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371)/ 이탈리아

 

만토바와 사비오네타(Mantua and Sabbioneta; 2008)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Lombardia) 주의 포 계곡에 있는 만토바와 사비오네타는 르네상스 도시 계획의 두 유형을 보여 준다. 로마 시대 건설된 만토바는 기존 도시를 재개발하고 확장한 도시인 데 반해 32㎞ 떨어진 사비오네타는 당대의 ‘이상 도시[ideal city]’ 계획 이론을 실행하여 건설한 도시이다. 일반적으로 만토바의 배치는 불규칙하지만 균형 잡힌 부분들은 로마 시대 이후 건설된 도시의 성장 단계라고 할 수 있다. 11세기에 지어진 원형 건물과 바로크 양식의 극장 등 많은 중세 건물들이 있다. 사비오네타는 16세기 후반에 베스파시아노 곤차가 콜로냐(Vespasiano Gonzaga Colonna; 1531~1591)가 지배한 단일 시대에 건설된 도시이며, 도시 배치는 직각 그리드 레이아웃[right angle grid layout; 직각 격자 배치]으로 되어 있다. 두 도시들은 건축 양식의 가치에서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문화를 전파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당시 지배 세력 곤차가 가문이 장려한 르네상스 이상은 두 도시의 형태와 건축 표현에 녹아 있으며, 이상의 실천을 통해 실현된 만토바와 사비오네타는 르네상스의 도시・건축・예술의 뛰어난 사례이다.

   만토바는 원래 에트루리아 인의 주거지로 시작되어 로마 시대에 작은 요새 마을로 발전했다. 당시에 민초(Mincio) 강 주위의 습지 지역의 한 섬이었으며, 마을은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날의 도시 구조에서 그 때의 벽과 주요 거리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804년에 만토바는 주교 관할 지역이었으며, 예수의 핏자국 유적 덕분에 중요한 종교 중심지가 되었다. 10세기에 성벽과 해자를 새로 만들었고, 1115년에는 자유 구역이 되었다. 역사를 통틀어 치수(治水) 문제는 만토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유명한 수문 공사가 많이 이루어졌다. 1190년에 댐을 만들고 강 위에 다리를 건설하면서 도시 주변에 호수 체계를 조성하여 강의 수위를 4m 이상 높였다. 댐에서는 12개의 물레방아가 돌면서 물의 흐름을 조절하였다. 13세기에는 도시 남부에 리오 운하를 팠다. 리오 운하는 곧바로 확장된 도시의 경계가 되었는데 이것이 두 번째 성장고리라고 할 수 있다. 운하의 동쪽 끝에는 보호를 받는 카테나 항구가 건설되었다. 13세기에 이 도시에 몇 개의 탑과 궁정을 짓고, 현재의 브롤레토(Broletto) 광장과 에르베(Erbe) 광장을 만들었다. 1272년에 보나콜시(Bonacolsi) 가문이 권력을 잡고 건설 사업을 실시했다. 1328년에 루이지 곤차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곤차가 가문은 이후 1433년에 후작의 작위를 얻고, 1530년에 공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1707년까지 권력을 잡았다. 영토는 더욱 확장되고 수로의 가항성을 개선하고 방어 시설을 지었다. 동시에 농업 생산성과 상업도 발전하였다. 14세기 중반 무렵 곤차가 가문이 더 많은 재산을 획득하면서 오늘날의 공작궁 모습이 서서히 갖추어졌다. 14세기 말에 남쪽으로 세 번째 성장고리가 시작되면서 넓은 해자가 있는 포사 마지스트랄레(Fossa Magistrale)가 외곽의 경계가 되었다. 잔프란체스코 곤차가(Gianfrancesco Gonzaga; 1407~1444)의 통치로 르네상스를 맞을 준비를 하였으며 인문주의 학문을 통해 새로운 사상이 들어왔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피렌체로부터 초대하고,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피사넬로의 작품도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도시 체계화의 한 방법으로서 도시 공간을 기획하고 남쪽의 새로운 지역에 왕궁을 건설하는 도시 재개발을 하였다. 15세기 후반 루도비코 2세(1444~1478)의 시대에 만토바는 르네상스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건축가, 예술가, 장인들이 몰려와 새로운 예술 형식이 자리 잡았다. 1459년에 교황 비오 2세가 투르크 인들의 위협을 받아 식사 초대를 하여 많은 외국 사절단들을 불러들였다. 건축에서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와 루카 판첼리(Luca Fancelli)가 특히 중요한 인물들이었으며, 그림에서는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460년대와 1470년대에 새로운 궁전들과 건물들을 많이 건설하고 옛 건물들에도 변화를 주었으며, 도로와 야외 공간의 바닥을 포장하는 등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 알베르티가 설계한 산세바스티아노 교회(1460)와 성안드레아 교회(1472)는 건축학적으로 특히 의미 있다. 도시의 중심축도 새로 만들어졌다. 1478년에 루도비코 2세가 죽은 뒤 이 영토는 몇 개의 독립주로 갈라져 곤차가 가문의 여러 분가에서 통치하였다. 16세기 후반에 그 중 한 곳에 건설된 도시가 사비오네타이다. 만토바 궁정은 르네상스의 으뜸가는 문화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이전 세기와 마찬가지로 계속 발달되고 도시는 공고해졌다. 1524년에 건축가이자 화가인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가 로마에서 만토바로 들어와 이후 20년 동안 예술계를 지배하였다. 1525년에는 해자 밖 교외의 테 궁전(Palazzo Te) 공사가 시작되어 도시 중심축의 남쪽 끝이 되었다. 이 궁전은 건축과 미술에서 이 궁은 가장 영향력이 큰 매너리즘 작품 중의 하나가 되었다. 로마노는 만토바 시의 공사 감독이자 궁정 화가로서 많은 재개발 계획을 책임졌다. 도시와 문화생활은 번영을 누려 16세기 말에 이르면 거주민의 수가 오늘날의 인구와 거의 맞먹는 4만 명이 넘었다. 17세기에 들어 만토바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곤차가 직계 가문이 멸망하고 전쟁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1630년에 만토바는 적의 포위를 당하는 한편, 전염병이 돌았다. 전쟁이 끝난 후 만토바는 1707년에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요새 도시로서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맞았다. 새로운 공공건물이 세워지는 가운데 아카데미 궁전[Palace of the Academy]이 건설되었다. 성 안드레아 궁전에는 돔을 얹고, 1797년에는 기념비적인 비르질라나 광장[Piazza Virgilana] 공사가 시작되었다. 도시 전역의 건물 외관은 단색으로 칠하였다. 1866년에 만토바는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면서 경제가 서서히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요새 시설을 해체하고 해자를 덮어 버렸다. 지금은 역사적 중심지의 남쪽 경계를 따라 넓은 도로가 나 있고, 서쪽과 남쪽을 따라 철도가 건설되었다. 도시 중심부의 야외 공간은 복원되어 이전의 역사적 특징을 되찾았다. 1942년과 1950년에 이 역사 중심지를 위한 계획안이 마련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옛 건물 대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리오 운하도 부분적으로 복개하였다. 사비오네타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작은 주의 주도로 만토바가 1478년에 몇 개 부분으로 갈라졌을 때 생겨난 도시이다. 이 지역들은 여전히 곤차가 가문의 분가에서 통치하였다. 사비오네타는 로마 시대 이후 비텔리아나 도로변의 한 지방으로 알려져 왔다. 역사는 길지만 새로 건설된 곳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비오네타는 베스파시아노 곤차가 콜로냐 일인 통치 하에 건설된 창작물이다. 이상적인 도시 계획에 관한 저술과 이론들을 연구하였던 그의 목표는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주도로 기능할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사비오네타는 군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그 자신이 직접 설계한 것으로 생각된다. 공사는 1554~1556년에 시작되었다. 1588~1590년에는 빈첸초 스카모치(Vincenzo Scamozzi)를 고용하여 고대 극장을 건설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현대식 실내 극장이며, 극장의 요건을 충족하도록 특별 공간이 설계되었다. 베스파시아노가 죽은 후 사비오네타도 쇠퇴했다. 17세기에 에스파냐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었으나 1703년에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에 반환되었다. 그러나 5년 후 다시 구아스텔라(Guastella) 공국에 합병되었다가 1743년에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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