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디 신성 도시(Sacred City of Kandy; 1988)

 

 

 

 

 

 

 

 

 

 

 

 

 

 

 

 

 

 

 

 

 

 

 

 

 

 

 

 

 

 

 

 

 

 

 

 

 

 

 

 

 

 

  캔디 신성 도시는 스리랑카 중부의 도시로 수도인 콜롬보(Colombo) 북동쪽으로 약 90km, 캔디 고원[Kandy plateau] 해발 488m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캔디 왕국의 마지막 왕이 건설한 인공 호수 근처에 마하웰리(Mahaweli) 강을 끼고 있다. 1480년경에 처음으로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592년부터 영국이 캔디의 마지막 왕을 몰아낼 때(1815년)까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잠시 점령했을 때를 제외하고, 유럽 식민지 시대에 계속 독립을 고수하였다. 즉 15세기에 건설된 고도(古都)로 18세기까지 싱할라(Sinhala; 사자의 후예) 왕조의 수도였으며,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전통적인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시가지 중앙에는 인공 호수가 있고, 호수의 북안에 있는 달라다 말리가바(Dalada Maligawa) 사원[佛齒寺]에는 석가모니의 이[齒]가 봉납되어 있다고 한다. 새로 취임하는 총리는 이 사원에 참배하는 것이 관례이며, 매년 8월에 대제(大祭)가 열린다. 캔디 왕들의 궁전과 더불어 경관이 아름답고, 교통·상업의 요지이며, 문화·교육의 중심지이다. 현재 캔디는 인구 밀도가 높은 주변 농업 지역을 위한 상업 중심지이다. 쌀을 비롯한 곡물과 스리랑카 차(茶)의 대부분을 생산한다. 석회석도 채석되고 벽돌과 기와가 근처에서 만들어진다. 가까이에 실론대학교와 왕립식물원이 있다. 인구 102,000명(1988)이다.

갈레 구 도시와 요새(Old Town of Galle and its Fortifications; 1988)

 

 

 

 

 

 

 

 

 

 

 

 

 

 

 

 

  갈레 구 도시와 요새는 16세기 포르투갈 인들에 의해 건설되어 18세기경 그 발달의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 유적은 남부 및 동남아시아에서 유럽 인들이 건설한 요새 도시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며 유럽의 건축술과 남부아시아의 전통이 상호 작용한 사례이기도 한다

폴론나루와 고대 도시(Ancient City of Polonnaruwa; 1982)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스리랑카의 중북부 지역에 속하며, 993년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가 파괴된 이후부터 건설된 이 고대 도시는 스리랑카의 두 번째 수도였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에는 촐라 왕조(Cholas)가 세운 브라만 교의 기념물뿐 아니라 12세기에 파라크라마바후 1세(Parakramabahu I)가 만든 전원도시(garden-city)의 놀라운 기념물 폐허가 남아 있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몇 개의 문명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데 특히 브라만 교를 신봉한 정복 세력 촐라 왕조의 문명과 12세기와 13세기 동안 독립을 유지했던 신할리즈 족(Sinhalese)의 문명을 찾아볼 수 있다. 12세기에 과대 망상적인 군주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건설한 이 어마어마한 수도는 역사상 가장 놀라운 도시 건설 중 하나이다. 이는 그 특별한 규모 때문이기도 하고 건물과 자연 환경의 매우 특수한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불교와 신할리즈 족 역사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곳에 있는 부처의 치아는 신할리즈 족 왕국의 수호물로 여겨진다. 비자바야후(Vijabayahu)의 치세 때 만들어진 아타다게(Atadage; 佛齒寺) 속에 넣은 놀라운 유물인 부처의 치아는 신할리즈 군주제의 부적으로 간주되었다. 부바나이카바후 2세(Bhuvanaikabahu II)가 그것을 제거하자 폴로나루와는 쇠퇴했다. 993년 라자라자(Rajaraja)에 의해 아누라다푸라가 파괴되면서 8세기 동안 왕의 임시 거주지였던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수도가 되었다. 정복 세력인 촐라 왕조는 자신들의 종교인 브라만 교의 기념물과 특히 멋진 동상들이 서 있는 시바(Shiva)의 신전들을 건축했다. 신전에 있던 동상들은 현재 콜롬보 박물관(Museum of Colombo)에 소장되어 있다. 비자바야후 1세가 실론(Ceylon)을 재정복했을 때도 이 도시는 수도로서의 역할을 계속했다. 1070년 이후 이곳은 불교 성소로 뒤덮였는데 그 중에서 아타다게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의 전성기는 12세기였다. 당시 두 군주가 연속하여 기념물들을 남겼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1153~1186)는 3중벽으로 된 성곽 안에 굉장한 전원도시를 만들었다. 이 도시의 궁전과 성지들은 전원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뒤따르는 기념물들은 그의 치세 기간에 만들어졌다. 거대한 불상을 잘 보존하고 있는 커다란 벽돌 구조물 랑카틸라카(Lankatilaka), 신할리즈 족 예술의 걸작으로 꼽히는 거대한 바위 조각품이 있는 갈 비하라(Gal Vihara), 자타카(jataka; 本生譚, 부처의 전생을 묘사한 설화)를 묘사한 13세기 벽화인 티반카 필리마게(Tivanka Pilimage) 등이 그것이다. 니삼카말라(Nissamkamalla)는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것만큼 정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뛰어난 기념물들을 빠르게 건축했다. 그중 지름 175m, 높이 55m의 거대한 사리탑인 랑코트 비하라(Rankot Vihara)가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이다. 그 배치와 규모가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다가바(dagaba; 석가의 유골을 넣은 성 건조물)를 연상시킨다. 이 황금시대 이후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마지막에 쇠퇴하기까지 1세기 동안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도시는 타밀 족(Tamils)과 마가 족(Maghas)에 의해 침략당하고 위태로운 체제에 재정복 당했다. 쿠루네갈라(Kurunegala)에서 정권을 세운 브후반나이카부하 2세(Bhuvanaikabuha II)가 침략한 13세기 말까지 이 도시는 정기적으로 수도가 되었을 뿐이다.

 

아누라다푸라 신성 도시(Sacred City of Anuradhapura; 1982)

 

 

 

 

 

 

 

 

 

 

 

 

 

 

 

 

 

 

  아누라다푸라 신성 도시는 노스센트럴 주(North Central Province)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위치하며 ‘깨달음의 나무(tree of enlightenment)’인 보리수 주변에 건설되었다. 이 보리수의 가지는 아소카(Asoka) 왕의 딸이며 비군지의 계율을 만든 상가미타(Sanghamitta)가 기원전 3세기에 가져왔다고 한다. 아누라다푸라 신성 도시는 1,300년 간 실론(Ceylon; 지금의 스리랑카)의 정치적・종교적 수도였으나 993년 타밀 족(Tamil)의 침략을 받아 쇠퇴했다.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이 유적은 궁전, 수도원, 그리고 다른 유적들과 함께 한동안 정글 숲에 묻혀 있었으나 지금은 다시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아누라다푸라를 보면 신할리즈(Sinhalese) 문명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아누라다푸라 지방은 인도 남부의 타밀, 판디아 왕국(Pandyas), 촐라 제국(Cholas) 등의 침략을 받았으나 스리랑카 문명이 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누라다푸라 신성 도시는 수세기 동안 주변의 건축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어마어마한 규모의 다가바(Dagaba; 사리탑)는 눈에 띄는 탁월한 유산으로 이것은 원형 기단 위에 하나의 암석으로 된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는 신할리즈 족 다가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아누라다푸라 신성 도시는 불교의 주요 성지 중 한 곳이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나무에서 기원전 3세기에 가져온 보리수 가지가 자라서 지금은 브라젠 궁(Brazen Palace) 근처의 성소에서부터 유적 중심지까지 펼쳐져 있다. 싯다르타(Siddharta)의 유물은 아누라다푸라에 특별한 종교적인 지형을 그려 놓았다. 아누라다푸라에는 아소카 왕에게서 받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보관하기 위해 기원전 3세기경 티사(Tissa) 왕이 세운 투파라마(Thuparama) 다가바가 있다. 아누라다푸라는 기원전 4세기에 건설되자마자 실론의 수도이며 불교의 신성 도시가 되었다. 서기 1000년 후 이야기로 전해 내려온 ‘마하남의 연대기(The Chronicles of Mahanam)’에 따르면 아누라다푸라는 기원전 380년 판두카바야(Pandukabhaya) 왕자가 세웠다고 한다. 기원전 250년 무렵, 아소카 왕은 자신의 아들 마힌다(Mahinda)를 보내 판두카바야의 손자인 티사를 불교로 개종시키고자 했다. 티사는 불교를 믿는 실론의 첫 번째 왕 ‘데바남피야(Devanampiya; 티사 왕의 다른 이름)’가 되었다. 또한 아소카 왕은 싯다르타가 영적인 깨달음과 진리를 깨우쳤다는 부다가야의 보리수 가지[아슈바타(Ashvattha)]를 딸이자 비구니인 상가미타로 하여금 티사 왕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기원전 2세기 초 타밀의 침략 기간을 제외하면 아누라다푸라 신성 도시는 10세기 동안 항상 실론의 정치적・종교적 수도였다. 타밀의 침략을 무찌르고 브라만교 대신 불교를 중흥시킨 두타가마니(Dutthagamani) 왕(기원전 161~기원전 137)의 치세 때 아누라다푸라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두타가마니는 미니사웨티 다가바(Dagaba Minisaweti), 루완웰리사야 다가바(Dagaba Rubanwelisaya), 브라젠 궁 등의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아누라다푸라는 9세기에 판디야 왕족에게 정복당했지만 상당한 보상금을 지불하고 돌려받았다. 대부분의 유산들은 복원되었지만 기원후 993년 촐라의 라자라자 왕에 의해 파괴된 후에는 복원되지 못했다. 그 후 수도를 폴로나루와로 옮기면서 아누라다푸라는 수도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시기리야 고대도시는 스리랑카 중부에 있는 높이 180m의 화강암 바위인 ‘사자의 산’을 뜻하는 말로 형상이 사자와 비슷하며 절벽 위에 세워진 고대 성채의 유적, 암괴의 서쪽 중복에 뛰어난 벽화가 있어 유명하다. 성채가 세워진 암석 절벽은 경사가 급하며 상단부가 양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정상부의 해발 고도는 349m이며, 주변 평야를 기준으로 한 높이는 180m에 이른다. 역사적으로는 부왕 다토세나(Dhatusena)를 죽이고 477년 스스로 왕이 된 카시야파 1세(Kashyapa I; 477∼495)가 동생 무갈란(Moggallana)의 보복이 무섭고 두려워 시기리야 바위산에 산 아래로는 주변에 성곽과 해자를 설치하고 산기슭 동쪽과 서쪽에는 정원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시가지를 세우고 넓이가 약 2ha인 평평한 정상에는 좁은 계단과 길들로 연결된 요새화된 왕궁을 7년 동안 건설한다. 그러나 11년 뒤 동생 무갈란의 공격으로 카시야파 왕은 전쟁에서 패하고 종국에는 자살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바위산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거대한 사자(sinha)의 벌어진 입처럼 생긴 입구와 목구멍처럼 생긴 좁은 통로(giriya)를 거쳐야만 한다. 시기리야란 이름은 사자산 꼭대기로 연결되는 통로 모양에서 유래되었다. 거대한 사자 입 부분에서부터 오르기 시작되는데 회랑과 계단에 오르면 산 중턱에는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사자 앞 발조각상의 성문 유적이 남아있다. 특히 바위산 암벽에는 천상의 여자들이 그려진 유명한 암벽화가 남아있다. 산 아래로는 연못과 리조트, 마을들과 숲, 그리고 사원들이 뛰어난 경관을 연출하며 시원하게 펼쳐진다.

차트라바띠 시와지 역(Chhatrapati Shivaji Terminus

=Formerly Victoria Terminus; 2004)

 

 

 

 

 

 

 

 

 

 

 

 

 

 

 

 

   인도 서쪽 연안 중앙부의 뭄바이(Mumbai)에 위치한 차트라바띠 시와지 역(Chhatrapati Shivaji Terminus)은 빅토리아 역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정식 이름은 ‘chhatrapati shivaji terminus(차트라바띠 시와지 역)’이지만 이전 이름인 Formerly Victoria Terminus(빅토리아 터미너스)로 더 많이 불리는 것 같다. 인도에는 봄베이→뭄바이, 캘커타→콜카타, 빅토리아 터미너스→차트라바띠 시와지 터미너스처럼 영국 시절의 잔재를 버리고자 이름을 바꾼 곳이 많다. 이 역은 인도 내에서도 눈에 띄는 빅토리아 시대 풍의 고딕 건축물로 인도 고유의 건축 양식과도 잘 결합되어 있다. 영국 건축가인 프레데릭 W. 스티븐스(Frederick William Stevens; 1847~1900)에 의해 1878년 설계되고 디자인 된 이 건물은 ‘고딕 도시’와 ‘국제 무역항’인 뭄바이의 상징이다. 역사는 10년이 넘는 공사 기간을 통해 1887년에 완공되었으며, 중세 후기의 이탈리아 양식을 모델로 삼아 빅토리아 조의 높은 고딕 양식으로 디자인 되었다. 공작새괴물원숭이 등이 건물의 지지대와 작은 탑천장돔 등에 조각되어 있고, 이것은 인도 특유의 궁전 건축 양식을 반영한다. 이 차트라바띠 시와지 역은 영국의 건축술이 인도의 공예가를 만나 인도 전통 건축 양식과 표현 기법을 포함해 독특하게 발전한 새로운 스타일의 건축물로 두 문화가 결합되어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예이다.

엘레판타 동굴(Elephanta Caves; 1987)

 

 

 

 

 

 

 

 

 

 

 

 

 

 

 

 

 

  엘레판타 동굴은 인도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 주 콜라바 구역(District Kolaba)의 엘레판타 섬(Island of Elephanta)에 위치한다. 뭄바이(Mumbai) 인근 오만 해의 엘레판타 섬에 있는 ‘동굴의 도시’에는 시바(Shiva) 신을 섬기는 내용의 암각 작품이 있는 석굴 사원이 있다. 이곳의 주요 석굴 안에서 특별히 거대하고 수준 높은 부조와 가장 완벽한 표현이 담긴 인도 예술을 발견하였다.

   시바 신의 영광스러운 신전이며 힌두 석굴 문화의 전형인 엘레판타 섬은 뭄바이 인근 오만 해 위에 있는 7개의 석굴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석굴은 사원으로 꾸며져 있고 힌두 신화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라져버린 문명에 대한 독특한 증언이다. 이곳의 주요 석굴 안에서 특별히 거대하고 수준 높은 부조와 가장 완벽한 표현이 담긴 인도 예술을 발견하였다. ‘석굴의 도시’, 가라푸리(Gharapuri) 섬이었던 엘레판타 섬은 뭄바이 항구에서 동쪽으로 약 10㎞ 떨어진 곳에 있다.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거대한 코끼리 석상을 발견한 뒤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이 거대한 코끼리 석상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 뭄바이로 옮긴 뒤 본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뭄바이는 오늘날 마하라슈트라 주의 주요 도시로, 인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다. 이 코끼리 석상은 뭄바이에 있는 빅토리아 가든 동물원(Victoria Gardens Zoo)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유명한 엘레판타 동굴의 제작 연대는 뜨거운 논쟁거리이다. 전문가 사이에서는 6세기?8세기라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엘레판타 석굴은 인도의 암각 석굴들 가운데 완성도가 가장 빼어난 수작이다. 석굴은 2개 무리로 나눌 수 있다. 동쪽에는 스투파 힐(Stupa Hill; 언덕 위에 있는 작은 벽돌로 된 불교 건축물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음)이 있다. 스투파 힐에는 석굴이 2개와 여러 개의 저수조가 있다. 석굴 2개 중 하나는 미완성 석굴이다. 서쪽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대규모 힌두 신전이 5개 조성되어 있다. 주 석굴은 시바 신의 영광을 표현한 조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들 조각은 다양한 형태와 동작을 묘사하여 시바 신을 추앙한다. 이 석굴은 가로세로 27m의 정사각형 만다파(mandapa) 양식으로 되어 있다. 석굴 내부는 여러 줄의 버팀 기둥으로 더 작은 공간으로 나뉜다. 전체적으로는 건물 모양을 세심하게 흉내 내고 있다. 석굴 입구에서 북쪽으로 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시바 신을 모신 곳에 오른다. 이곳을 찾은 순례자나 방문객은 큰 그림이 그려진 성벽 2개와 마주친다. 왼쪽은 요기스와라 시바(Yogisvara; 요가의 스승)이며 오른쪽은 나타라야 시바(Shiva Nataraja; 춤의 왕)이다. 이 그림들은 굽타 왕조의 양식과 유사하며 오늘날에도 수준 높은 작품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입구 오른쪽에 있는 작은 신전에는 원통형의 남근상이 있다. 남근상은 초월적인 존재와 모든 에너지의 근원을 상징한다. 이 신전은 사방에 문이 4개 있으며 각 문에는 거대한 드바라팔라(dvarapala)의 형상을 표현한 부조가 서 있다. 드바라팔라는 수호자로서 임무는 신앙이 돈독한 신자를 받아들이고 의도가 불손한 무리를 쫓아내는 것이다. 만다파 양식의 각 벽은 미래의 시바 신의 형상을 거대한 돋을새김(최대 높이 5.70m)으로 표현하였다. 입구 반대쪽인 남쪽 벽에는 머리가 셋 달린 유명한 마하데바의 인상적인 흉상이 있다. 얼굴이 삼면인 마하데바 신은 본질적 요소 3개를 형상화한 것이다. 동쪽 얼굴은 끔찍한 파괴자인 아고라(Aghora) 또는 바이라바이며, 서쪽 얼굴은 미와 환희의 창조자인 바마데바(Vamadeva)로, 여성의 머리로 화현(化現)하였다. 중앙의 얼굴은 타트푸루샤(Tatpurusha)로, 존재의 음양을 다스리고 양성의 조화를 수호하는 신이다. 중앙에 있는 석상 양쪽에 부조를 2개씩 새겼다. 왼쪽에는 양성의 시바 신(Ardhanarisvara)을 표현했고 오른쪽에는 갠지스 강(강가다라)의 물을 관장하는 시바 신을 표현하였다. 중앙 홀의 귀퉁이마다 부조를 10개 더 새겼고 동쪽과 서쪽 통로에는 시바의 전설에서 나온 파르바티(Parvati)와 시바의 결혼식, 악마 안다카(Andhaka)를 무찌르는 시바 신 등 여러 가지 일화를 묘사하였다. 엘레판타 동굴에 있는 남근상을 모신 신전 주위에는 대규모 부조가 15개 있다. 이것은 인도 예술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일 뿐 아니라 시바 신앙을 표현한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손꼽힌다.

 

 디 콘티라는 이탈리아 여행가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풍경'이라고 극찬을 했던...또 2005년 개봉했던 성룡과 김희선 주연의 영화 "신화"의 주요 배경이었던 함피로~~!!!(대마왕 방랑기에서 퍼옴..)

함피 기념물군(Group of Monuments at Hampi; 1986)

 

 

 

비루팍샤 사원

 

 

헤마쿠다 힐

 

 

 

 

 

비루팍샤 사원

 

 

코끼리 우리...사육장..으로 쓰여 졌던곳..

 

 

로터스 마할

이것이 로터스 마할....에게게....좀 실망스럽다.

말그대로 연꽃모양을 본따서 만든 건물이라고 하는데 힌두사원 양식과 이슬람 건축양식이 조합된 것이라고 한다.

 

용도는 왕비의 휴식공간~~!! 

 

빗딸라 사원

 

 

로터스 마할(??)

 

빗딸라 사원의 돌로 만든 전차..

 

아네군디 유적군 중에 젤 볼만하다는 하누만 사원이 있는 아제난드리 언덕으로~~!!

하누만 사원

 

 

 

여기는 하자르 라마 사원...  

 

 

조각들의 상태가 별로 양호하지 못하다....그래도 이런 모습이 묘하게 함피랑 더 잘 어울린다.

  

 

여왕의 목욕탕으로 썼다는 건물....예전에는 문이 있었을까????

없었으면 좀 추웠을거 같은데.....또 너무 깊지 않나???

 

 

각종 계급별의 공중목욕탕과 저수탱크 시설들이 모여 있다.

 

   저기 재단 처럼 생긴게 마하나바다미 디바

비자야나가르의 황제가 전쟁터로 떠나기 전 두르가여신에게 제사올리던 곳이라고 한다.

 

 

 함피바자르 바로 옆에 있는 헤마쿤다 힐로~~!!!

 

 헤마쿤다힐은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 9~11세기에 만들어진 많은 사원들의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언덕 정상쪽에 있던 거네쉬동상

 

  함피(Hampi)는 인도 남부의 카르나타카(Karnataka) 주 벨라리 구역(Bellary District)에 위치한 도시로 장엄하고 엄숙하게 느껴지는 이곳은 마지막 힌두 왕조인 비자야나가르(Vijayanagar) 제국의 수도이다. 상당히 부유한 왕족들은 14∼16세기 여행객들의 찬사를 받은 드라비다 양식(Dravidian)의 사원과 궁전을 건축하였다. 1565년 데칸 무슬림(Deccan Muslim)에게 정복된 이 도시는 6개월 동안 약탈을 당한 뒤 버려졌다. 함피 도시는 비자야나가르 왕조의 사라진 문명에 대한 탁월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왕조는 크리슈나 데바 라야(Krishna Deva Raya; 1509∼1530)가 지배할 때 전성기를 맞았다. 이곳의 구조물들 중요한 역사적 상황을 보여주는 구조물의 뛰어난 사례이다. 이슬람교도의 위협을 받았던 남부 인도의 왕국은 포르투갈령 고아(Goa) 주와 임시로 동맹을 맺기도 했다. 장엄하고 엄숙한 함피 유적은 마지막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르의 마지막 수도였다. 상당히 부유한 왕족들은 14∼16세기 여행객들의 찬사를 받은 드라비다 양식의 사원과 궁전을 건축하였다. 1565년, 데칸 무슬림에게 정복당한 이 도시는 버려지기 전까지 약 6개월 동안 약탈당했다. 남부 인도의 위대한 마지막 왕조 비자야나가르의 마지막 수도였던 함피에서는 면화와 향료 무역이 번성하였다. 이곳은 중세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에 하나였다. 궁전과 드라비다 사원은 아랍의 압둘 라자악(Abdul Razaak)과 포르투갈의 도밍고 파에스(Domingo Paes), 이탈리아의 니콜로 데이 콘티(Nicolo dei Conti)와 같은 많은 여행자들은 궁전과 드라비다 사원을 보고 감탄하였다. 1565년 탈리코타(Talikota) 전투 이후 이슬람교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6개월 이상 약탈당했고 그러고 나서 버려졌다. 이 때문에 인상적인 기념비적 흔적들은 일부는 사라졌고 일부는 되살렸으며, 이로써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함피의 유적이 되었다. 라마찬드라(Ramachandra; 1513년)와 하자라 라마(Hazara Rama; 1520년) 사원은 세부적인 요소가 있는 정교한 구조이다. 세부 요소들은 풍부하게 조각된 벽으로부터 돌출된 붙임 기둥 다발과 작은 원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인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간주된다. 비탈라(Vitthala) 사원의 내부 뜰에는 작은 전차 기념물이 남아 있는데 이 기념물을 주변에는 전차를 끌기 위한 2마리의 코끼리가 새겨져 있다. 이 기념물은 과거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관광객들도 매우 좋아하는 진귀한 창작물이다. 공공건물로는 코끼리 사육장, 여왕의 목욕탕, 로투스 마할, 바자, 시장 등이 있다. 그리고 사원, 인상적인 민간인 복합 건물, 왕족의 건물, 공공건물 등은 거대한 요새 시설로 둘러쳐져 있다. 그러나 이 요새는 1565년 데칸의 5대 술탄의 공격을 방어하지는 못했다.

고아의 교회와 수도원(Churches and Convents of Goa; 1986)

 

 

 

 

 

 

 

 

 

   고아는 포르투갈이 인도를 지배할 때 수도였고 이곳에 남아 있는 교회와 수도원은 당시의 아시아 복음 전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봄 지저스 교회(Bom Jesus Church)에는 그리스도교를 인도와 일본에 전파 하였던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St, Francis Xavier)의 무덤이 있고, 이들 유적은 그리스도교가 정착된 아시아 나라들에 마누엘린(Manuelline) 및 바로크(Baroque) 풍의 예술을 전파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초 포르투갈 군에 점령되어 리스본을 본뜬 새로운 식민시로 재건되었다. 16세기 말에는 무역 도시와 그리스도교 선교 기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60여 개에 이르는 성당·수도원·궁전 등이 세워졌으나 지금은 10여 개 정도의 유적만이 남아 있다. 대성당은 1562∼1619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파사드는 르네상스 시기의 토스카나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종탑에는 고아에서 가장 크고 소리가 화려한 종이 매달려 있다. 건물 내부에 있는 제단 장식벽 맨 아랫부분에는 예수와 12사도가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대성당의 동쪽에는 프란체스코회에서 1517년 창건하였다가 1661년 재건한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성당이 있다. 성당은 외벽이 흰 토스카나 양식으로 되어 있고 오른편에 있는 수도원은 현재 그리스도교의 성상과 현지의 발굴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봄 지저스 바실리카는 1594년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성당 벽면과 종탑은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졌고 내부에는 마루가 깔려 있으며 중심부에는 나뭇조각에 금박을 입혀 장식한 제단 장식 벽이 있다.

 

마말라푸람 기념물군(Group of Monuments at Mamallapuram; 1984)

 

 

 

 

 

 

 

 

 

 

 

 

 

 

 

 

 

 

 

 

 

 

 

 

 

 

 

 

 

 

 

 

 

 

 

 

 

 

  마말라푸람(Mamallapuram)은 인도 남부 타밀나두(Tamil Nadu) 주의 도시로 벵골 만과 접한 항구 도시이며 첸나이(Chennai)에서 남쪽으로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12,000명이다. 마하발리푸람 기념물군(Group of Monuments at Mamallapuram)은 7, 8세기에 팔라바(Pallava) 왕조 때 건축한 힌두교 사원들로 코로만델(Coromandel) 연안을 따라 바위를 파고 깎아서 만들었다. 라타(ratha; 수레 모양의 사원)와 만다파(mandapa; 동굴 사원), 유명한 ‘갠지스 강의 하강(Descent of the Ganges)’으로 알려진 거대한 바위에 새긴 부조가 유명하다. 시바(Shiva)의 영광을 묘사한 수천 개의 조각상이 있는 해안 사원(temple of Rivage) 또한 이 지역의 야외 부조들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7세기부터 9세기까지 이곳에 설치된 기념물군은 팔라바 문명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다. 힌두교 시바 숭배의 중심지 중 하나이며 캄보디아, 안남, 자바 등지에 영향을 미쳤다. 아름다운 대양의 물결을 배경으로 서 있는 해안 사원 또한 중요한 유적지이다. 팔라바 건축 양식의 우수성을 알리는 대표적인 작품이지만 안타깝게도 작품들은 풍화되었으며 희미한 부조 형태로 남아 있다. 198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마하발리푸람은 팔라바 문명을 훌륭하게 증명하는 걸출한 유적이다. 라타와 만다파, 거대한 야외 부조들로 널리 알려진 이 기념물군은 힌두교 시바 숭배의 주된 중심지 중 하나이다. 부드럽고 유연한 조형물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마하발리푸람의 조각품은 캄보디아와 안남(Annam; 베트남 중부의 옛 왕국), 자바(Java) 등 멀리까지 전파되었다. 7세기에 마드라스 남쪽에 팔라바 왕조가 건설한 마하발리푸람 항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고대의 캄부자(Kambuja; 앙코르) 왕국, 스리비자야(Shrivijaya; Srivijaya) 제국[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자바], 참파(Champa; 안남) 제국 등의 동남아시아와 교역했다. 무역 항구로 얻은 명성은 630~728년에 마하발리푸람이 건축되면서 이 걸출한 바위 신전과 브라만 사원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돌을 깎아 만든 라타, ‘아르주나의 고행(Arjuna's penance)’처럼 노천 바위에 새긴 부조들, 고바르다나다리(Govardhanadhari)·아이샤수라마르디니(Ahishasuramardini)의 동굴들, 해안 사원 단지의 이면에 자리 잡은, 잠자는 마하비슈누(Mahavishnu) 또는 차크린(Chakrin)이 있는 잘라사야나 페루말(Jala-Sayana Perumal) 사원처럼 대부분의 기념물은 나라시마바르만 1세(Narasimhavarman I, ‘Mamalla’, 재위 630~668) 시절의 유적이다. 기념물은 다음의 5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모래 속에서 발굴된 것으로 단일한 섬록암을 깎아 건축한 수레 행렬 형태의 라타 사원들이다. 남쪽에 있는 5개의 라타 사원은 가장 유명한 것으로 위대한 팔라바 왕조의 나라시마바르만 마말라 시절(630~668)의 산물이다. 게다가 촐라 왕국의 문서에 따르면 도시의 이름이 마말라푸람(Mamallapuram)이라고 불렸다. 둘째, 얕은 부조로 덮여 있으며 방들처럼 꾸며진 만다파 또는 동굴 신전이다. 비슈누 화신의 행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바라하의 만다파, 다섯 왕자 판다바스의 만다파, 그리고 특히 크리슈나 신의 만다파와 마히샤수라마르디니(Mahishasuramardini)의 만다파가 있다. 세째, 시바의 도상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삽화인 ‘갠지스 강의 하강’을 묘사한 야외의 암석 부조들이다. 현명한 바기라타 왕이 간청하는 대로 시바는 갠지스 강이 지상에서 흐르고 만물을 풍요롭게 하도록 만들었다. 조각가들은 무리 지어 있는 신, 여신, 킨나라(Kinnara), 간데리야(Gandherya), 아프사라(Apsara), 가나(Gana), 나가(Naga), 나기니(Nagini) 등의 신화적 존재를 새겼다. 이 작품의 외부에는 자연적으로 벌어진 틈새가 있는데 이 틈새는 야생 동물과 가축들이 품고 있는 우주의 현상을 암시하기 위해 절벽처럼 구분 지어 표현하였다. 네째, 해안 사원처럼 돌을 깎아 건축한 사원들이다. ‘라자시마(Rajasimha)’ 나라시마바르만 2세(Narasimhavarman II)의 재위(700~728) 시절에 건립되었다. 높은 계단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형식의 탑 형 사원과 시바의 영광에 헌정된 수천 개의 조각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섯째, 다양한 건축학적 형태를 보여 주는 1층부터 3층까지 하나의 암석으로 된 라타 사원들이다. 예를 들어 다르마라자(Dharmaraja), 아르주나(Arjuna), 드라우파디(Draupadi) 라타는 평면상으로 사각형 모양이고, 비마(Bhima)와 가네사(Ganesa) 라타는 직사각형 모양이며, 사하데바(Sahadeva) 라타는 반원형이다. 구조적인 건축 양식은 팔라바 왕국의 라자시마에 의해 대규모로 도입되었는데 해안 사원의 설립에서 절정을 보여 주고 있다. 또 다른 건축학적 아름다움은 대양의 깊고 푸른 물결을 배경 삼아 우뚝 서 있는 해안 사원을 꼽을 수 있다. 해안 사원은 팔라바 건축 양식이 장식미와 특유의 우수성을 뽐내며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기를 대표한다. 이 해안 사원의 조소 작품들은 바닷물과 대기의 작용으로 풍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희미한 부조 형태로 남아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