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손 바닥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을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을 푸르게 흔들더니

      그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을 들고 서있

      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꺽인 채

      꺼꾸로 쳐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꽃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서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

      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이 다시 온다면

      <2004년>



                   Water Lilies / Kevin Kern




                              성탄제

                                         김종일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 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 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설어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후략) <1967년> x-text/html; charset=EUC-KR" autostart="true" loop="true" volum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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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天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1939년>
    
    
    From The New World - Tol & Tol 
    
     

     

     

     

    산정묘지(山頂墓地)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 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중략)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 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

    다면.         <1991년>



         Danny Boy / Mickey Newbury (Live)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 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 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깍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깍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2005년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날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곳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꺽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날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1975>
    
    

        어느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나는 어느 목수 (木手)네집

        헌 삿을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낮이나 밤이나 나 혼자도

        너무 많은것 같이 생각하며

        달옹배기에 북덕불 이라도 담겨오면,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가슴이 꽉매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그러나 잠시 뒤에 고개를 들어,

        허연 문장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

        보는것 인데,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하여 여러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장을 치기도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것이었다. (1948>

         

          
                                귀향 / 곽성삼

     
     
     
      푸른 곰팡이---散策詩1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 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 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1993>

                

                       Memories / Ralf Bach


                귀천
                      천상병


          나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1979>



           

                        
            귀천 / 이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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