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ilanka History-스리랑카) (Sigirya Ancient City Photo)
인도양 위에 떠 있는 섬나라 스리랑카는 적도의 북 회귀선 사이의 열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푸르른 자연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섬이다. 총면적은 65,609평방km로 남한의 3분의 2정도의 크기이며 북쪽으로 가면서 점점 좁아지는 이 섬의 형상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인도 대륙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것 같다고 한다. 전에는 국호를 실론이라 했는데 1972년 새 헌법을 공포하면서 스리랑카로 국호를 바꾸웠다.
스리랑카는 찬란하게 빛나는 섬이라는 뜻이며 이 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국호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나 실론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도처에 남아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홍차 이름으로도 우리 귀에 익숙하다. 이 섬은 변화가 풍부한 지형을 가지고 있으며 베이지색 모래밭이 100km이상이나 이어지는 해안과 키가 작은 나무들이 무성한 정글 그리고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은 작은 섬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지형들은 대부분 오염되지 않은 자연상태 그대로 남아 있으며 특히 정글지대에는 많은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교도이며 고대로부터 불교 왕국으로 번영을 누려왔다. 지금도 남아 있는 불교의 거대한 유적들은 세계 유네스코에 의해 보수공사가 계속되고 있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역대 왕들이 남긴것은 불교 유적들뿐이 아니며 이 섬에서 드라이 존이라 불리는 건조지역 여기저기에는 거대한 저수지들이 있다.
역대 왕들이 건설한 이 위대한 유산들은 농업국인 스리랑카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켜 온 소중한 재산으로 지금은 완전히 자연의 일부가 되여 인간분만 아니라 새와 짐승까지도 생활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스리랑카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석이다. 그 역사는 아득히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0세기에 솔로몬왕이 시바의 여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건물한 루비가 스리랑카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섬을 자배해 온 여러나라가 탐내던 것도 충푸한 보석때문이었으며 영원한 빛을 발하며 사악한것은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고 전해지는 이 보석의 대표적인 산지인 산속의 작은 마을 라트나푸라에서는 오늘도 남자들이 소박한 방법으로 계속 꿈을 캐고 있는 것이다. 천혜의 자연환경 그리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씨 모든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스리랑카는 우리들의 여행을 낭만적인 시간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기후)
작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어딜 가더라도 기후가 같을것 같은 스리랑카는 그러나 몬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지형이 다양하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기후가 많이 다르다. 인도가 망고를 떨어 뜨렸다는 표현이 그롷듯하게 들리는 섬 스리랑카는 인도의 끝 동남쪽에 위치해 있어 어딜 가더라도 덥고 매일 세찬 소막비가 심하게 내릴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열대 기후라고는 하지만 의외로 지내기 좋고 기온은 연간 2-3도 정도의 차이로 변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지형에 따른 기온차이는 아주 심하다. 해안지방의 낮은 지역은 열대지방 답게 일년내내 덥지만 중앙 고원 지대인 누와라 엘라야 같은 곳은 연평균 섭씨 16도로 항상 봄 날씨이다 스리랑카 전체는 열대성 몬순 기후에 속하며 적도 부근에서 불어 오는 남서 몬순과 벵골만에서 불어오는 동북 몬순의 영향으로 우기와 건기가 찾아온다.
11월-3월
동북 몬순기로 벵골만에서 오는 몬순이 섬의 동북부를 중심으로 하여 스리랑카 전체에 비를 뿌린다.
4월
일년중 가장 더운 시기이며 때때로 저기압에 의한 비나 해양풍에 의한 뇌우가 있다.
(주 식사인 카레)
스리랑카 사람들은 오로지 카레만 먹고 살며 아침에도 카레 점심에도 카레 물론 저녁에도 카레를 먹는다. 스리랑카는 불교국이지만 고기에 대한 제약은 없으며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등 무엇이던 먹으며 국토가 자연의 혜택을 입어서인지 몰라도 풍부한 생선이나 야채를 넣어 만든 카레 종류도 매우 많다. 그런 카레를 밥이 담긴 접시에 조금씩 옮겨 담아 손으로 주물럭 주물럭 섞어서 먹는 것이다.
그런데 스리랑카 카레의 특징은 맵다는 것이며 여러 종류의 향신료를 섞어 혀끝이 찌리할 정도로 매운 카레를 만든다. 외국인에게 특별히 덜 매운 카레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그렇게 매운 카레를 먹을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스리랑카의 빵은 의외로 맛이 좋의며 별로 맛이 없을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식빵이나 핫도그용의 가늘고 긴 빵도 있으며 스리랑카의 음료수라고 하면 뭐니뭐니 해도 홍차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론티의 원산지인 만큼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홍차를 즐긴다. 날씨에 관계없이 뜨거운 홍차에 설탕을 듬뿍 넣어 마시는 것이 스리랑카식 홍차이다. 설탕물처럼 단 홍차를 마시고 싶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별도로 설탕을 요청하는것이 현명하다 매운 카레와 뜨겁고 달콤한 홍차는 단연 스리랑카의 먹거리의 상징인 것이다.
(역사)
지금도 신할라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얼리 퍼져 있으며 옛날 인도에서 숫사자와 뱅골의 여왕사이에서 쌍둥이 남매가 태여났다. 아들은 커서 사자를 죽이고 여동생과 결혼하여 라라국을 건설했다 지삭복이 많았지만 큰 아들 윗샤야는 무리를 지어서 온 나라를 어지렵히고 돌아 다녔다.
그래서 결국 배애 태워 추방해 버렸는데 스리랑카에 도착한 그는 야차를 정복하고 신할라 왕국을 건설했다. 이 일족은 사자를 죽인 신할라라고 불리게 되였다.이 이야기는 6세기경에 편찬된 책인 마하완사에도 있는 왕권신화의 한 대목이다.안타깝게도 스리랑카는 민족주의 자들은 이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으며 따라서 신할인은 북인도에서 왔다.
이 섬에서는 신할라인이 최초로 개화된 민족이며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은 신할라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학문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오히여 19세기에 이르기 까지 인도 남부에서 온 이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고대에는 작은 나라가 여기 저기 있었는데 어느 한 나라가 불교를 받아 들여 강대화한것 같다는것이 합리적인 스리랑카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왕조사 채색되는 고대에서 중세로)
기원전 3세기 부렵부터 아누라다푸라를 도읍으로 하는 신할라 불교 왕국이 번성했으며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로마와의 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도읍은 불교의중심지가 되여 법현과 같은 승려는 멀리 중국에서도 유학을 왔다. 이러한 번영은 대규모 저수지를 이용한 관계로 풍부한 쌀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이며 판디야나 쵸라등 타밀의 여러나라로 부터 온 원정군과 자주 전쟁을 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민족적 대립관계는 없었다.
전쟁은 왕권간의 문제이며 신할라 왕실의 왕위 계승 다툼에 타밀인이 용병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동맹이나 혼인관계도 있었다. 불교도와 힌두교 사이에도 항쟁이 전혀 없었는데 그 이유는 7세기경 남인도에서 힌두교 복고주위가 강해지기 전까지는 타밀 지방의 여러 나라들도 불교를 널리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도읍은 풀론나루와로 옮겨 졌는데 13세기 무렵에는 건조지대를 중심으로 한 국가가 급속도로 쇠퇴한다.
왕과 백성들은 남부의 습지지대로 계속 이주했고 건조지대에 세워졌던 사원과 왕궁 저수지는 버려져 정글로 변해갔다. 그 무렵 자후나 지방에는 타밀 왕국인 아루파나무가 건설되었다. 이주의 원인에 대해서는 타밀 세력의 압박 또는 기후의 변화 말라리아의 발생과 과잉개발등의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독림을 향한 길)
19세기 중반에 커피농장이 생기자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 났으며 노동력이 필요해 남이도에서 타밀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토착민인 싱할라인 타밀인 무술림 사이에서 발생한 상업 자본가를 중심으로 엘리트층이 형송되었다. 이들은 점차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며 종교 부흥운동이였다. 사원 학교와 부료 학교가 건설되였고 불교 교육이 추진 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경제적 종교적 배타주의의 색채를 짙게 띠고 있었다. 그들의 공격은 그리스도를 믿는 지배자인 영국인에게만이 아니라 타밀인과 무술림 카토릭 교도인 심할라인에게도 겨누워졌다. 스리랑카에 있어서 최초의 민족 폭동이라 할수 있는 신할라와 카톨릭의 충돌은 이미 1883년에 콜롬보에서 일어 났다.
(고뇌하는 현대사)
저항운동의 파도는 점점 높아 졌으며 마침내 의회제도의 도입과 헌정개혁의 과정을 거쳐 1948년2월4일에 독립이 실현되였다. 그러나 여전히 스리랑카 민족주의는 형성되지 않았다.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는 통일국민당과 자유당 두 정당 사이의 정권다툼으로 일관되였다. 1956년 자유당의 반다라나이케 정권이 신할라어 공용어법을 제정하자 타밀족은 강력하게 반발하여 연방제 아래에서 자치를 요구했다.
1972년 자유당 평등사회당 공산당의 통일 전선 정권이 헌법으로 불교에 준 국교적인 지위를 부여하자 타밀인들은 드디어 타밀 이라무국의 불리 독립을 요구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절은이들은 독립을 부르짖으며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1983년에 반 타밀 대 폭동이 일어나 많은 희생자가 나오자 타밀 게릴라들의 반격은 거세어 졌다 마침내 1987년에는 인도가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연방제의 태두리안에서 타밀인들에게 대폭적인 자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일단 타협이 이루어 졌다.
분리 독립은 타밀인들의 2류 시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거부하는 방편이었지만 민족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타밀 이라무 국이 독립한다고 해도 그 지역안에는 또 신할라인과 무술림 등 소수민족이 포람되여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부의 무슬림은 몇년전부터 독자적인 정치 조직을 만들어 타밀인의 지배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현대정치는 통치의 잔재 이웃 아라인 인도의 정치 상황등과 깊은 관계를 지니며 민족분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분출되어 온 셈이다.
(카스트 제도)
스리랑카에도 카스트 제도가 있으며 이 제도에 대하여는 인도와 비교(인도의 카스트 제도에도 뚜렸한 차이가 있음)해 보면 쉽게 알수 있다.우선 인도의 브라만에 해당하는 최고 지위가 없고 위계제도(브라만을 최고로 하고 수드라를 최하위에 두는 제도)가 없는 것이 특색이다. 신할라인과 타밀인이 각각 웰라라 고이가라 하는 농민 카스트가 상위라고 하지만 실은 이 카스트가 인구의 약 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가 여러가지 기능을 전통적으로 담당하는 직업 카스트이다.
신할라의 카스트는 옛날 왕조의 정치체재와 관련이 있다. 1818년에 멸망하기전까지 고지에서 이어져 온 왕국의 영토는 국왕의 직활지와 국왕이 귀족(관료)사원등에 하사한 토지로 나누워져 있다. 이들 토지의 영주는 국왕에게 하사받은 토지의 점유권을 가지고 수확의 일부나 부역을 국왕에게 바치는것이 의무였다. 토지를 실제 경작하던 사람들이 농민 카스트이고 그들의 촌락주위에는 여러 카스트의 촌락이 있어 상호 보완 적인 분업체재였다.
이와 같은 체재를 라자카이라 제(라자 국왕 카리야 부역)라 부른다. 이처럼 카스트제도는 국왕-영주-농민형태의 경제적 사회적 계층구조로 이해 하는것이 적절하다 영국의 식민지 체재가 들어선 이후에 이 제도가 해체되어 카스트의 구성원도 농지를 보유하게 되면서 전통적인 직업 집단으로서의 기능도 거의 사라져 갔다. 애초 카스트를 의미하는 신할라어는 없고 이들을 표현할때에는 신할라어로 친구 또는 사람들의 모임등을 의미하는 캇티야란 말을 사용했다.
분명히 스리랑카의 카스트는 인도의 영향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유럽인들이 분업 집단의 분류를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같은 용어로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했던데서 오해가 생겨 오늘날에 이른것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그러나 의식을 할때에는 그 의식을 주재하는 특별한 역활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해 정 또는 부정 이란 개념이 뚜렸해 진다. 옛날부터 살던것이 아니고 떠 돌아 다니며 살던 집단도 정착해 가는 중에 기존제도와 사회구조의 밖에 있다고 하여 아주 낮은 카스트로 구별되였다.
타밀 사회에서 최고 지위가 없다는것은 이미 이야기 했지만 브라만이 종교 직능자라는 지위에만 존재하는 점이 인도와 다르다 그러나 소위 건드릴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점에서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유사하다고 할구 있다.
(스리랑카의 별 점보기)
스리랑카에서는 인도와 마찬가지로 별을 보고 점보기가 성행하고 있으며 신문지사에도 그 날의 길시 흉시 운세등이 게제되여 있고 일요일판에는 점성술에 관한 화제가 특집으로 꾸며지는 일이 매우 많다. 개인의 생일과 출생시간에 근거한 별 점이 그사람의 그때 그때 운세 특히 결혼 할떼의 궁합등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뿐 아니라 국가적인 행사의 개시 시간을 결정할 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옛날 우리나라에서 길흉을 여러가지 행사를 계획했던 것과도 상통하는것이라고 볼수 있다. 이처럼 우주의 운행에 근거한 생활규제는 특히 젊은이가 결혼을 생각할 때 카스트 신분과 여성의 지참금 그리고 궁합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스리랑카 신문의 일요일판에는 구혼광고란이 있어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광고가 게제되는데 그 광고에도 이러한 단서가 붙어 있다.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라고 애세우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이런 조건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볼수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부모나 친척등이 중간에 끼는 맞선을 통한 결혼이 대부분이고 자유로운 연애결혼 특히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은 큰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특정 카스트로 태어나는것은 그 사람의 업에 근거한 운명이며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인 것이다. 그리고 넓게는 그 사람이 타고 난 별의 영향이라 생각한다.
결혼이 개인간의 매듭이 아니라 가족간의 매듭이란 성격을 강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미 혼인관계가 있는 친족간의 결합을 선호하는데 이때는 지참금이 별로 무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관계가 성립 될때나 도시의 부유층에서는 신부측이 신랑측에게 지참금을 보내야 한다. 이퍼럼 스리랑카에는 인도의 영향아래 별 보고 점보기등 우주의 운행을 기준으로 한 세계관이 일상생활을 크게 지배하고 있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은 서구와 인도등의 복잡한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해와 달을 기준으로 한 몇가지 체계가 혼란을 낳고 있는 것이다.
(스리랑카아의 풍습)
(인사방법)
인사는 양손을 잡고 가슴께에 모아 합장한다음 아유보완이라고 한다. 아주편리한 말로 만날때나 해어질때 언제나 쓸수 있는 인사말이다. 또 이에 대답하는 말로 아유보완이라고 하면 된다.
(카레는 오른손으로)
스리랑카 사람들이 손으로 카레 먹는 모습을 보고 경멸하는 여행자들은 흔히 볼수 있으며 밥에 섞여 있는 작은 고기가 생선의 뼈를 포크나 나이프로 초리하기에는 어렵다 오른 손의 제1관절을 이용하여 카레를 섞어 먹는것이 자연스런 모습이다.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잘 관찰하여 흉내 내 보는 것도 하나의 좋은 체험이 될것이다.
(사원방문)
사원을 방문할때는 모자와 신발을 벗고 조용히 참배하십시다. 사원은 신성한 지역이며 큰 소리로 이야기 한다거나 소리내어 웃지 말아야하며 불탑등을 구경하러 가면 바닥이 햇볕에 데워져 발바닥이 따가운 경우도 있음으로 양말은 그데로 신고 들어 가는것이 매우 좋다 근처에 꽃을 파는 곳이 있다면 꽃을 사서 헌화하고 깨끝한 마음을 가져 본는것도 바람직 하다.
(주요 여행지 소개
(코롬보)
콜롬보는 스리랑카의 최대의 도시이며 아시아와 유럽을 있는 해상수송의 중계지로서 발전해 왔으며 지금은 이 나라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콜롬보시의 인구는 1987년에 약 67만명 그 뒤로 계속 증가한 것을 감안한다면 수도권의 인구는 120만명을 훨씬 넘어 보인다. 현재도 인구는 계속 증가 콜롬보는 점차 비대해져 가기만 하다 남국의 풍취가 물신 느껴지는 스리앙카니지만 콜롬보만은 특별하다. 아침 저녁의 러쉬 아워에는 교통체증이 다반사이며 그 소란도 대단하다. 길 가는 사람들로 다른 도시에 비해 멋을 부린 젊은이블과 부유해보이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뜬디.
1985년1월 콜롬보에서 동쪽으로 약10km떨어진 곳에 스리 자야와르다나풀라라는 새로운 수도가 생겼지만 .실질적인 수도는 아직도 콜롬보라고 할수 있다. 콜롬보 시 북쪽에 있는 케라니야는 비교적 역사가 짧은 이 주변에서 아주 귀중하고 오래된 불교 사원이 있는 도시이다. 또 남쪽에는 마운트 라비니아라고 하는 휴양지가 있어 식민지시대에 세워진 리조트 호텔 등이 있으며 언뜻 보기에 대도시로서의 모습만 눈에 비치는 콜롬보이지만 주변에 국경거리가 상당히 재미있는 곳이다.
(캔디)
열대의 섬나라 스리랑카는 중앙부 일대에는 1000m가 넘는 산들이 줄지어 있으며 이지역은 열대이면서도 기후가 온난하고 물이 풍부해서 영국 식민지 시대에 홍차 재배로 개발된 곳이다. 구래서 이 지역은 산은 거의 홍차밭이다. 산의 정상까지 홍차가 프르게 덮여 있고 그 사이를 아름다운 폭포와 푸른 시내가 수 놓는다. 줄지어 서있는 산들의 남서 분지에는 보석의 마을로 알려진 라트나푸라가 있다.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토산품인 보석이 대부분 이 마을의 주변에서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채굴되고 있다.
(세계 유네스코 1988년 제298호 문화유산 지정)
(담블라)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 사원이 있는 담불라는 캔디의 아누라다푸라를 연결하는 간선도로에 있는 마을이며 마을이라 해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사원이 있다는것 조차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될 아주 작은 마을이다. 간선도로와 쿠루에갈라에서 뻗어 나온 길이 닿는 부근에 펼쳐지는 시니가는 그래도 아름답게 북적이지만 2km정도 남쪽에 있는 구 시가는 양쪽 도로변에 집들이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다.
그래도 담불라가 스리랑카에서도 널리 알려진 마을이 된것은 그만큼 이 석굴사원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바위산 정상 부근에 뚫린 이 천연 동굴에는 극채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고 아주 많은 불상이 조각되여 있다. 이 석굴에 들어가면 그것들이 놀라운 박력으로 다가와 신성한 느낌을 받지 않을수 없게 된다. 불교 설화를 그린 수많은 벽화가운데는 신할라인과 타밀인 사이의 전쟁을 그린것도 있다.
(시기리아)
시기리아는 고대부터 불교 승려들의 수련장이였으며 5세기 후반에 1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곳을 다스리며 장대한 바위산의 걸작을 남긴 광기의 왕 카샤파의 전설은 스리랑카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있다. 카샤파는 459년 477년에 아누라다푸라를 통치했고 넓은 저수지를 건조한 다투세나 왕의 장남이였다. 카샤파에게는 배 다른 동생 목갈라나가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왕족 혈통의 여인이였고 카샤파의 어머니는 평민이였다.
이때문에 카샤파는 동생에게 계승권을 빼앗길가바 두려워 아버지인 다투세나 왕을 감금하고 왕위를 박탈했다. 동생 목갈라나는 형의 이런 행동을 증오하며 인도로 망명했다. 그후 카샤파는 아버지에게 감춘 재산을 전부 내 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다투세나 왕은 아들을 자신이 건설한 칼라웨아 저수지로 대려가 저수지를 가리키며 이것이 내 재산의 전부다라고 말 했다. 이에 분노한 아들 카샤파는아버지에게 원한을 품고 부하를 시켜 살해한다.
동생 목갈라나의 보복이 두려워 했기 때문이였는지 아버지를 살해한 후회와 고통때문에 카샤차는 신들린 사람처럼 시기리아의 깍아지른 듯한 바위산 위에 궁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7년 후 그는 그의 왕좌를 산 정상의 궁전으로 가져갔으며 그리고 11년후 이복동생 목갈라나가 인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그의 형과 싸우러 왔다. 형재간의 싸움이 한창일때 카샤파가 타고 있던 코끼리가 전진하던 방향에 나타난 수렁에 다리가 빠졌다
통제력을 잃은 카샤파의 군대는 후퇴한다. 혼자 남겨진 카샤파는 단검으로 목을 찔러 자살하고 말았다. 그후 목갈라는 시기리아의 왕궁을 불교 승려들에게 기증하고 수도를 다시 아누다라푸라로 옮겼다. (세계 유네스코 1982년 제294호 문화유산 지정)
(프론나루와)
10세기 말에서 11세기에 걸쳐 스리랑카는 격동기를 맞았는데 남인도의 쵸라 왕조는 대군을 보내 신할라 왕조의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정복하자 신할라 왕조는 어쩔수 없이 수도를 플론나루와로 옮겼으며 신할라 왕인 비자야바후 1세는 관개설비를 복구하고 국가건설과 불교 보급에 힘을 쏟았다.
그 뜻을 이어받아 12세기에 비자야 바후1세의 손자인 파라쿠라마 바후1세는 관개용 저수지 파라투라마 사무드라와 다수의 건축물을 세우고 플론나루와를 불교 도시로 개발했다 사원이 많아짐에 따라 성역이 되여 태국이나 버마등지에서 승려들이 많이 찾아 오고 있다. (세계 유네스코 1982년 제295호 문화유산 지정)
(아누라다푸라)
석양속에서 거대한 탑이 그림자를 남기며 천천히 어둠속으로 사라져간다. 아누라다푸라 약2500년젼에 이곳은 스리랑카의 최데의 도시였으며 그 문명을 상징이라도 하듯 거리의 곳곳있는 탑은 하늘을 향해 장대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고 수많은 조각은 어느것이나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불교는 이 지역에서 스리랑카 전역으로 그리고 버마 타일랜드 캅보디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이 지역에서 번영했던 왕조는 매우 수준이 높은 문명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쓰고 있는 관개시설이나 상하수도는 그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누라다푸라에서 번영했던 이 왕조는 남인도에서 펴 들어온 침입자와의 거듭된 전쟁끝에 1400여년에 걸친 영화의 막을 내리게 된다. 아직도 스리랑카에서는 민족간의 문제가 끊이지 않지만 분쟁의 시초라 할수 있는 도시는 마치 그런일 따위는 잊은 듯이 평화로운 전경으로 여행객을 맞아준다.
스리랑카 방방곡곡에서 순례하러 온 가족 일행과 근엄한 표정으로 경을 외우는 수도승 나무위에서는 원숭이들이 장난을 치며 오가고 한가라게 오가는 우마타는 마치 유구한 시간속을 지나는듯 하다 (세계 유네스코 1988년 제297호 문화유산 지정)
(관광 명소 소개)
(불치사)
불치사는 캔디 호반의 차분한 풍취를 보여 주고 있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교사원이며 불치사는 살색 벽에 갈색 지붕을 한 신할라 건축양식의 팔각형 불당이 아름답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사원 내에는 크리스탈 바위를 깍아 만든 석가의 좌상 정밀한 조각이 새겨진 돌문 옅은 감색의 화려한 당초 모양으로 만들어진 천장등이 차분한 사원 내부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사원 안에 봉납되여 있는 불치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석가를 화장할때 입수한것이라고 말한다.
그후 4세기에 인도의 오릿사주 카링가 왕자가 머리카락 속에 감춰 실론에 들려와 아누라다풀에 봉납했다. 그 뒤로 수도를 롦길때마다 불치도 함께 이동했으며 마지막에는 캔디에 보관되였다. 불치가 캔디로 옮겨진 것은 1590년 캔디 왕 수리야1세 때였는데 그는 불치를 모시기 위해 2층 건물의 사원을 지었다. 그리고 3대 아래인 신하 왕이 사원을 신축하였으며 불당은 캔디의 마지막 왕 라자신하에 의해 건설되것이다.
팔각형 탑은 19세기 전반 영국점령시대 1796년-1948년에 유치장으로 바뀌었으나 지금은 야자잎 사본이 소장된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불치를 매우 소중한것으로 여겨 왔으며 왕권의 상징으로서 불치가 있는곳이 바로 스리랑카의 수도였다. 16세기 후반 그리스도교인 포르투갈인이 불교도의 혼이라 할수 있는 불치를 빼앗아 인도의 고아지방에서 부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신할라인들은 가짜 불치로 포르투갈인을 속여 진짜 불치는 캔디에 안전하게 보존할수 있었다는 사연도 있다.
사원은 새벽부터 황홍무렵까지 개방되여 있어 참배가 자유롭지만 불치가 있는 방의 문이 열리는 것은 하루에 세번 행해지는 푸쟈때 이다. 이때는 스리랑카 각지에서 모여든 참배객으로 원내가 북적거린다. 악기소리와 더불어 공손히 공물을 바치는 의식이 행해지고 사람들의 진지한 기도가 이어진다. 불치 실물이 공개되는 일은 극히 드물며 실제로 볼수있는것은 작은 다고마 모양을 한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금제 상자이다. 이 상자는 일곱 겹으로 되여 있으며 그 안에 불치가 있다. 불치의 실물이 공개될 때는 금으로 만든 연꽃 모양의 접시위에 놓여진자.
(페라데니야 식물원)
캔디관광에서 빼 놓을수 없는 곳 가운데 하나이며 총면적6평방km의 넓이로 걸어서 전부 구경하려면 꼬박 하루라도 부족할 정도이며 식물의 종류가 4천종 이상이나 된다 그 때문인지 식물원내에는 자가용이나 자전거로도 돌아 볼수 있다. 1821년 식물원으로서 문을 열었는데 그대까지는 14세기의 왕 파라쿠마라 바후3세가 왕비를 위해 만든 정원으로 유명했으며 별명인 로얄 가든은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붙은 것이며 원내는 지금도 그 궁전의 유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또 가는곳마다 동물의 모습을 볼수 있어 자연을만끽할수도 있는 곳이다.
(가달라 데니야 사원)
캔디 주변에는 작지만 매력있는 옛날 사원이 매우 많으며 그러나 한결같이 교통이 불편한 산속에 있다는 것이다. 우선 페라데니야의 서쪽 캔디에서 6km떨어진 가달라데니야 사원이 있다. 스리랑카에서도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1344년에 건립된 석조건물이다. 석상이나 옻칠이 되여 있는 문이 볼거리이며 이곳에서 3km정도 남쪽에는 랑카릴라케내부의 벽화는 300년젼의 것이라고 한다. 반대로 캔디 동쪽으로 약9lkm지점에는 데갈도루와 사원이 있는데 18세기 왕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캔디 왕조기의 양식으로 벽화가 매우 유명하며 당시의 관습이나 풍속을 소개하도 있어 매우 흥미롭다.
(담블라 석굴사원)
도로에서 조금 들어가 토산품을 파는 가게가 늘어선 지역을 빠져 나오면 작은 건물이 서 있다. 이곳에서 표를 사며 너무 작아서 지나치기 쉬운 곳이지만 표를사지 않으면 사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여기서부터 울퉁불퉁하고 미끄러운 바위의 경사면을 올라 간다 중간에 비교적 평평한 곳까지 오면 여기서부터는 계단이다. 상당히 힘이들지만 15분정도 오르면 사원입구에 닿는다.이곳의 높이는 180m정도이지만 평원에 우뚝 솟은 바위산이어서 주변의 숲을 내려다 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20km가량 떨어진 시기리야도 멀리 보이며 입구에서 신발을 맡기고 맨발로 들어간다.
제1동굴(데바 라자 비하라)
이름은신들의 왕의 절 이란 의미이며 가장 오래된 석굴인데 여기에는 이 사원 최대의 불상인 열반불이 누워 있다. 벽과 같은 자연석으로 조각된 것으로 전체 길이가 약14m이며 이 거대한 본존불은 전신이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발바닥만은 빨갛게 불꽃같은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제2동굴(마하 라자 비하라)
위대한 왕이란 절을 세운 도투게무누 왕으로 절안에 그의 석상도 있다. 제2동굴은 담불라 최대의 동굴이며 폭이 약52m깊이가 약25m 높이는 입구 부분이 약6m이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낮아진다. 동굴안에는 56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으나 이곳에서 볼 만한것은 뭐니뭐니해도 벽과 천정에 그려진 벽화이다 석가의 생애 스리랑카의 역사도 그려져 있으며 그 가운데는 신할라인과 타밀인의 전쟁을 그린것도 있어 매우 흥미롭다
제3동굴(마하 알트 비하라)
이름의 뜻은 위대한 새로운 절 이름 그대로 18세기의 57개의 불상이 있는 곳이다.
제4동굴(파스미사 비하라)
이름의 뜻은 서쪽의 절로 좌상이 매우 많은 곳이다.
제5동굴(1915년에 지어진 가장 새로운절)
1915년에 지어진 가장 새로운 절이며 석굴은 이와 같이 제1동굴에서 제5 동굴까지 오래된 순서대로 늘어서 있으며 그러나 제1 동굴의 벽화 대부분은 17세기의 왕 세나라트의 명에 의해 복구되였고 제3동굴을 만들 때에도 많은 벽화가 복구되였다. 복구라고 해도 전에 그려져 있던것을 그대로 재현하는것과 전혀 별개의 그림을 넣는 경우가 있음으로 지금 남아 있는것이 어느때의 그림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시기리야이 프레스코화)
바위산 입구에서 걸어서 20분정도 거리에 있으며 그 중간쯤에 영국이 만들었다고 하는 주위에 청망두른 철제 나선 계단이 이 있으며 이 계단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가 이었다고 한다. 계단은 경사가 심한데다 자주 강한 바람이 불어오곤 하므로 짐은 등에 지는등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오르도록 한다. 계단을 다 오르면 돌출된 바위면에 선명한 색채로 그려진 미녀의 모습이 있다. 5세기의 작품으로 여겨지지 많을 만큼 아름다운 충취를자아낸다. 그 농염한 자태와 신비스러운표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보릴것 같다.
이 벽화는 크게 3층으로 되여 있으며 우선 바위면에 왕겨나 까보나이트(유기섬유)를 석은 타미이른 흙(점토의 일종)으로 발라 굳힌다 다음에는 석회와 모래를 석은 점토로 다시 칠하고 마지막으로 이전보다 더 두껍게 꿀을 석은 석회로 매끈하게 바른다. 그 위에다 야채 꽃 잎 나무 즙등을 재료로한 적 황 노색 안료로 미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카샤파왕이 살해한 아버지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이 미녀 벽화를 그리게 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림속의 여자들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옛날에는 이 바위산 벽에 미녀 들이 500명 정도 그려져 있었다는데 지금 남아 있는것은 18명 뿐이다. 그 대부분이 비바람에 침식디였고 또 그중 몇개는 1967년 반달인의 공격으로 지워져 버렸다고 한다.
(도서관 유적 포트굴 비하라)
저수지 파라쿠라마 사무드라 옆으로 난 넓은 도로에서 숲으로 들어가다 보면 4개의 작은 다고바에 불러싸인 돔 형 건물이 있으며 정적의 땅에 세워진 우주기지 같은 느낌이 든다 이곳은 예전에 도서관이었던 곳인데 야자잎으로 만든 불교 경전이 보관되여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원형으로 되여 있는데 여기서 불전등의 문헌을 낭송했다고 한다.
(바타다게)
쿼드랭글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원형 불탑이다. 사방으로 난 입구에는 각각 문스톤과 가드스톤이 있는데 특히 북쪽 입구에 있는것이 비교적 그 형태를 제데로 유지하고 았다. 가드스톤은 입구에서 악마가 들어는것을 막아서 내부의 본존을 지키기 위해 불탑이나 절 입구에 세웠다. 문스톤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나타내는것인데 아누라다푸라의 것과 무늬가 다르고 숫소도 없다. 옛날 이곳을 참배한 사람들이 이 문스톤 위에서 발을 씼고나서 불탑안에 들어갔다.
이 불탑은 플론나루와가 수도가 되기 이전 7세기경의 것이라 하는데 가운데 있는 다고바는 아누라다푸라의 실라 메가반나 왕이 세운것으로 옛날에는 절의 일부였다. 벽의 조각은 닛상카 말라 왕의 명에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타다게)
바타다게의 거의 정면에 있는 불치사의 흔적으로 12세기에 닛상카 말라 왕에 의해 건설되였으며 문은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 위엄스런 산그크리트 문자의 비문이 남아 있다. 이것은 닛상카 말라 왕을 칭송하는 글이라 하며 비문의 주위에 있는 댄서와 음악가들의 조각도 움직이고 있는것처럼 느껴져 매우 흥미롭다.
(고대의 책 갈포타)
하타다게 동쪽에 있는 야자잎 책 형태를 한 석비(돌책)라는 별명이 붙어 있으며 길이 약9m 폭이1,5m 두께 44-66cm인데 닛상카 말라왕의 멸령에 의해 약100km나 떨어진 미힌탈레에서 가져온 돌에 문자를 새겼다. 비문은 인도에서 쳐들어온 침략자에 관한 내용과 플론나루와 주변의 작은 나라들과의 관계 그리고 닛싱카 말라 왕에 대한 찬양등으로 되여 있다.
(아누라다푸라 최고의 투파라마 다고바)
루완웰리 세야 대탑에서 북쪽으로 약500m떨어진 푸르른 탑으로 4세기 후반에 석가의 오른쪽 쇄골을 모시려고 세운 것이며 완공당시에는 건초를 쌓은 듯한 산모양이었던것 같으나 1894년에 재건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탑 둘레에는 몇개의 돌기둥도 세워졌다. 이것은 탑에 울타리를 치려고 만들어던것 같다. 지금은 스러져 가는 기둥도 있어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루완웰리 세야 대탑)
버스나 열차의 창 너머로 루완웰리 세야 대탑이 보이기 시작하면 차안의 사람들은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누라다푸라에 도착을 알리는것이 바로 이 탑이다. 우완웰리 세야 대탑은 유적지구 중심부에 세워진 거대한 탑이다. 스리 마하 보리수에서 이 탑에 이르는 길은 가로등이 있는 아름다운 석조 보도로 이어진다. 스리 마하 보리수의 돌문을 나와 이 석조 보도를 걷기 시작하면 우선 오른쪽에 로하 파사다라 라고 불리는 돌기둥들이 있다.
로하 파사가를 지나 그 끝에 우뚝선 루완웰리 세야 대탑을 향해 걷는다. 이 탑은 수많은 코끼리 조각에 둘러 싸여 있는데 새하얗고 엄청나게 크다. 바블 세이프라 불리는 만두 모양의 탑으로 높이는 55m이며 처음 완공했을 때는 무려 110m정도의 높이였다고 한2세기의 도투게무누왕 시대에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왕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틱사 왕자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완성시켰다.
도투게무누 왕은 남인도에서 침략해온 티밀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차례의 전쟁이 있었는데 도투게무누 왕 말년에 남인도의 엘라라 왕이 싸움을 걸어 왔다. 이때 사다 팃사 왕자는 선두에 서서 싸우기를 원했으나 아들을 염려한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뒷날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 왕자는 이 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된 아버지를 위해 대나무와 천을 이용해 하루밤 사이에 탑이 완성된 모습을 만들어 죽기 직전의 어비지에게 보여 드렸다고 한다. 우대한 왕 도투게무누 그의 모습은 정문 왼쪽에 있는 조각을 통해 알수 있다.
(스리 마하 보리수)
이수루무니야 정사에서 북쪽으로 약1.2km지점에 아누라다푸라가 불교의 성지라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인식시켜 주는 곳 스리 마하 보리수가 있는 곳이다. 기원전 3세기에 인도 아쇼카 왕의 딸 상가밋타가 인도 부다가야의 보리스 부처가 도를 깨쳤다고 하는 철책을 만들었다. 지금은 많은 순례자가 이곳에 기도를 드리려 와 이 철책에와우(기)를 묶고 석대위에 꽃이나 코코넛등을 공물로 바치고 있다.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순례자들의 모습에서는 부러울 정도의 신앙심이 느껴진다. 이곳의 보리수는 푸르고 무성하지만 수령이 2000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늘다. 그러나 순례자들의 기도를 받아 들일것만 같은 강한 그 무엇이 느껴진다.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목록 소개)
1)시기리야 고대도시-Ancient City of Sigirya(세계 유네스코 1982년 제294호 문화유산 지정)
2)폴론나루와 고대 도시-Ancient City of Polonnaruwa(세계 유네스코 1982년 제 295호 문화유산 지정)
3)아누라드하푸라 신성도시-Sacred City of Anuradhapura(세계 유네스코 1988년 제297호 문화유산 지정)
4)캔디 신성도시-Sacred City of Kandy(세계 유네스코 1988년 제298호 문화유사 지정)
5)갈레 구 도시와 요새-Old Town of Galle & Fortffcations(세계 유네스코 1988년 제299호 문화유산 지정)
6)담블라 황금사원
(Old Town of Galle Port unesco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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