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크게 데칸 지역을 중심으로 남부와 북부로 구별된다. 데칸은 산스크리트어로 '남쪽 나라'를 뜻하는 다크쉬나파타가 와전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남쪽이라는 방법보다 북인도의 아리아인이 자신들의 수준 높은 문화에 비하여 남인도 드라비다인의 이질적인 문화를 후진적이라고 낮추어 부르는 데서 비롯되었다.

남인도는 다시 데칸 중심의 지역과 그 이남의 타밀 지역으로 나뉜다. 남인도 지역은 마우리야와 굽타왕조시대에도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채 어느 정도 독립된 권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마우리야 왕조의 인도통일로 북인도의 문화가 어느 정도 유입은 되었을지라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독자적인 나름대로 고도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 경향은 현재에도 지속되는 편이다.

드라비다인의 문화라고 지칭되는 남인도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에 이미 바다를 통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팔레스틴 지역 등과 교역을 하였고,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 왕의 석주에 나타난 비문을 통해 남인도 지역이 처음으로 북쪽의 아리아인 문명과 접촉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로마제국과도 독자적으로 해상무역을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풍요로운 상태였다.

남인도 지역의 주민은 대부분 아리아인이 아닌 드라비다(타밀)인이었다. 그들은 주로 토템적인 씨족체제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토템의 상징을 숭배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이고 독립적인 문화는 마우리야 왕조의 통일제국 이후 점차 아리아인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고유 종교는 힌두이즘보다 아쇼카 왕의 불교전파로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을 먼저 받았다.

타밀 중심의 남인도 지역이 인도 역사상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략 기원전 2세기경으로 로마제국과의 무역을 통해 촐라, 체라, 판드야의 세 왕국 형성되었는데, 이 세 왕조는 끊임없이 서로간의 세력다툼을 벌였고,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풍부한 자연의 산물과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농업으로 벼와 사탕수수 등을 경작했으며, 과일, 후추등도 풍부하게 산출되었다. 세 왕국의 군대는 초보적인 수준이었으며 특이한 것은 코끼리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말은 바다를 통해 수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 중 하나인 타밀어를 사용했다.

세 왕조는 후에 팔라바 왕조 대체되면서 9세기까지 지속된다. 팔라바 왕조는 남인도 지역에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였으며,

6세기 후반 싱하 비슈누 왕때에 전성기를 맞는다. 팔라바의 모든 왕들은 철저한 힌두교도였다.

그들은 많은 사원을 건립하고 힌두교와 산스크리트어를 적극 권장함으로써 남인도 지역에 힌두사상이 전파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남인도 타밀 지역에서의 힌두교는 주로 신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박티 종교의 형태로 위대한 힌두교 성자들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활약했다.

한편, 이에 비해 데칸 지역에는 카라벨라 왕국을 물리치고 사타바하나 왕국이 등장하여 중앙 인도 전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남북인도의 중개자 역할을 담당했다.

남인도에 최초의 제국을 이룩했던 사타바하나 왕국은 특히 쿠샨왕조의 남인도 진출을 저지하는 한편 페르시아만의 해상권과 자바와 수마트라 등의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아시아의 해상무역을 독차지하기도 하였다.

사타바하나 왕조는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했으며 사람들의 직업은 주로 농업, 상업, 수공업 등이었으며, 조세제도도 매우 관대하였다. 국가의 재정은 주로 토지세와 소금 무역의 독점권, 각지역의 조공으로 꾸려나갔으며 대부분 군대유지와 도시행정에 사용되었다.
대중적인 종교는 힌두이즘과 불교였으며, 타종교에 대해서 매우 관대하였다. 이 시기 문학과 예술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아리아인의 문화를 받아들여 산스크리트어가 속어화한 프라크리트어를 사용했으며 남북 인도의 교류를 재개하여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사타바하나 왕조는 인도의 역사와 문화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사타바하나 왕조는 바카타카 왕국을 거쳐 6세기경 나타나 브라흐마 또는 마누 신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찰루캬 왕조 대체된다. 찰루캬왕조는 팔라바 왕국과 물고 물리는 전쟁을 계속하다 10세기경 촐라 왕조에 흡수된다.

촐라왕조는 고대 타밀 세 왕조 중 하나로 자그마한 속국으로 전락했다가, 9세기 중반 무렵 주위의 왕국들을 차례로 물리치면서 강력한 제국으로 부상했다. 촐라왕조는 특히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상무역을 활발히 펼쳤다.

촐라 왕조의 사회상 중 특이한 점은 신분상의 계급제도가 존재했지만 계급간의 통혼이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계급들이 형성되었다. 여성의 지위도 비교적 좋아 힌두 사회의 수많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사회적 종교적 행사에 자유롭게 참가하고, 상속권이 보장되어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촐라 왕조는 근 200년 동안 남인도의 문화와 정치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정치 역사상 특징적인 요소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데 특히 자치정부의 실현과 강력한 해군력의 보유 그리고 타밀문학과 예술의 절정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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