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 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 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1977년>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1947년>
               
                  
                  
                          긍정적인 밥........함민복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1996년>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고은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1974>

                           

                          주(註) : 문의(文義)-충북청원군의 한 마을.

                           

                           

                           

                        우리 오빠와 화로          임  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 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야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우리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웨 ―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었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웨 그 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야 기어올라가든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야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었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의 일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뚫어트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든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어요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모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었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
                        저뿐이 사항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의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야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는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동생
                        <1929년>

                        피오닐 : 러시아 말로 영어의 pioneer에 해당됨. ‘개척자, 선구자’ 라는 뜻과 함께
                        ‘공산소년단원’(9세~14세)을 일컫는 말이기도 함.
                        이 시는 카프 내의 최고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임화의 초기 대표작이다. 임화는 시로 시작해서 문단에 알려지고 카프 내의 최고의 이론가이자 실권자로 활동하여 해방 후에는 좌익 문학계의 거두로 활약하다가 월북하지만, 6?25 후의 남로당 숙청 과정에서 박헌영과 함께 사형당한다.


                         



                          
                          
                              그릇1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지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Sissel (시셀) / Secret Garden
                           
                              어떤 적막 정현종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 없고 둥근 안팍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위에 놓아 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 --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2000년>
                           


                                      저녁의 염전


                                                          김경주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온다

                              물 안에 스며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이 쇄골을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힌 물소리,죽은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을 본다

                              <2007년>
                                   
                                                     Gioia / Sandy Owen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듯 한데 나에겐 알아들을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웅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꿈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 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2005년>
                                  혼자 가는 먼 집 허 수 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 때 적요움의 울움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 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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