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등본 / 신 용 묵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모의(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2004년>


바람 / 김영태 하모니카연주


 투명한 속 / 이하석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 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쇠 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1980년>


Whispers Of The Sea / Linda Gentill

 

 일찌기 나는 /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1981년>

 
Wind  /  Lee Oskar



국토서시(國土序詩)/조태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1975년>


 어메이징그레이스 / 앙드레 류이



 조국(祖國) / 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구비 구비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1962년>

 
  Just For You / Giovanni Marradi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1968년>

 
떠난 날을 위한 엘레지 / 정용국(vi.)
		

 


 절벽 / 이상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
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1936년>


밤은 길고 산은 비어 / 산사의 명상음악
		



 반성 704 /김 영 승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보고
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1987년> 

  Rancho Deluxe / Tol&Tol	
 


 마음의 수수밭 /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1994 년> 


Love Is Just A Dream / Claude Choe
	



 진달래꽃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Love Is A Melody / Jose Carre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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