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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 사스카츄완 수리부엉이 990x742
3일 - 워싱턴 Rubbing Stone 1600x1200
4일 - 이글레이크 Lily Pads 1600x1200
5일 - 워싱턴 비오는 날 990x742
6일 - 핀란드 샘 1600x1200
7일 - 텍사스 그린 에놀 1600x1200
8일 - 폴란드 Karkonosze National Park 1600x1200
9일 - 멕시코 Desert Rivers 1600x1200
10일 - 우간다 주먹부리황새 1600x1200
11일 - 캐나다 적란운 1600x1200
12일 - 모하비 사막 테코파 1600x1200
13일 - 태국 어부 1600x1200
14일 - 애리조나 Petrified Sand Dunes 1600x1200
15일 - 플로리다 악어 990x742
16일 -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990x742
17일 - 콩고민주공화국 Lava Cauldron 1600x1200
18일 - 오리건 버섯 1600x1200
19일 - 자이언 국립 공원 협곡 990x742
20일 - 아이슬란드 Hraunfossar Waterfall 1600x1200
21일 - 방글라데시 Rainfall 990x742
22일 - 타주라 만 고래상어 990x742
23일 - 올림픽 국립공원 Hoh Rain Forest 1600x1200
24일 -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Arch Rock 990x742
25일 - 그랜드티턴 국립공원 Mount Moran 1600x1200
26일 - 요세미티 국립공원 Sequoia Tree 990x742
27일 - 글레이셔 만 국립공원 여행자들 990x742
28일 - Gates of the Arctic Alatna River Valley 1600x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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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는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나라지만, 요즈음 많이 알려지기 시작 한 나라입니다.
스리랑카는 인도 아래에 있는 섬나라로 언어는 자국어와 영어를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국 식민지 였던 스리랑카는 영국식 영어를 사용합니다.
현지 사람들도 영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학교에서도 영어로 수업을 합니다. 교육수준이 높은 나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교육열이 높고 교육환경이 잘 되어있어서 스리랑카의 국제학교는 수준 높은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화유산이 많은 나라이고 불교문화로는 유명한 나라입니다. 역사도 깊고 여행할 곳도 많고 교육수준 높아서 한번 스리랑카를 방문한 사람들은 너무나 좋은 나라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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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1/3(또는 남한의 2/3)크기로 인도 동남부에 있는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
스리랑카 주민의 70%를 차지하는 싱할라족은 BC 6세기경에 인도 북부로부터 건너와 선주민(先住民-야차)을 정복하고 왕국을 이룩하였다.
그들은 인도 남부 타밀족의 침략을 받아 차차 그 세력이 밀리게 되었고, 타밀족은 섬의 북부에 따로 왕국을 수립하였다. 싱할라족의 왕조는 BC 3세기에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를 수용, 보호하였으며, 남방 상좌부(上座部)불교의 정통파로서 ‘실론 불교’의 전통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16세기부터는 유럽 열강의 침입이 시작되어 제일 먼저 우선 1505년 포르투갈인들이 해안지역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어 1602년에는 네덜란드인이 침입하여 포르투갈인을 몰아냈고, 1795년에는 영국이 네덜란드를 굴복시키고, 1815년에는 캔디에 근거를 둔 마지막 싱할라 왕조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영국 자본은 인도로부터 타밀족 노동자를 이주시켜 플랜테이션을 경영하였으며, 그 결과로 싱할라와 타밀 민족간의 대립이 심각해졌다. 한편, 유적 발굴 등에 따른 불교 르네상스가 싱할라족 사이에서 일어났으며, 인도의 민족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작용하여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국도 민족해방운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침내 1948년 2월 독립을 인정하였다. 독립 후에도 영국의 지배력은 상당히 남아 있었으며, 총독의 임명권도 영국 국왕이 보유하고 있었다.
1956년의 총선거에서는 자본가 지주계층을 기반으로 한 통일국민당 대신 농민과 중산계층에 뿌리를 둔 자유당을 주체로 한 연합전선이 정권을 잡았다. 연합전선은 중립주의의 추진, 공화제 이행(移行) 준비, 외국자본의 국유화 등에 힘썼으나 영국 세력과 승려, 지주 세력의 반대에 부딪쳐, 1959년 9월에 총리 반다라나이케가 암살당하였다.
1960년의 총선거에서는 반다라나이케의 부인이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어, 인도계 타밀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민족대립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경제정세의 악화로 1965년에 내각이 무너지고 친서구적(親西歐的) 성격의 통일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파(右派) 세력의 연립내각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 정세는 호전되지 않았으며, 1966년 12월에는 식량위기로 인해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국민의 불만을 배경으로 1968년 3월에는 자유당?평등사회당?공산당이 통일전선을 결성하였으며, 1970년 5월의 하원 총선거에서 2/3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반다라나이케 부인을 다시 총리로 하는 통일전선 정부가 형성되었다. 이 정부는 1971년에 상원을 폐지하고 1972년 5월 제헌국회에서 새 헌법을 채택, 스리랑카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좌익 연합정권은 비동맹외교노선을 추구하였으며, 1976년 8월에는 수도 콜롬보에서 비동맹국 수뇌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1971년에 극좌분자에 의한 무장반란이 일어나고, 물가?실업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으며, 평등사회당과 공산당이 1975년 9월과 1977년 2월에 각각 연합정권에서 이탈, 자유당 좌파의 일부가 신당을 결성하였다.
그리하여 1977년 7월의 총선거에서는 통일국민당이 압승을 거두고 자야와르데네 정권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8월에 소수민족 문제를 둘러싸고 항쟁이 발생하여 1971년의 무장반란이후 처음으로 전국에 외출금지령이 내려졌다. 1977년 10월에는 대통령 중심제의 헌법개정을 실시하고, 1978년 2월에 행정권을 가진 초대 대통령에 자야와르데네가 취임하였으며, 그해 9월에 1972년의 헌법을 폐지하고 새 헌법을 공포, 국명을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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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크게 데칸 지역을 중심으로 남부와 북부로 구별된다. 데칸은 산스크리트어로 '남쪽 나라'를 뜻하는 다크쉬나파타가 와전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남쪽이라는 방법보다 북인도의 아리아인이 자신들의 수준 높은 문화에 비하여 남인도 드라비다인의 이질적인 문화를 후진적이라고 낮추어 부르는 데서 비롯되었다.
남인도는 다시 데칸 중심의 지역과 그 이남의 타밀 지역으로 나뉜다. 남인도 지역은 마우리야와 굽타왕조시대에도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채 어느 정도 독립된 권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마우리야 왕조의 인도통일로 북인도의 문화가 어느 정도 유입은 되었을지라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독자적인 나름대로 고도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 경향은 현재에도 지속되는 편이다.
드라비다인의 문화라고 지칭되는 남인도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에 이미 바다를 통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팔레스틴 지역 등과 교역을 하였고,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 왕의 석주에 나타난 비문을 통해 남인도 지역이 처음으로 북쪽의 아리아인 문명과 접촉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로마제국과도 독자적으로 해상무역을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풍요로운 상태였다.
남인도 지역의 주민은 대부분 아리아인이 아닌 드라비다(타밀)인이었다. 그들은 주로 토템적인 씨족체제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토템의 상징을 숭배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이고 독립적인 문화는 마우리야 왕조의 통일제국 이후 점차 아리아인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고유 종교는 힌두이즘보다 아쇼카 왕의 불교전파로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을 먼저 받았다.
타밀 중심의 남인도 지역이 인도 역사상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략 기원전 2세기경으로 로마제국과의 무역을 통해 촐라, 체라, 판드야의 세 왕국이 형성되었는데, 이 세 왕조는 끊임없이 서로간의 세력다툼을 벌였고,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풍부한 자연의 산물과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농업으로 벼와 사탕수수 등을 경작했으며, 과일, 후추등도 풍부하게 산출되었다. 세 왕국의 군대는 초보적인 수준이었으며 특이한 것은 코끼리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말은 바다를 통해 수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 중 하나인 타밀어를 사용했다.
이 세 왕조는 후에 팔라바 왕조로 대체되면서 9세기까지 지속된다. 팔라바 왕조는 남인도 지역에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였으며,
6세기 후반 싱하 비슈누 왕때에 전성기를 맞는다. 팔라바의 모든 왕들은 철저한 힌두교도였다.
그들은 많은 사원을 건립하고 힌두교와 산스크리트어를 적극 권장함으로써 남인도 지역에 힌두사상이 전파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남인도 타밀 지역에서의 힌두교는 주로 신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박티 종교의 형태로 위대한 힌두교 성자들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활약했다.
한편, 이에 비해 데칸 지역에는 카라벨라 왕국을 물리치고 사타바하나 왕국이 등장하여 중앙 인도 전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남북인도의 중개자 역할을 담당했다.
남인도에 최초의 제국을 이룩했던 사타바하나 왕국은 특히 쿠샨왕조의 남인도 진출을 저지하는 한편 페르시아만의 해상권과 자바와 수마트라 등의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아시아의 해상무역을 독차지하기도 하였다.
사타바하나 왕조는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했으며 사람들의 직업은 주로 농업, 상업, 수공업 등이었으며, 조세제도도 매우 관대하였다. 국가의 재정은 주로 토지세와 소금 무역의 독점권, 각지역의 조공으로 꾸려나갔으며 대부분 군대유지와 도시행정에 사용되었다.
대중적인 종교는 힌두이즘과 불교였으며, 타종교에 대해서 매우 관대하였다. 이 시기 문학과 예술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아리아인의 문화를 받아들여 산스크리트어가 속어화한 프라크리트어를 사용했으며 남북 인도의 교류를 재개하여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사타바하나 왕조는 인도의 역사와 문화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사타바하나 왕조는 바카타카 왕국을 거쳐 6세기경 나타나 브라흐마 또는 마누 신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찰루캬 왕조로 대체된다. 찰루캬왕조는 팔라바 왕국과 물고 물리는 전쟁을 계속하다 10세기경 촐라 왕조에 흡수된다.
촐라왕조는 고대 타밀 세 왕조 중 하나로 자그마한 속국으로 전락했다가, 9세기 중반 무렵 주위의 왕국들을 차례로 물리치면서 강력한 제국으로 부상했다. 촐라왕조는 특히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상무역을 활발히 펼쳤다.
촐라 왕조의 사회상 중 특이한 점은 신분상의 계급제도가 존재했지만 계급간의 통혼이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계급들이 형성되었다. 여성의 지위도 비교적 좋아 힌두 사회의 수많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사회적 종교적 행사에 자유롭게 참가하고, 상속권이 보장되어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촐라 왕조는 근 200년 동안 남인도의 문화와 정치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정치 역사상 특징적인 요소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데 특히 자치정부의 실현과 강력한 해군력의 보유 그리고 타밀문학과 예술의 절정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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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색은 용기와 희생을, 흰색은 진리와 평화를, 초록색은 공평과 기사도를 나타낸다. 바퀴 모양의 파란색 문장(紋章)은 '차크라(물레)'라고 하는데, 이는 아소카왕(王)의 불전결집(佛典結集)에서 취한 것으로 ‘법(法)의 윤회’를 뜻하며 24시간을 뜻하는 24개의 바퀴살을 가지고 있다. 원래 기에는 문장이 들어 있지 않았는데, 국기 제정시 차르카에 의한 경제적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마하트마 간디의 요청으로 넣었다. 3색기는 1920년대부터 비공식적으로 국기로 사용되어왔으며 당시 3색은 힌두교(귤색)·통일(흰색)·이슬람교(초록)를 의미하였다. 1942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국기로서 처음 사용되었고 1947년 7월 22일 입법회의에서 제정하였다.
수도 : 뉴델리 공용어 : 힌두어, 영어 정부 형태 : 연방 공화제 독립 : 영국으로부터 독립 (1947년 8월 15일) 면적 -전체 : 3,166,414㎢ (7위) -내수면 비율 : 9.56% 인구 : 1,103,371,000명 (2위) 통화 : 루피
인도 공화국(印度共和國, 힌디어: भारत गणराज्य 바라트 가나라자, 영어: Republic of India, 문화어: 인디아)은 남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인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가 면적은 세계에서 일곱째로 넓으며, 인구는 중국에 이어 둘째로 많다. 북쪽으로는 중국, 네팔, 부탄, 파키스탄, 동쪽으로는 미얀마, 방글라데시, 벵골 만,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해, 남쪽으로는 인도양, 스리랑카와 맞닿아 있다. 인도는 불교,힌두교 등의 발상지이고, 각 지역마다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 이기도 하다.
인도의 역사 인도 문명의 기원은 기원전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서 발원한다. 그러나 기원전 1500년~12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이란 고원을 넘어 인도로 침입하여 인더스 문명은 파괴되었다. 아리인들은 갠지스 강 유역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델리 근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나갔다. 이 시기에 아리아인들의 베다 신앙에서 힌두교가 파생되어 나왔고, 산스크리트 어가 발전해 이후 2,000여 년 동안 인도의 국어로 사용되었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이보다 늦은 기원전 6세기에 나타났다. 북부 인도는 찬드라 굽타(기원전 321년경 ~ 기원전 185년)의 통치 아래 최초의 힌두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로 통합되었고 그 손자인 아소카 대왕의 시대에는 인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한 대제국으로 확장되었다. 인도는 마우리아 왕조의 붕괴 이후 수많은 소왕국이 난립하였다가 굽타 왕조(320년 ~ 480년) 시대에 다시 통일되었다. 이슬람 교도들의 침입은 1000년경 부터 시작되었다. 14세기 초, 모하마드 이븐 투글루크가 델리 술탄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북부 인도에서의 이슬람 지배는 16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남부 인도에서도 역시 이슬람계 바만 왕조가 성립(1347년)되어 1527년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며 이와 함께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르 왕조가 1336년에서 1556년에 걸쳐 인도의 남부 지방을 양분하며 통치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여행(1498년)을 기점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상륙하여 인도와 유럽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들어서는 같은 목적을 가진 포르투갈인·영국인·프랑스인·네덜란드인들 간에 경쟁관계가 형성되었다. 16세기초에는 이슬람계 왕조인 무굴 제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했다. 1526년 바부르가 세운 이 제국은 악바르와 아우랑제브 치세 동안 세력을 확장하고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힌두 왕국인 마라타 왕국이 17세기말 세력을 뻗치면서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 동안 영향력을 키워온 영국 동인도 회사는 차츰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식민 세력들을 몰아내고 1757년에 무굴 제국을, 1818년에는 마라타 왕국을 굴복시킨 뒤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한 영국의 통치는 세포이 항쟁(1857년) 이후인 1858년에 영국 정부가 인도를 직접 통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초기의 인도 민족주의는 인도 국민 회의(1885)와 전 인도 이슬람 연맹(1906)의 창설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1857년의 세포이 항쟁 후 거의 60여 년 동안 대다수의 인도인들이 영국의 지배에 순응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이슬람 교도와 힌두 교도 모두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 간디가 이끄는 인도 국민 회의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비협력운동을 전개하자 영국은 1919년과 1935년 인도 행정법을 통해 인도에 제한된 범위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간디를 비롯한 인도인들은 완전독립과 인도의 통일을 요구했다. 인도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47년 8월 15일 독립을 획득했으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인도 공화국과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파키스탄으로의 분리를 초래했다. 펀자브와 벵골은 주민들의 종교성향에 따라 각각 2개로 분리되어 양국에 포함되었으며 카슈미르는 아직까지도 분쟁이 계속되는 상태에 있다. 인도에서는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한 국회가 1952년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확정되지 않은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196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1965년에는 파키스탄과 잠시 국경분쟁을 겪었다. 1967년에는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1984 암살)가 의회의 지지를 받아 총리로 취임했고 인디라 간디가 암살된 이듬해 아들인 라지브 간디(1991년 암살)가 총리에 취임했다. 1971년 파키스탄과 국경 2곳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동(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시크교도들이 펀자브 지방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인종과 종교로 인한 갈등으로 불안정한 정세가 계속되고 있다. 20세기 후반 인도는 괄목할 만한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가장 인구가 많은 의회 민주주의를 잘 이끌고 있다.
인도의 행정구역 인도의 행정 구역은 28개의 주, 6개의 연방 지역, 그리고 1개의 수도권으로 나뉜다. 수도는 뉴델리 (New Delii) 이다.
인도의 정치 원래는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였으나, 1950년 1월 24일부터 공화국이 되었다. 이 나라는 영국식 의원 내각제를 채택함으로써, 총리의 권력이 강력하다. 의회 구조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연방공화국인 인도는 25개주와 7개 연방직할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는 연방정부와 이들 주정부 간의 역할 분담에 의해 국정이 운영된다. 연방정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계획·실행되어야 할 여러 사항들, 즉 국방, 외무, 교통·통신, 화폐 및 동전 주조, 고등 법원 운영 등에 관한 업무를 관할하는 한편 그외 경찰, 공중보건, 교육, 임산자원 관리 등 지방업무의 성격을 띤 분야는 주정부에서 담당한다
인도의 주민들 인도에 거주하는 주민을 인도인이라 부른다. 인도에서는 아랍인, 타밀인, 벵골인,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중국인, 프랑스인등 소수 민족이 존재한다.
인도의 종교 힌두교는 다수가 신봉하고 있는 종교이다. 제2의 종교 세력은 이슬람교이며 소승 불교 세력도 있다. 펀자브 주에서는 시크교를 믿는다. 기타 토착 종교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기독교도 존재한다. 인도 기독교 교파로는 1947년 조합교회, 장로교, 개혁교회가 연합한 인도 성공회 교회인 남인도교회(The Church of South India (United))[2], 침례교회, 루터교회, 구세군, 성 토마스 복음교회, 로마가톨릭, 말란카라 시리아정교회등이 있다.
인도의 경제 인도의 경제성장 속도는 상당히 느린 편이나 정교한 행정조직과 관료제도, 양호한 교통·통신망, 우수하고 풍부한 인력, 잘 정비된 공업기반 등 일반적인 개발도상국들과는 다른 여건을 갖추고 있다. 1947년 독립 이후 많은 투자를 통해 공업부문에서 현재 세계 20위권 내의 공업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나, 무역부문에는 아직 그 영향이 미치지 않아 수출량이 세계교역량의 1%를 밑돌고 있다. 한편 소수 지배계층은 매우 높은 수준의 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저수준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등 소득격차가 매우 큰 것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매년 1,000만 명을 넘는 계속적인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실업자의 증가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도 정부는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인도의 문화 인도의 예술과 문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 예술에서 현대 예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독립 이래 연방 정부와 여러 주정부는 랄리트칼라 아카데미(국립 미술 아카데미)·상게트나타크 아카데미(음악·무용·드라마 아카데미)·사히티아 아카데미(국립 문학 아카데미) 등 여러 문화·예술 관련기관을 설립하여 예술·문화활동을 촉진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도는 또한 영화 문화 산업이 매우 발달해있다. 인도 사람들은 바느질을 한 옷이 더럽다고 생각해서 전통 의상도 바느질을 안 하는 사리를 입는다.
인도의 대외관계 인도는 남북간 동시수교국으로, 한국과는 1962년 3월 영사관계를 수립한 이후 1973년 12월 10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했으며 북조선 역시 1962년 영사관계 수립을 거쳐 1973년 12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인도는 국제무대에서 한반도 문제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편 경제문제 등에서 한국과의 관계 증진에 힘쓰고 있다. 양국간에는 1974년 8월 맺은 무역협정을 시작으로 문화협정(1974년 8월)과 과학기술협력협정(1976년 3월)이 체결되었다. 교역량이 점차 증가추세에 있어 1996년 현재 대한수입액 11억 7,697만 달러, 대한수출액 9억 7,572만 달러이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인도 간의 양자 외교는 대체적으로 친밀하고 강력한 관계였다. 그러나, 일본은 피폭국이었기 때문에, 인도가 핵실험을 했다는 이유로 인도와 거리를 둔 시기도 있었다. 인도는 최근 현저한 경제 발전과 정보기술의 실적이 주목 받고 있으며, 또한 G4 국가로 함께 행동하는 등 관계 강화를 지향하고 있다. 일본 외무성은 2006년에 아시아대양주국(局) 중에 새로운 부문으로서, 남아시아부(部)를 설치하였다. 2006년 12월 인도 만모한 싱 총리의 일본 방문은 "일본-인도 전략적이고 국제적인 파트너십을 향한 제휴 선언"을 서명할 때 최고조에 달하였다. 또한 2008년 10월에, 일본-인도 양국 정상은 일본-인도 안전보장협력공동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일본에 있어서 인도는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안보 분야에서 공식적인 협력 관계를 맺은 세번째 국가가 되었다. [3] 인도와 파라과이는 1961년 9월 13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인도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겸임 대사와 아순시온에 있는 명예 영사가 파라과이에서 외교활동을 수행한다. 2005년부터 파라과이는 뉴델리에 대사를 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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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소르(Mysore)는 카르나타카 주의 상징으로 통한다.
14세기부터 영국 식민 시대까지 마이소르 지역을 통치한
우데야르 왕조의 궁성으로 화마를 겪은 뒤 20세기 초 재건됐다.
마이소르 궁전 앞에 서면 그 규모와 수려한 자태에 압도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인도 각지에서 무수한 위대한 군주가
명멸했지만 이만큼 뛰어난 조형미의 거대 건축물을
축조한 경우는 없었다.
마이소르 궁전의 수려함은 해가 저물면 더욱 빛을 발한다.
일요일과 국경일 저녁 7시부터 8시까지 궁전 외곽에 설치된
수만 개의 전등이 일제히 불을 밝힌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성곽의 벽면을 따라 곡선과 직선의 빛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이소르는 우데야르 왕조가 수도로 정한 이후
남인도의 중심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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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불라의 황금 사원(Golden Temple of Dambulla; 1991)
석굴 사원인 담불라 황금 사원은 스리랑카 중부 지방의 마탈레 지구(Matale District)에 위치한다. 성소 5군데와 함께 약 2,200년 간 내려온 신성한 성지 순례 유적지이다. 이 황금 사원은 스리랑카에 있는 석굴 사원 가운데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되어 있다. 황금 사원 안에서도 넓이 2,100㎡에 이르는 불교 벽화와 157개의 불상과 신상이 특히 유명하다.
담불라 유적군은 스리랑카와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종교의 예술성과 표현성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발굴된 석굴, 벽화, 불상과 신상 등은 크기나 보존 상태로 볼 때 상당히 독특하다. 사원에는 스리랑카 캔디(Kandy) 학파의 18세기 예술의 중요한 걸작들이 있다. 기원전 3세기에 만든 불교 석굴 사원 중심지인 담불라는 오늘날까지도 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석굴 사원이 있는 지역은 스리랑카 역사를 통틀어 동부와 서부 건조 지역(Dry Zones), 건조 지역과 중앙 산맥을 이어 주는 교통의 요지에 있다. 석굴 사원은 스리랑카 섬의 지질학 역사 연구에 중요한 지역인 역층 잔구(礫層殘丘; 섬 모양으로 고립된 둥근 구릉의 자갈이 많은 지대) 또는 침식 잔구 위에 만들어졌다. 이 유적은 이반카투와(Ibbankatuwa)에 있는 거석문화 묘지와 더불어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에 인간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를 보여 준다. 담불라 황금 사원은 스리랑카 섬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곧바로 세운 불교 건축물로서 이후 22세기 동안 줄곧 사용되어 왔다. 이 유적지에서 80개의 석굴 주거 지역의 잔해가 발굴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에 담불라 남쪽 벽의 석굴 주거지는 모두 사원으로 바뀌었다. 그 후에도 석굴 사원은 꾸준히 늘어났으며, 5~13세기에 특히 증가하였다. 석굴 사원들은 바위로 된 성소로 확장되었고, 석굴을 가리기 위해 벽돌을 쌓아 벽을 세웠다. 12세기 말에 이르러 니산카 말라(Nissanka Malla) 왕에 의해 상층부에 있는 동굴 바위에 조각을 하는 기법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그보다 앞선 암각술을 반영한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일반 형태와 배치가 당시부터 있었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석굴 발전의 주요 단계는 오랜 전통을 따르던 18세기에 행해졌다. 이때에 상층부가 복원되고 새로 단장되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변화는 이미 채색된 석굴의 표면에 벽화를 그리거나 덧칠하는 18세기 후반의 캔디 학파의 양식을 따른 것이다. 또 당시에 석굴에 있던 인자한 불상 그림에 본래 세부 형상이나 도해법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덧그렸다. 그리고 화면 벽을 다시 세우고 바깥쪽에 베란다를 만들기 위해 지붕을 얹었다. 왕족의 후원이 끊기는 때인 1815년부터 19세기 동안 전반적으로 불상은 계속 덧칠되었고, 표면은 계속 손상되었다. 1915년에 지역 내의 기부 덕분에 다섯 번째 동굴은 완전히 다시 칠할 수 있었다. 1930년대에는 유럽과 아시아 양식을 혼합하여 베란다를 새로 만들었다. 복잡한 석굴의 입구 현관은 18세기 양식으로 재건축한 듯하다. 담불라의 황금 사원은 아주 뛰어나면서도 독특한 복합 단지이다. 석굴 사원과 5개의 동굴에 있는 그림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크기의 입상이 157개나 된다. 담불라 황금 사원은 약 4000년 동안 유적지 전체에 자연을 풍성하게 잘 녹여 이용해 온 사례를 보여 준다. 여러 개의 개별 유적들과 한데 어우러지는 거대 유적지는 거석문화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발전 단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유적지에는 승원, 보리수 사원, 사리탑, 그리고 고고학 연구를 통해 가장 먼저 알려진 스리랑카의 마을들이 있다. 이곳은 유적들과 상당히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 어우러져 있다. 유적의 질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보존이라는 관점과 보존자들의 능력 범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유적지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유적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표면을 새로 칠했다는 것이다. 보존 방법상으로 초기 모습을 알아내려면 벽 표면이나 석상의 덧칠 층을 잘 벗겨 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석굴 표면을 주기적으로 다시 칠해야 한다는 오랜 전통 가치와 충돌하게 되지만 초기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다. 물론 석굴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 잠재된 습기와 유입되는 소금기 문제 때문에 많은 벽화를 ‘보수’해 왔다. 보존 노력을 하는 동안 제한된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오래된 작품 위에 새 바탕 면을 입혀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 행했던 작업은 나중에 강하게 덧칠된 것으로 인해 가장 초기의 작품은 살아남을 수 없고 아주 약간 이전의 작품만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암시했다. 기원전 18세기 초엽에 고용된 지반 나이데(Jeevan Naide) 일가는 오늘날까지도 벽화의 관리를 책임지고, 올라(ola) 잎으로 만든 필사본을 참고하여 작업하고 있다. 이 필사본은 석굴 단지의 배치와 벽화 기법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1990년과 1991년에 지반 나이데 일가와 지역 견습생들이 기술적 임무를 띠고 과학과 전통을 한데 아울러 유적을 보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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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 신성 도시(Sacred City of Kandy; 1988)
캔디 신성 도시는 스리랑카 중부의 도시로 수도인 콜롬보(Colombo) 북동쪽으로 약 90km, 캔디 고원[Kandy plateau] 해발 488m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캔디 왕국의 마지막 왕이 건설한 인공 호수 근처에 마하웰리(Mahaweli) 강을 끼고 있다. 1480년경에 처음으로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592년부터 영국이 캔디의 마지막 왕을 몰아낼 때(1815년)까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잠시 점령했을 때를 제외하고, 유럽 식민지 시대에 계속 독립을 고수하였다. 즉 15세기에 건설된 고도(古都)로 18세기까지 싱할라(Sinhala; 사자의 후예) 왕조의 수도였으며,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전통적인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시가지 중앙에는 인공 호수가 있고, 호수의 북안에 있는 달라다 말리가바(Dalada Maligawa) 사원[佛齒寺]에는 석가모니의 이[齒]가 봉납되어 있다고 한다. 새로 취임하는 총리는 이 사원에 참배하는 것이 관례이며, 매년 8월에 대제(大祭)가 열린다. 캔디 왕들의 궁전과 더불어 경관이 아름답고, 교통·상업의 요지이며, 문화·교육의 중심지이다. 현재 캔디는 인구 밀도가 높은 주변 농업 지역을 위한 상업 중심지이다. 쌀을 비롯한 곡물과 스리랑카 차(茶)의 대부분을 생산한다. 석회석도 채석되고 벽돌과 기와가 근처에서 만들어진다. 가까이에 실론대학교와 왕립식물원이 있다. 인구 102,000명(198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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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 구 도시와 요새(Old Town of Galle and its Fortifications; 1988)
갈레 구 도시와 요새는 16세기 포르투갈 인들에 의해 건설되어 18세기경 그 발달의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 유적은 남부 및 동남아시아에서 유럽 인들이 건설한 요새 도시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며 유럽의 건축술과 남부아시아의 전통이 상호 작용한 사례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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