로 조각된 것으로 전체 길이가 약14m이며 이 거대한 본존불은 전신이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발바닥만은 빨갛게 불꽃같은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제2동굴(마하 라자 비하라)
위대한 왕이란 절을 세운 도투게무누 왕으로 절안에 그의 석상도 있다. 제2동굴은 담불라 최대의 동굴이며 폭이 약52m깊이가 약25m 높이는 입구 부분이 약6m이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낮아진다. 동굴안에는 56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으나 이곳에서 볼 만한것은 뭐니뭐니해도 벽과 천정에 그려진 벽화이다 석가의 생애 스리랑카의 역사도 그려져 있으며 그 가운데는 신할라인과 타밀인의 전쟁을 그린것도 있어 매우 흥미롭다
제3동굴(마하 알트 비하라)
이름의 뜻은 위대한 새로운 절 이름 그대로 18세기의 57개의 불상이 있는 곳이다.
제4동굴(파스미사 비하라)
이름의 뜻은 서쪽의 절로 좌상이 매우 많은 곳이다.
제5동굴(1915년에 지어진 가장 새로운절)
1915년에 지어진 가장 새로운 절이며 석굴은 이와 같이 제1동굴에서 제5 동굴까지 오래된 순서대로 늘어서 있으며 그러나 제1 동굴의 벽화 대부분은 17세기의 왕 세나라트의 명에 의해 복구되였고 제3동굴을 만들 때에도 많은 벽화가 복구되였다. 복구라고 해도 전에 그려져 있던것을 그대로 재현하는것과 전혀 별개의 그림을 넣는 경우가 있음으로 지금 남아 있는것이 어느때의 그림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시기리야이 프레스코화)
바위산 입구에서 걸어서 20분정도 거리에 있으며 그 중간쯤에 영국이 만들었다고 하는 주위에 청망두른 철제 나선 계단이 이 있으며 이 계단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가 이었다고 한다. 계단은 경사가 심한데다 자주 강한 바람이 불어오곤 하므로 짐은 등에 지는등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오르도록 한다. 계단을 다 오르면 돌출된 바위면에 선명한 색채로 그려진 미녀의 모습이 있다. 5세기의 작품으로 여겨지지 많을 만큼 아름다운 충취를자아낸다. 그 농염한 자태와 신비스러운표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보릴것 같다.
이 벽화는 크게 3층으로 되여 있으며 우선 바위면에 왕겨나 까보나이트(유기섬유)를 석은 타미이른 흙(점토의 일종)으로 발라 굳힌다 다음에는 석회와 모래를 석은 점토로 다시 칠하고 마지막으로 이전보다 더 두껍게 꿀을 석은 석회로 매끈하게 바른다. 그 위에다 야채 꽃 잎 나무 즙등을 재료로한 적 황 노색 안료로 미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카샤파왕이 살해한 아버지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이 미녀 벽화를 그리게 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림속의 여자들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옛날에는 이 바위산 벽에 미녀 들이 500명 정도 그려져 있었다는데 지금 남아 있는것은 18명 뿐이다. 그 대부분이 비바람에 침식디였고 또 그중 몇개는 1967년 반달인의 공격으로 지워져 버렸다고 한다.
(도서관 유적 포트굴 비하라)
저수지 파라쿠라마 사무드라 옆으로 난 넓은 도로에서 숲으로 들어가다 보면 4개의 작은 다고바에 불러싸인 돔 형 건물이 있으며 정적의 땅에 세워진 우주기지 같은 느낌이 든다 이곳은 예전에 도서관이었던 곳인데 야자잎으로 만든 불교 경전이 보관되여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원형으로 되여 있는데 여기서 불전등의 문헌을 낭송했다고 한다.
(바타다게)
쿼드랭글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원형 불탑이다. 사방으로 난 입구에는 각각 문스톤과 가드스톤이 있는데 특히 북쪽 입구에 있는것이 비교적 그 형태를 제데로 유지하고 았다. 가드스톤은 입구에서 악마가 들어는것을 막아서 내부의 본존을 지키기 위해 불탑이나 절 입구에 세웠다. 문스톤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나타내는것인데 아누라다푸라의 것과 무늬가 다르고 숫소도 없다. 옛날 이곳을 참배한 사람들이 이 문스톤 위에서 발을 씼고나서 불탑안에 들어갔다.
이 불탑은 플론나루와가 수도가 되기 이전 7세기경의 것이라 하는데 가운데 있는 다고바는 아누라다푸라의 실라 메가반나 왕이 세운것으로 옛날에는 절의 일부였다. 벽의 조각은 닛상카 말라 왕의 명에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타다게)
바타다게의 거의 정면에 있는 불치사의 흔적으로 12세기에 닛상카 말라 왕에 의해 건설되였으며 문은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 위엄스런 산그크리트 문자의 비문이 남아 있다. 이것은 닛상카 말라 왕을 칭송하는 글이라 하며 비문의 주위에 있는 댄서와 음악가들의 조각도 움직이고 있는것처럼 느껴져 매우 흥미롭다.
(고대의 책 갈포타)
하타다게 동쪽에 있는 야자잎 책 형태를 한 석비(돌책)라는 별명이 붙어 있으며 길이 약9m 폭이1,5m 두께 44-66cm인데 닛상카 말라왕의 멸령에 의해 약100km나 떨어진 미힌탈레에서 가져온 돌에 문자를 새겼다. 비문은 인도에서 쳐들어온 침략자에 관한 내용과 플론나루와 주변의 작은 나라들과의 관계 그리고 닛싱카 말라 왕에 대한 찬양등으로 되여 있다.
(아누라다푸라 최고의 투파라마 다고바)
루완웰리 세야 대탑에서 북쪽으로 약500m떨어진 푸르른 탑으로 4세기 후반에 석가의 오른쪽 쇄골을 모시려고 세운 것이며 완공당시에는 건초를 쌓은 듯한 산모양이었던것 같으나 1894년에 재건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탑 둘레에는 몇개의 돌기둥도 세워졌다. 이것은 탑에 울타리를 치려고 만들어던것 같다. 지금은 스러져 가는 기둥도 있어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루완웰리 세야 대탑)
버스나 열차의 창 너머로 루완웰리 세야 대탑이 보이기 시작하면 차안의 사람들은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누라다푸라에 도착을 알리는것이 바로 이 탑이다. 우완웰리 세야 대탑은 유적지구 중심부에 세워진 거대한 탑이다. 스리 마하 보리수에서 이 탑에 이르는 길은 가로등이 있는 아름다운 석조 보도로 이어진다. 스리 마하 보리수의 돌문을 나와 이 석조 보도를 걷기 시작하면 우선 오른쪽에 로하 파사다라 라고 불리는 돌기둥들이 있다.
로하 파사가를 지나 그 끝에 우뚝선 루완웰리 세야 대탑을 향해 걷는다. 이 탑은 수많은 코끼리 조각에 둘러 싸여 있는데 새하얗고 엄청나게 크다. 바블 세이프라 불리는 만두 모양의 탑으로 높이는 55m이며 처음 완공했을 때는 무려 110m정도의 높이였다고 한2세기의 도투게무누왕 시대에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왕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틱사 왕자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완성시켰다.
도투게무누 왕은 남인도에서 침략해온 티밀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차례의 전쟁이 있었는데 도투게무누 왕 말년에 남인도의 엘라라 왕이 싸움을 걸어 왔다. 이때 사다 팃사 왕자는 선두에 서서 싸우기를 원했으나 아들을 염려한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뒷날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 왕자는 이 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된 아버지를 위해 대나무와 천을 이용해 하루밤 사이에 탑이 완성된 모습을 만들어 죽기 직전의 어비지에게 보여 드렸다고 한다. 우대한 왕 도투게무누 그의 모습은 정문 왼쪽에 있는 조각을 통해 알수 있다.
(스리 마하 보리수)
이수루무니야 정사에서 북쪽으로 약1.2km지점에 아누라다푸라가 불교의 성지라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인식시켜 주는 곳 스리 마하 보리수가 있는 곳이다. 기원전 3세기에 인도 아쇼카 왕의 딸 상가밋타가 인도 부다가야의 보리스 부처가 도를 깨쳤다고 하는 철책을 만들었다. 지금은 많은 순례자가 이곳에 기도를 드리려 와 이 철책에와우(기)를 묶고 석대위에 꽃이나 코코넛등을 공물로 바치고 있다.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순례자들의 모습에서는 부러울 정도의 신앙심이 느껴진다. 이곳의 보리수는 푸르고 무성하지만 수령이 2000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늘다. 그러나 순례자들의 기도를 받아 들일것만 같은 강한 그 무엇이 느껴진다.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목록 소개)
1)시기리야 고대도시-Ancient City of Sigirya(세계 유네스코 1982년 제294호 문화유산 지정)
2)폴론나루와 고대 도시-Ancient City of Polonnaruwa(세계 유네스코 1982년 제 295호 문화유산 지정)
3)아누라드하푸라 신성도시-Sacred City of Anuradhapura(세계 유네스코 1988년 제297호 문화유산 지정)
4)캔디 신성도시-Sacred City of Kandy(세계 유네스코 1988년 제298호 문화유사 지정)
5)갈레 구 도시와 요새-Old Town of Galle & Fortffcations(세계 유네스코 1988년 제299호 문화유산 지정)
6)담블라 황금사원
(Old Town of Galle Port unesco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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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날씨 비자 환율
1. 스리랑카(Sri Lanka) 국가 정보
수도: 코롬보(Colombo)
면적: 한반도의 1/3배 크기
인구: 2,100만명 (2008년)
날씨: 열대 몬순( 연평균 27℃)
인종: 싱할리(74%), 스리랑카타밀(13%),인도타밀(7%), 무어(6%)
언어: 싱할리어와 타밀어(공용어),영어
종교: 불교(70%),이슬람(8%), 힌두교(7%)
독립: 1948년 영국에서 독립(1948.2.4)
정부: 대통령제,수상
화폐: 루피(Rupee) / US $1= 130.06루피 (2013.12)
시차: 한국보다 3.5시간 늦다(한국이 오전 9시면, 자카르타 오전 5시30분)
전기: 230~240V 50Hz 사진보기: 국가별 전기플러그 형태
도로: 우측통행 (운전석이 오른쪽/한국과 반대) 국가별 통행방향
스리랑카의 위치지도
2. 국가 유래
기원전 6세기경 싱할리족이 인도에서 타밀족 침략을 피해 스리랑카로 이주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16세기부터 서양열강의 침략이 시작되기 시작했는데, 포갈투갈, 네덜란드, 영국순으로 정복자가 바뀌었다. 영국은 19세기 싱할리왕조를 멸망시키고 완전히 식민지화를 완성시켰다. 이후 영국은 농업 노동력 착취를 위해 인도에서 타밀족을 강제로 스리랑카로 이주시켰다. 이때부터 타밀족과의 민족 갈등이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내전에 원인이 되고 있다.
3. 스리랑카날씨
열대 몬순기후이며 우기와 건기 2가지 계절이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우기 : 5월 - 11월 : 3,4월이 가장 더운계절, 우기지만 계속 비가 오는 날씨는 아니다.
건기 : 12월 - 4월
4. 스리랑카비자 비자필요 및 면제국가
입국시 공항에서 30일간의 도착비자를 특별한 준비사항 없이 받을 수 있다
5. 항공편
한국과 직항노선이 없으므로 홍콩, 싱가포르, 콸라룸푸르, 동경을 경유해서 입국해야 한다.
6. 공항 도착후
택시를 이용 시내(콜롬보)로 이동한다 요금은 $10~$15 미국달러 정도이며 미터기 요금을 받는다. 요금 흥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버스등의 대중교통은 외국인에게 적합치 않다.
7. 스리랑카환율
$1(미국달러)는 130.06루피(SLK)이며 도착 후 공항에서 환전하는 게 가장 유리하다 (2013.12)
100루피 =약900원
8. 현금.신용카드
대형 쇼핑센터, 백화점은 신용카드 사용가능 그 외에는 현지 루피화 사용
9. 국제전화 이용(국가번호 +94 )
(한국->스리랑카): 001/002+94+전화번호
(스리랑카->한국): 00+82+2+전화번호 (2: 서울 지역번호)
10.물가정보
공산품의 경우 수입에 의존하므로 가격이 한국보다 비싸다. 그러나 인건비가 싸므로 서비스 요금은 저렴하다
생수1리터: 60루피
영화관람 : 250루피
맥주1병(주점): 100루피
호텔1박(모텔): 600루피
11. 한국인 거주(교민,주재원)
약 700명 정도
12. 스리랑카 전기 230~240V 50Hz
국가별 전기플러그 형태
13. 기타
황열병,뎅기열 예방을 위해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주의 해야한다.
물은 유명 상표 생수를 사서 마시거나 끓여서 마셔야 한다. 참고: 조심해야 할 전염병(동남아시아)
팁 문화가 있다. 약간의 팁을 위한 잔돈 준비
소매치기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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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지방과 낮은 지역은 전형적인 열대지방의 기후를 보이지만 누와라엘리야(해발1,890m)와 같은 섬 중앙의 고원과 산악지대는 연중 기온이 섭씨 16도로 항상 봄, 가을과 같아 생활하기에 아주 적당한 기후이다.
서해안과 남해안, 고원지대 방문에 제일 좋은 시기는 12월과 3월 사이이다. 5월에서 9월은 동해안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다. 스리랑카는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나라지만, 요즈음 많이 알려지기 시작 한 나라입니다. 스리랑카는 인도 아래에 있는 섬나라로 언어는 자국어와 영어를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국 식민지 였던 스리랑카는 영국식 영어를 사용합니다. 현지 사람들도 영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학교에서도 영어로 수업을 합니다. 교육수준이 높은 나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교육열이 높고 교육환경이 잘 되어있어서 스리랑카의 국제학교는 수준 높은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화유산이 많은 나라이고 불교문화로는 유명한 나라입니다. 역사도 깊고 여행할 곳도 많고 교육수준 높아서 한번 스리랑카를 방문한 사람들은 너무나 좋은 나라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 한반도의 1/3(또는 남한의 2/3)크기로 인도 동남부에 있는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 스리랑카 주민의 70%를 차지하는 싱할라족은 BC 6세기경에 인도 북부로부터 건너와 선주민(先住民-야차)을 정복하고 왕국을 이룩하였다. 인도는 크게 데칸 지역을 중심으로 남부와 북부로 구별된다. 데칸은 산스크리트어로 '남쪽 나라'를 뜻하는 다크쉬나파타가 와전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남쪽이라는 방법보다 북인도의 아리아인이 자신들의 수준 높은 문화에 비하여 남인도 드라비다인의 이질적인 문화를 후진적이라고 낮추어 부르는 데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로마제국과도 독자적으로 해상무역을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풍요로운 상태였다. 6세기 후반 싱하 비슈누 왕때에 전성기를 맞는다. 팔라바의 모든 왕들은 철저한 힌두교도였다. 이를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계급들이 형성되었다. 여성의 지위도 비교적 좋아 힌두 사회의 수많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사회적 종교적 행사에 자유롭게 참가하고, 상속권이 보장되어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수도 : 뉴델리 공용어 : 힌두어, 영어 정부 형태 : 연방 공화제 독립 : 영국으로부터 독립 (1947년 8월 15일) 면적 -전체 : 3,166,414㎢ (7위) -내수면 비율 : 9.56% 인구 : 1,103,371,000명 (2위) 통화 : 루피 인도 공화국(印度共和國, 힌디어: भारत गणराज्य 바라트 가나라자, 영어: Republic of India, 문화어: 인디아)은 남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인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가 면적은 세계에서 일곱째로 넓으며, 인구는 중국에 이어 둘째로 많다. 북쪽으로는 중국, 네팔, 부탄, 파키스탄, 동쪽으로는 미얀마, 방글라데시, 벵골 만,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해, 남쪽으로는 인도양, 스리랑카와 맞닿아 있다. 인도는 불교,힌두교 등의 발상지이고, 각 지역마다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 이기도 하다. 인도의 역사 인도 문명의 기원은 기원전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서 발원한다. 그러나 기원전 1500년~12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이란 고원을 넘어 인도로 침입하여 인더스 문명은 파괴되었다. 아리인들은 갠지스 강 유역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델리 근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나갔다. 이 시기에 아리아인들의 베다 신앙에서 힌두교가 파생되어 나왔고, 산스크리트 어가 발전해 이후 2,000여 년 동안 인도의 국어로 사용되었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이보다 늦은 기원전 6세기에 나타났다. 북부 인도는 찬드라 굽타(기원전 321년경 ~ 기원전 185년)의 통치 아래 최초의 힌두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로 통합되었고 그 손자인 아소카 대왕의 시대에는 인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한 대제국으로 확장되었다. 인도는 마우리아 왕조의 붕괴 이후 수많은 소왕국이 난립하였다가 굽타 왕조(320년 ~ 480년) 시대에 다시 통일되었다. 이슬람 교도들의 침입은 1000년경 부터 시작되었다. 14세기 초, 모하마드 이븐 투글루크가 델리 술탄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북부 인도에서의 이슬람 지배는 16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남부 인도에서도 역시 이슬람계 바만 왕조가 성립(1347년)되어 1527년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며 이와 함께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르 왕조가 1336년에서 1556년에 걸쳐 인도의 남부 지방을 양분하며 통치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여행(1498년)을 기점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상륙하여 인도와 유럽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들어서는 같은 목적을 가진 포르투갈인·영국인·프랑스인·네덜란드인들 간에 경쟁관계가 형성되었다. 16세기초에는 이슬람계 왕조인 무굴 제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했다. 1526년 바부르가 세운 이 제국은 악바르와 아우랑제브 치세 동안 세력을 확장하고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힌두 왕국인 마라타 왕국이 17세기말 세력을 뻗치면서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 동안 영향력을 키워온 영국 동인도 회사는 차츰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식민 세력들을 몰아내고 1757년에 무굴 제국을, 1818년에는 마라타 왕국을 굴복시킨 뒤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한 영국의 통치는 세포이 항쟁(1857년) 이후인 1858년에 영국 정부가 인도를 직접 통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초기의 인도 민족주의는 인도 국민 회의(1885)와 전 인도 이슬람 연맹(1906)의 창설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1857년의 세포이 항쟁 후 거의 60여 년 동안 대다수의 인도인들이 영국의 지배에 순응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이슬람 교도와 힌두 교도 모두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 간디가 이끄는 인도 국민 회의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비협력운동을 전개하자 영국은 1919년과 1935년 인도 행정법을 통해 인도에 제한된 범위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간디를 비롯한 인도인들은 완전독립과 인도의 통일을 요구했다. 인도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47년 8월 15일 독립을 획득했으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인도 공화국과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파키스탄으로의 분리를 초래했다. 펀자브와 벵골은 주민들의 종교성향에 따라 각각 2개로 분리되어 양국에 포함되었으며 카슈미르는 아직까지도 분쟁이 계속되는 상태에 있다. 인도에서는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한 국회가 1952년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확정되지 않은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196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1965년에는 파키스탄과 잠시 국경분쟁을 겪었다. 1967년에는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1984 암살)가 의회의 지지를 받아 총리로 취임했고 인디라 간디가 암살된 이듬해 아들인 라지브 간디(1991년 암살)가 총리에 취임했다. 1971년 파키스탄과 국경 2곳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동(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시크교도들이 펀자브 지방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인종과 종교로 인한 갈등으로 불안정한 정세가 계속되고 있다. 20세기 후반 인도는 괄목할 만한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가장 인구가 많은 의회 민주주의를 잘 이끌고 있다. 인도의 행정구역 인도의 행정 구역은 28개의 주, 6개의 연방 지역, 그리고 1개의 수도권으로 나뉜다. 수도는 뉴델리 (New Delii) 이다. 인도의 정치 원래는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였으나, 1950년 1월 24일부터 공화국이 되었다. 이 나라는 영국식 의원 내각제를 채택함으로써, 총리의 권력이 강력하다. 의회 구조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연방공화국인 인도는 25개주와 7개 연방직할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는 연방정부와 이들 주정부 간의 역할 분담에 의해 국정이 운영된다. 연방정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계획·실행되어야 할 여러 사항들, 즉 국방, 외무, 교통·통신, 화폐 및 동전 주조, 고등 법원 운영 등에 관한 업무를 관할하는 한편 그외 경찰, 공중보건, 교육, 임산자원 관리 등 지방업무의 성격을 띤 분야는 주정부에서 담당한다 인도의 주민들 인도에 거주하는 주민을 인도인이라 부른다. 인도에서는 아랍인, 타밀인, 벵골인,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중국인, 프랑스인등 소수 민족이 존재한다. 인도의 종교 힌두교는 다수가 신봉하고 있는 종교이다. 제2의 종교 세력은 이슬람교이며 소승 불교 세력도 있다. 펀자브 주에서는 시크교를 믿는다. 기타 토착 종교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기독교도 존재한다. 인도 기독교 교파로는 1947년 조합교회, 장로교, 개혁교회가 연합한 인도 성공회 교회인 남인도교회(The Church of South India (United))[2], 침례교회, 루터교회, 구세군, 성 토마스 복음교회, 로마가톨릭, 말란카라 시리아정교회등이 있다. 인도의 경제 인도의 경제성장 속도는 상당히 느린 편이나 정교한 행정조직과 관료제도, 양호한 교통·통신망, 우수하고 풍부한 인력, 잘 정비된 공업기반 등 일반적인 개발도상국들과는 다른 여건을 갖추고 있다. 1947년 독립 이후 많은 투자를 통해 공업부문에서 현재 세계 20위권 내의 공업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나, 무역부문에는 아직 그 영향이 미치지 않아 수출량이 세계교역량의 1%를 밑돌고 있다. 한편 소수 지배계층은 매우 높은 수준의 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저수준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등 소득격차가 매우 큰 것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매년 1,000만 명을 넘는 계속적인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실업자의 증가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도 정부는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인도의 문화 인도의 예술과 문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 예술에서 현대 예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독립 이래 연방 정부와 여러 주정부는 랄리트칼라 아카데미(국립 미술 아카데미)·상게트나타크 아카데미(음악·무용·드라마 아카데미)·사히티아 아카데미(국립 문학 아카데미) 등 여러 문화·예술 관련기관을 설립하여 예술·문화활동을 촉진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도는 또한 영화 문화 산업이 매우 발달해있다. 인도 사람들은 바느질을 한 옷이 더럽다고 생각해서 전통 의상도 바느질을 안 하는 사리를 입는다. 인도의 대외관계 인도는 남북간 동시수교국으로, 한국과는 1962년 3월 영사관계를 수립한 이후 1973년 12월 10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했으며 북조선 역시 1962년 영사관계 수립을 거쳐 1973년 12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인도는 국제무대에서 한반도 문제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편 경제문제 등에서 한국과의 관계 증진에 힘쓰고 있다. 양국간에는 1974년 8월 맺은 무역협정을 시작으로 문화협정(1974년 8월)과 과학기술협력협정(1976년 3월)이 체결되었다. 교역량이 점차 증가추세에 있어 1996년 현재 대한수입액 11억 7,697만 달러, 대한수출액 9억 7,572만 달러이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인도 간의 양자 외교는 대체적으로 친밀하고 강력한 관계였다. 그러나, 일본은 피폭국이었기 때문에, 인도가 핵실험을 했다는 이유로 인도와 거리를 둔 시기도 있었다. 인도는 최근 현저한 경제 발전과 정보기술의 실적이 주목 받고 있으며, 또한 G4 국가로 함께 행동하는 등 관계 강화를 지향하고 있다. 일본 외무성은 2006년에 아시아대양주국(局) 중에 새로운 부문으로서, 남아시아부(部)를 설치하였다. 2006년 12월 인도 만모한 싱 총리의 일본 방문은 "일본-인도 전략적이고 국제적인 파트너십을 향한 제휴 선언"을 서명할 때 최고조에 달하였다. 또한 2008년 10월에, 일본-인도 양국 정상은 일본-인도 안전보장협력공동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일본에 있어서 인도는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안보 분야에서 공식적인 협력 관계를 맺은 세번째 국가가 되었다. [3] 인도와 파라과이는 1961년 9월 13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인도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겸임 대사와 아순시온에 있는 명예 영사가 파라과이에서 외교활동을 수행한다. 2005년부터 파라과이는 뉴델리에 대사를 두고 있다. 마이소르(Mysore)는 카르나타카 주의 상징으로 통한다. 14세기부터 영국 식민 시대까지 마이소르 지역을 통치한 우데야르 왕조의 궁성으로 화마를 겪은 뒤 20세기 초 재건됐다. 마이소르 궁전 앞에 서면 그 규모와 수려한 자태에 압도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인도 각지에서 무수한 위대한 군주가 명멸했지만 이만큼 뛰어난 조형미의 거대 건축물을 축조한 경우는 없었다. 마이소르 궁전의 수려함은 해가 저물면 더욱 빛을 발한다. 일요일과 국경일 저녁 7시부터 8시까지 궁전 외곽에 설치된 수만 개의 전등이 일제히 불을 밝힌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성곽의 벽면을 따라 곡선과 직선의 빛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이소르는 우데야르 왕조가 수도로 정한 이후 남인도의 중심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담불라의 황금 사원(Golden Temple of Dambulla; 1991)
석굴 사원인 담불라 황금 사원은 스리랑카 중부 지방의 마탈레 지구(Matale District)에 위치한다. 성소 5군데와 함께 약 2,200년 간 내려온 신성한 성지 순례 유적지이다. 이 황금 사원은 스리랑카에 있는 석굴 사원 가운데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되어 있다. 황금 사원 안에서도 넓이 2,100㎡에 이르는 불교 벽화와 157개의 불상과 신상이 특히 유명하다. 담불라 유적군은 스리랑카와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종교의 예술성과 표현성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발굴된 석굴, 벽화, 불상과 신상 등은 크기나 보존 상태로 볼 때 상당히 독특하다. 사원에는 스리랑카 캔디(Kandy) 학파의 18세기 예술의 중요한 걸작들이 있다. 기원전 3세기에 만든 불교 석굴 사원 중심지인 담불라는 오늘날까지도 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석굴 사원이 있는 지역은 스리랑카 역사를 통틀어 동부와 서부 건조 지역(Dry Zones), 건조 지역과 중앙 산맥을 이어 주는 교통의 요지에 있다. 석굴 사원은 스리랑카 섬의 지질학 역사 연구에 중요한 지역인 역층 잔구(礫層殘丘; 섬 모양으로 고립된 둥근 구릉의 자갈이 많은 지대) 또는 침식 잔구 위에 만들어졌다. 이 유적은 이반카투와(Ibbankatuwa)에 있는 거석문화 묘지와 더불어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에 인간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를 보여 준다. 담불라 황금 사원은 스리랑카 섬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곧바로 세운 불교 건축물로서 이후 22세기 동안 줄곧 사용되어 왔다. 이 유적지에서 80개의 석굴 주거 지역의 잔해가 발굴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에 담불라 남쪽 벽의 석굴 주거지는 모두 사원으로 바뀌었다. 그 후에도 석굴 사원은 꾸준히 늘어났으며, 5~13세기에 특히 증가하였다. 석굴 사원들은 바위로 된 성소로 확장되었고, 석굴을 가리기 위해 벽돌을 쌓아 벽을 세웠다. 12세기 말에 이르러 니산카 말라(Nissanka Malla) 왕에 의해 상층부에 있는 동굴 바위에 조각을 하는 기법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그보다 앞선 암각술을 반영한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일반 형태와 배치가 당시부터 있었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석굴 발전의 주요 단계는 오랜 전통을 따르던 18세기에 행해졌다. 이때에 상층부가 복원되고 새로 단장되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변화는 이미 채색된 석굴의 표면에 벽화를 그리거나 덧칠하는 18세기 후반의 캔디 학파의 양식을 따른 것이다. 또 당시에 석굴에 있던 인자한 불상 그림에 본래 세부 형상이나 도해법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덧그렸다. 그리고 화면 벽을 다시 세우고 바깥쪽에 베란다를 만들기 위해 지붕을 얹었다. 왕족의 후원이 끊기는 때인 1815년부터 19세기 동안 전반적으로 불상은 계속 덧칠되었고, 표면은 계속 손상되었다. 1915년에 지역 내의 기부 덕분에 다섯 번째 동굴은 완전히 다시 칠할 수 있었다. 1930년대에는 유럽과 아시아 양식을 혼합하여 베란다를 새로 만들었다. 복잡한 석굴의 입구 현관은 18세기 양식으로 재건축한 듯하다. 담불라의 황금 사원은 아주 뛰어나면서도 독특한 복합 단지이다. 석굴 사원과 5개의 동굴에 있는 그림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크기의 입상이 157개나 된다. 담불라 황금 사원은 약 4000년 동안 유적지 전체에 자연을 풍성하게 잘 녹여 이용해 온 사례를 보여 준다. 여러 개의 개별 유적들과 한데 어우러지는 거대 유적지는 거석문화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발전 단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유적지에는 승원, 보리수 사원, 사리탑, 그리고 고고학 연구를 통해 가장 먼저 알려진 스리랑카의 마을들이 있다. 이곳은 유적들과 상당히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 어우러져 있다. 유적의 질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보존이라는 관점과 보존자들의 능력 범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유적지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유적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표면을 새로 칠했다는 것이다. 보존 방법상으로 초기 모습을 알아내려면 벽 표면이나 석상의 덧칠 층을 잘 벗겨 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석굴 표면을 주기적으로 다시 칠해야 한다는 오랜 전통 가치와 충돌하게 되지만 초기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다. 물론 석굴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 잠재된 습기와 유입되는 소금기 문제 때문에 많은 벽화를 ‘보수’해 왔다. 보존 노력을 하는 동안 제한된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오래된 작품 위에 새 바탕 면을 입혀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 행했던 작업은 나중에 강하게 덧칠된 것으로 인해 가장 초기의 작품은 살아남을 수 없고 아주 약간 이전의 작품만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암시했다. 기원전 18세기 초엽에 고용된 지반 나이데(Jeevan Naide) 일가는 오늘날까지도 벽화의 관리를 책임지고, 올라(ola) 잎으로 만든 필사본을 참고하여 작업하고 있다. 이 필사본은 석굴 단지의 배치와 벽화 기법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1990년과 1991년에 지반 나이데 일가와 지역 견습생들이 기술적 임무를 띠고 과학과 전통을 한데 아울러 유적을 보수하였다.스리랑카는 길이가 350Km, 너비가 180K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나라지만 다양한 지형의 영향으로 지역에 따라 상당히 다른 기후를 나타낸다. 고온 다습한 열대성 기후로 일년 내내 기온이 일정하다.
평균 기온 27도로 최고기온이 31도, 최저기온이 26도이다.
스리랑카 전체는 열대성 몬순기후에 속하며 적도 부근에서 불어오는 남서 계절풍 기간(Yala시즌 - 5월~9월)에는 남부, 서부, 중부 지역에 비를 뿌리고 벵골만에서 불어오는 북동 계절풍 기간(Maha시즌 - 10월~1월)에는 북, 동부 지역에 비를 뿌리지만 강수량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남서 몬순기
(5~9월)적도 부근에서 발생한 습한 공기를 포함한 계절풍이 남서 해안지대에서 고원지대로 이동하며 이때 섬의 동북부는 건조기이다.
인터 몬순기
(10월)무풍 기간으로 저기압에 의해 비가 내리거나 번개가 친다.
동북 몬순기
(11~3월)벵골만에서 오는 몬순이 섬의 북동부를 중심으로 하여 스리랑카 전체에 비를 뿌린다.
인터 몬순기
(4월)일년 중 가장 더운 시기이다. 때때로 저기압에 의한 비나 해양풍에 의한 뇌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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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인도 남부 타밀족의 침략을 받아 차차 그 세력이 밀리게 되었고, 타밀족은 섬의 북부에 따로 왕국을 수립하였다. 싱할라족의 왕조는 BC 3세기에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를 수용, 보호하였으며, 남방 상좌부(上座部)불교의 정통파로서 ‘실론 불교’의 전통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16세기부터는 유럽 열강의 침입이 시작되어 제일 먼저 우선 1505년 포르투갈인들이 해안지역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어 1602년에는 네덜란드인이 침입하여 포르투갈인을 몰아냈고, 1795년에는 영국이 네덜란드를 굴복시키고, 1815년에는 캔디에 근거를 둔 마지막 싱할라 왕조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영국 자본은 인도로부터 타밀족 노동자를 이주시켜 플랜테이션을 경영하였으며, 그 결과로 싱할라와 타밀 민족간의 대립이 심각해졌다. 한편, 유적 발굴 등에 따른 불교 르네상스가 싱할라족 사이에서 일어났으며, 인도의 민족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작용하여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국도 민족해방운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침내 1948년 2월 독립을 인정하였다. 독립 후에도 영국의 지배력은 상당히 남아 있었으며, 총독의 임명권도 영국 국왕이 보유하고 있었다.
1956년의 총선거에서는 자본가 지주계층을 기반으로 한 통일국민당 대신 농민과 중산계층에 뿌리를 둔 자유당을 주체로 한 연합전선이 정권을 잡았다. 연합전선은 중립주의의 추진, 공화제 이행(移行) 준비, 외국자본의 국유화 등에 힘썼으나 영국 세력과 승려, 지주 세력의 반대에 부딪쳐, 1959년 9월에 총리 반다라나이케가 암살당하였다.
1960년의 총선거에서는 반다라나이케의 부인이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어, 인도계 타밀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민족대립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경제정세의 악화로 1965년에 내각이 무너지고 친서구적(親西歐的) 성격의 통일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파(右派) 세력의 연립내각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 정세는 호전되지 않았으며, 1966년 12월에는 식량위기로 인해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국민의 불만을 배경으로 1968년 3월에는 자유당?평등사회당?공산당이 통일전선을 결성하였으며, 1970년 5월의 하원 총선거에서 2/3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반다라나이케 부인을 다시 총리로 하는 통일전선 정부가 형성되었다. 이 정부는 1971년에 상원을 폐지하고 1972년 5월 제헌국회에서 새 헌법을 채택, 스리랑카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좌익 연합정권은 비동맹외교노선을 추구하였으며, 1976년 8월에는 수도 콜롬보에서 비동맹국 수뇌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1971년에 극좌분자에 의한 무장반란이 일어나고, 물가?실업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으며, 평등사회당과 공산당이 1975년 9월과 1977년 2월에 각각 연합정권에서 이탈, 자유당 좌파의 일부가 신당을 결성하였다.
그리하여 1977년 7월의 총선거에서는 통일국민당이 압승을 거두고 자야와르데네 정권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8월에 소수민족 문제를 둘러싸고 항쟁이 발생하여 1971년의 무장반란이후 처음으로 전국에 외출금지령이 내려졌다. 1977년 10월에는 대통령 중심제의 헌법개정을 실시하고, 1978년 2월에 행정권을 가진 초대 대통령에 자야와르데네가 취임하였으며, 그해 9월에 1972년의 헌법을 폐지하고 새 헌법을 공포, 국명을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꾸었다'가보고 싶은 여행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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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의 역사
남인도는 다시 데칸 중심의 지역과 그 이남의 타밀 지역으로 나뉜다. 남인도 지역은 마우리야와 굽타왕조시대에도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채 어느 정도 독립된 권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마우리야 왕조의 인도통일로 북인도의 문화가 어느 정도 유입은 되었을지라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독자적인 나름대로 고도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 경향은 현재에도 지속되는 편이다.
드라비다인의 문화라고 지칭되는 남인도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에 이미 바다를 통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팔레스틴 지역 등과 교역을 하였고,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 왕의 석주에 나타난 비문을 통해 남인도 지역이 처음으로 북쪽의 아리아인 문명과 접촉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남인도 지역의 주민은 대부분 아리아인이 아닌 드라비다(타밀)인이었다. 그들은 주로 토템적인 씨족체제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토템의 상징을 숭배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이고 독립적인 문화는 마우리야 왕조의 통일제국 이후 점차 아리아인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고유 종교는 힌두이즘보다 아쇼카 왕의 불교전파로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을 먼저 받았다.
타밀 중심의 남인도 지역이 인도 역사상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략 기원전 2세기경으로 로마제국과의 무역을 통해 촐라, 체라, 판드야의 세 왕국이 형성되었는데, 이 세 왕조는 끊임없이 서로간의 세력다툼을 벌였고,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풍부한 자연의 산물과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농업으로 벼와 사탕수수 등을 경작했으며, 과일, 후추등도 풍부하게 산출되었다. 세 왕국의 군대는 초보적인 수준이었으며 특이한 것은 코끼리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말은 바다를 통해 수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 중 하나인 타밀어를 사용했다.
이 세 왕조는 후에 팔라바 왕조로 대체되면서 9세기까지 지속된다. 팔라바 왕조는 남인도 지역에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였으며,
그들은 많은 사원을 건립하고 힌두교와 산스크리트어를 적극 권장함으로써 남인도 지역에 힌두사상이 전파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남인도 타밀 지역에서의 힌두교는 주로 신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박티 종교의 형태로 위대한 힌두교 성자들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활약했다.
한편, 이에 비해 데칸 지역에는 카라벨라 왕국을 물리치고 사타바하나 왕국이 등장하여 중앙 인도 전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남북인도의 중개자 역할을 담당했다.
남인도에 최초의 제국을 이룩했던 사타바하나 왕국은 특히 쿠샨왕조의 남인도 진출을 저지하는 한편 페르시아만의 해상권과 자바와 수마트라 등의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아시아의 해상무역을 독차지하기도 하였다.
사타바하나 왕조는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했으며 사람들의 직업은 주로 농업, 상업, 수공업 등이었으며, 조세제도도 매우 관대하였다. 국가의 재정은 주로 토지세와 소금 무역의 독점권, 각지역의 조공으로 꾸려나갔으며 대부분 군대유지와 도시행정에 사용되었다.
대중적인 종교는 힌두이즘과 불교였으며, 타종교에 대해서 매우 관대하였다. 이 시기 문학과 예술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아리아인의 문화를 받아들여 산스크리트어가 속어화한 프라크리트어를 사용했으며 남북 인도의 교류를 재개하여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사타바하나 왕조는 인도의 역사와 문화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사타바하나 왕조는 바카타카 왕국을 거쳐 6세기경 나타나 브라흐마 또는 마누 신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찰루캬 왕조로 대체된다. 찰루캬왕조는 팔라바 왕국과 물고 물리는 전쟁을 계속하다 10세기경 촐라 왕조에 흡수된다.
촐라왕조는 고대 타밀 세 왕조 중 하나로 자그마한 속국으로 전락했다가, 9세기 중반 무렵 주위의 왕국들을 차례로 물리치면서 강력한 제국으로 부상했다. 촐라왕조는 특히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상무역을 활발히 펼쳤다.
촐라 왕조의 사회상 중 특이한 점은 신분상의 계급제도가 존재했지만 계급간의 통혼이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촐라 왕조는 근 200년 동안 남인도의 문화와 정치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정치 역사상 특징적인 요소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데 특히 자치정부의 실현과 강력한 해군력의 보유 그리고 타밀문학과 예술의 절정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가보고 싶은 여행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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