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放心)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2006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산사의 명상음악 / 꿈속에서



      농무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1971년>

      번민 (煩悶) / 최소리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 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 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 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 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 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 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 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 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 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 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1993년>
    Capture the Moment / David London

      
      
       칼로 사과를 먹다 /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1994년>
         
       
      To The Children / Denean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2006년> 
      
      고향의 봄 / 하모니카 / 정안
                    


      
      
       생명의 서(書)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砂)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1938년>
        
      Speak Of The Hearts / Danny Canh

          
          
           섬진강1 /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1985년>   
          
          
          Uluru Flight  / Guido Negraszus

              
              
               그리스도 폴의 강(江) 1 / 구상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彼岸)을 저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白楊木)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黃金)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1977년> 
              
              
              Canadian Bird Song / Richard Abel
              

              
              
               눈물  /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들이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1957년>   
              
              
              Tears / Andante (Raining Version)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1984년>

                  서른 즈음에 / 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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