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332)/ 이탈리아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와 도미니크 수도원 및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Church and Dominican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with

The Leonardo da Vinci; 1980)

 

 

 

 

 

 

 

 

 

 

 

 

 

 

 

 

   롬바르디아 주[Lombardy] 밀라노 현[Province of Milano]에 속한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은 1463년에 준공되어 15세기 말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가 증축개축하였다. 특히 식당 건물은 이 건축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며, 이 건물 북쪽 벽에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1495~1497)이 있다. 다빈치의 이 작품은 회화 역사의 새 지평을 연 독보적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켈트 족이 세운 도시 밀라노는 4차례에 걸쳐 번영기를 누렸다. 4, 5세기에는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으며,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11~13세기에는 ‘자유 자치제[Free Communes]’가 수립되고 통합되면서 단시간 내에 인접 영토들보다 강대해졌다. 독일의 지배에 대항하여 자주권 투쟁과 레냐노 전투[Battle of Legnano; 1176]의 선봉에 섰다. 14세기와 16세기에는 비스콘티 가문이 밀라노를 지배했으며, 그 후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 하에서 밀라노 공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밀라노는 처음에는 프랑스, 그 다음에는 스페인에 예속되었다. 이 시기는 르네상스 시대로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Gian Galeazzo Visconti),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 루도비코 일 모로(Ludovico il Moro)는 두오모(Duomo)스포르체스코(Sforzesco) 성과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산 산티로(San Satiro) 성당과 같은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뛰어난 예술가인 도나토 브라만테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활발하게 작업 활동을 펼쳤다. 밀라노는 점차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하여 1800년대에는 웅장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전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밀라노는 나폴레옹 치하에서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정치적 부흥기에는 애국 운동의 발상지였다. 1463년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공작은 자신의 토지 일부를 도미니크 수도회에 기증하였다. 이 토지 안에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는 수도원이 있었다. 수도사들은 기니포르테 솔라리(Guiniforte Solari)에게 교회와 수도원의 건축을 위임하였고, 1463년에 건축이 시작되었다. 밀라노의 새로운 지배자 루도비코 일 모로(Ludovico il Moro)는 교회 건물의 확장을 위해 애프스(apse)와 사제관을 철거할 것을 명령하고, 브라만테에게 이 작업의 감독을 맡겼다. 우르비노 출신의 브라만테는 교회를 구조적으로 확장하고, 대규모 애프스와 기둥으로 둘러싸인 북 형태의 돔과 회랑식당을 증축하였다. 성당 안의 프레스코화는 1495년에 시작되어 1497년에 완성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수가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한 직후의 순간을 묘사하였다. 다빈치의 작품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제자 12명의 움직임과 표정을 훌륭하게 포착하여 예수의 발언이 제자들에게 미친 영향과 그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과거를 묘사하던 전통적인 방식을 파괴한 것으로 몇 가지 관념을 뒤흔든 것이었다. 예술가로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은 빛과 강한 원근법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식탁에 앉아 있는 이들 뒤편에 있는 3개의 창문과 그 너머의 풍경은 인물들을 측면에서 조명하는 역광에 대조되는 빛을 만들어 낸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피렌체 양식과 명암을 배합한 원근법이 조합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작품을 카스타뇨(Castagno)와 같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과 비교할 때, 그 차이점은 분명해진다. 전통적인 해석에서 유다는 홀로 묘사되어 있는 반면 예수와 다른 제자들은 테이블 건너편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러한 해석 방식을 거부하여 예수를 제자들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예수의 양쪽에 3명씩 네 무리의 제자들을 배치하였다. 왼쪽에 나란히 있는 바돌로메소(小)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안드레는 예수의 선언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두 번째 무리는 베드로유다와 요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베드로는 요한 쪽으로 기대어 있고, 요한은 예수 옆에 앉아 유다를 앞으로 밀고 있다. 유다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을 분리하지 않으면서 강조되었다. 오른쪽의 무리는 마태와 다대오, 시몬으로 구성되는데 그들은 열띤 토론에 빠져서 예수를 보지 않고 있다. 가운데에서 깜짝 놀라 예수 쪽으로 기대는 제자들은 도마와 대(大)야고보[요한의 형제 야고보]빌립보이며, 이들은 예수에게 자신들의 충성을 확인하느라 열심이다. 벽화 중심부의 소실점(消失點)에는 예수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기름이 아닌 템페라(tempera)를 사용하여 습기에 약한 두 층의 회벽에 작업했기 때문에 작품이 손상되었다. 1568년에 바사리(Vasari)는 이러한 회화 기법의 문제점을 최초로 지적하였다. 그림의 보존 프로그램이 반복 시행되었으며, 최근 20년간 복원 작업이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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