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 빠진 당나귀처럼 (1) 당나귀가 빈 우물에 빠졌다. 농부는 슬프게 울부짓는 당나귀를 구할 도리가 없었다. 마침 당나귀도 늙었고 쓸모 없는 우물도 파묻으려고 했던 터라 농부는 당나귀를 단념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네 사람들은 우물을 파묻기 위해 제각기 삽을 가져와서는 흙을 파 우물을 메워갔다. 당나귀는 더욱 더 울부짖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웬일인지 당나귀가 잠잠해졌다. 동네 사람들이 궁금해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나귀는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고 털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래서 발 밑에 흙이 쌓이게 되고, 당나귀는 그 흙더미를 타고 점점 높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해 무사히 그 우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옮겨온글 ~~~~~~~

     
    나를 철들게 한 나의 할머니
          -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서 -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아버지가 남기신 빚을 갚기 위해 서울로 떠나신 후, 다섯살이던 저와 세살이던 남동생은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 손에 맡겨졌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기억나는 어린시절이 있겠지요.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시절은 할머니 손에 맡겨지고 1년이 지난..... 여섯살의 봄입니다. 불행히도 제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어린시절은, 지금까지도 제가슴 속에 아픈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날, 도시생활을 하고 있던 친척들이 저와 제 동생 문제로 할머니댁을 찾았습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할머니와 친척들 간에 언성을 높이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안된다는 말씀만 반복하셨고, 친척들은 사는게 힘들어서 도와 줄 수 없다는 말만 거듭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저와 제 동생에게 새옷을 입혀 주고 새신을 신겨 주며, 좋은곳에 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 다. 울먹이시던 할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아버지는 저희 남매 손을 이끌고 문밖을 나섰습니다. 친척들 누구하나 따라 나오는 사람이 없었지만, 할머니는 다르셨습니다. 맨발로 뛰쳐나와 저희 남매를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안 된다. 절대 못 보낸다. 고아원에도, 아들 없는 집에도, 나는 못 보낸다.죽은 내 아들 불쌍해서 이것들 못 보낸다. 니들 헌티 10원 한 푼 도와 달라구 안 헐라니까 보내지 마라. 그냥 내가 키우게 놔둬라.”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목 놓아 우셨습니다. 그날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 제 남동생도 없었겠지요. 할머니의 눈물이 지금의 저희 남매를 있게 해 준 것입니다. 고아원에 가지 않은 것 만으로도, 아들 없는 집에 보내지지 않은 것 만으로도, 저희 남매는 할머니께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인데 그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철이 들 무렵이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친척들께 약속하신 대로 10원 한 푼 받지 않고 저희 남매를 기르셨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시며, 받아오신 품삯으로 생활을 꾸려 가셨습니다. 할머니가 저희 남매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셔야 했는지, 스스로 얼마나 억척 스러워지셔야 했는지,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습니다. 그저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새옷 한 벌 없이 남의 옷만 얻어 입는 것이 불만이었고, 다른 아이들 처럼 학용품을 넉넉하게 쓰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마음 놓고 과자 한번 사 먹을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고, 소풍에 돈 한 푼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고, 운동회 때 할머니랑 함께 달리는 것이 불만이었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다는 이유만으로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나 불쌍한 아이 취급받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배부르게 먹이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새옷 한 벌 사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렸을지, 남의 집으로 옷을 얻으러 다니며 할머니가 얼마나 고개를 숙이셨을지. 넉넉하게 학용품을 사 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소풍간다고 김밥 한번 싸주지 못하고 용돈 한 푼 주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다른 아이들은 운동회 때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을 나이 드신 당신 몸으로 해 주시느라 얼마나 진땀을 빼셨을지, 어디서나 애비, 에미, 없다고 손가락질 받는 손자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을 쓸어 내리셨을지, 그때는 철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그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조금이라도 더 불쌍하게 보여서 뭐 하나 얻으려고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이 싫고 창피할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저희 남매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사셨습니다. 당신의 체면이나 얼굴을 모두 버리시고, 오로지 저희 남매를 위해 사셨습니다. 앉았다 하면 신세 한탄이 먼저 나오고, 불쌍한 손자들 얘기를 풀어 놓으며 눈물을 훔치시기 바빴지만, 할머니가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과자 한 봉지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고, 이발소에서 공짜로 머리를 자를 수도 있었고, 새 연필 한 자루라도 얻어 쓸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철없는 남매를 기르시면서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누구보다 억척스럽고 강 하셨지만, 또 누구보다 여리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가시는 날에는 새참으로 나온 빵을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시는 분이셨고, 1주일에 한번 장으로 나물을 팔러 가시는 날에는 순대를 한 봉지씩 사다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동생과 제가 싸우면 뒤란에 있던 탱자나무 가지로 심하게 종아리를 때리셨지만, 붉은 줄이 그어진 종아리 에 약을 발라주시며 금세 눈물을 훔치시는 분이셨고, 맛있는 과자를 마음껏 못 사줘 미안하다며 부침게를 부쳐주시고, 개떡을 쪄주시고, 가마솥 누룽지에 설탕을 발라주시는 분이셨고,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에는 우산 대신 고추밭 씌우는 비닐로 온 몸을 둘러주시고 빨래집게로 여기저기 집어주시며,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이 너는 우산도 없느냐고 놀리거든, “우리 할머니가 이렇게 돌돌 싸매면 비가 한 방울도 못 들어와서 옷이 안 젖는다더라. 너도 니네 엄마한테 나처럼 해달라고 해봐.”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시던 분 이셨습니다. 비록 가난해서 봄이면 나물을 뜯어다 장에 내 팔고, 여름이면 고기를 잡아다 어죽집에 팔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따다 묵집에 팔고, 겨울에는 손에 마늘독이 베이도록 마늘을 까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의 그 시간들이 스물아홉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행복이라는 걸 몰라서 할머니 가슴을 많이도 아프게 했지요. 저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억척 스러운 할머니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반항적이었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제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제 마음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는 할머니가 미워서 버릇없이 굴기도 했습니다. 할머니가 부끄럽다는 생각은 했으면서도, 고생하시는 할머니가 불쌍하거나 안쓰럽다고 생각해 본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를 생각하며 몰래 눈물을 훔쳐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할머니가 제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사춘기의 저를 이해 못했던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 남매가 아니었다면 혼자 편하게 사셨을 할머니가 손자들을 떠맡은 죄로 불쌍하게 사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철이들 무렵에야 알았습니다. 저와 남동생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각각 천안에 있는 상고와 예산에 있는 인문고등학교에 진학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저희 남매는 주말마다 할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내려갔는데, 그때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그 안에 빵과 우유가 가득했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셨던 할머니가 새참으로 나온 빵과 우유를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셔서 냉장고에 넣어 놓으신 거였습니다. 남들 다 새참 먹을 때 같이 드시지 왜 냉장고에 넣어 놓으셨냐고, 유통기한 다 지나서 먹지도 못하는 데 왜 그러셨냐고 화를 내면, “니덜이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가야 말이지. 니덜 오먼 줄라고 냉장고에다 느놨는디 날짜 지나서 먹으먼 워쩐다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도 할머니를 가엾고, 안쓰럽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제가, 냉장고에 가득하던 빵과 우유를 내다 버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데, 할머니가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가 제가 철이 들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자취하는 제게 김치와 쌀을 갖다 주시겠다고 올라오신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터미널에 나간적이 있었습니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후에 찾아낸 할머니는 반갑게 제 손을 잡으시며 "아침 7시 차 타구 나왔더만, 10시두 안돼 도착허더라. 한 3시간은 이러구 서 있은 모양이여. 기다리다 배고파서 나 먼저 짜장면 한 그릇 먹었다. 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또다시 가슴 한 구석이 아렸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께 화를 냈습니다. “그러게 내가 아침 드시고 천천히 출발 하시라고 안 했어!... 할머니 때문에 속상해 죽겄네.” 할머니는 화가 난 손녀딸의 눈치를 살피시며 들고 오신 가방 지퍼를 여셨습니다. 할머니가 들고 오신 큰 가방 속에는 김치통 두개가 들어있었고, 가방안은 김치통에서 흘러나온 빨간 김치국물로 한가득이었습니다. “내가 할머니 때문에 미치겠네. 김치만 비닐봉지에 꼭 싸서 가져오셔야지, 가방에다 김치통을 통째로 넣어오면 국물이 안 넘친데?” 할머니는 금세 얼굴이 붉어지셨습니다. “이를 워쩌까. 국물이 다 새서 못 들고 가겄다. 내가 언능 수퍼 가서 봉다리 얻어올팅께 지달려라, 이?” 할머니는 터미널 안 슈퍼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얻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김치 통을 봉지 안에 넣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네덜이 지덜언 짐치 안 먹구 사나, 노인네가 버스 안에서 짐치냄새 좀 풍겼기로서니, 그렇기 코를 막구 무안을 줘?” 할머니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차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받으며 안절부절 하셨을 할머니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할머니는 김치 전해 줬으니 그만 가 봐야겠다시며 들고 오신 가방 안쪽 작은 지퍼를 열고 꼬깃꼬깃 접은 만원 짜리 두장을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할머니께서 건네주신 만원 짜리는 빨갛게 물들어서 김치국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던 저는 얼른 매표소로 뛰어가 할머니 차표를 끊어다 드리고 할머니를 배웅해 드렸습니다. 그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시내버스 안에서 얼마나 소리내어 울었는지 모릅니다. 할머니가 젖은 가방에서 꺼내 주셨던, 빨간 김치국물이 뚝뚝 떨어지던 만원 짜리 두장을 손에 꼭 쥐고, 사람들이 가득한 버스 안에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무역회사에 취직한 저는 돈을 벌게 되었고, 이제 할머니를 호강시켜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할머니가 아프시다고 하면 약재시장에 가서 좋다는 약재를 사다 보내 드리고, 할머니 생신이 다가오면 동네 할머니들과 식사라도 하시라고 용돈도 보내 드리고, 주말에 시골에 내려가면 할머니와 장으로 구경도 나가고, 명절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도 사드렸습니다. 처음 할머니를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를 먹던 날, 할머니는 돈가스 한 접시에 음료로 나온 사이다 한잔까지 쭉 비우신 뒤 말씀하셨습니다. “양두 얼마 안 되는 것이 참말로 맛나다, 이?~ 이런 것이먼 몇 접시라두 먹겄다.” 저는 할머니의 그 말에 또 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그까짓 돈가스가 얼마나 한다고 이제서야 사드리게 됐을까. 가슴이 아파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제가 먹던 접시를 할머니 앞에 내어 드렸습니다. 그날 하얗게 서리 내린 할머니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앞으로는 맛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 드리리라. 남들 먹는거, 맛있다고 하는거, 한번씩은 다 맛보여 드리리라. 좋은 옷도 입혀 드리고 멋진 구경도 맘껏 시켜 드리리라. 언젠가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손녀딸 좋은 사람 만나 시집가고, 이쁜 새끼 낳아 사는 거 보고 죽으먼 내가 소원이 없을 것인디” 저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다음 달이면 돌을 맞는 예쁜 딸아이도 낳았습니다. 할머니는 올해로 팔순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우리 남매를 길러 내셨던 할머니는 이제 정말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허리도 구부러지셨고, 검은머리가 한 가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너무 늙으셔서 예전처럼 맛있는 부침게를 부쳐 주시지도 못하고, 개떡을 쪄 주지도 못하고, 누룽지에 설탕을 뿌려 주시지도 못합니다. 뜨거운 밥에 올려먹던 할머니의 얼짠지가 그렇게 맛있었는데, 이제는 그때 그 맛을 내시지도 못합니다. 같이 봄나물을 뜯으러 다닐 수도, 도토리를 따러 다닐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고 할머니를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할머니하면, 낡고 닳아 헤진 고무신 한짝이 떠오릅니다. 헌고무신처럼 평생을 헤지고 가진 것 없이 지지리 고생만 하시며 살아오신 할머니...... 이제 할머니가 제 곁에 함께하실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언제일지 모를 그날까지 제가 할머니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요? 꽃으로 태어났으나 들풀로 사셔야 했던 그분의 인생, 이제부터라도 화사한 꽃으로 사셨으면 좋겠습니 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걸 가르쳐 주신 할머니!... 이제 저는 할머니의 사랑과 고생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철이 들었습니다. 눈부시게 화창한 날.... 우리 할머니 손을 잡고 꽃길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오래전 눈물 나게 아름다웠던 유년의 풍경들을 떠올리며 웃어보고 싶습니다. -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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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의 전설


옛날,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고려에서는 해마다 어여쁜 처녀들을 원나라에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오랑캐의 나라에 끌려가길 바라겠습니까? 할 수 없이 조정에서는 "결혼 도감"이란 관청을 만들어 강제로 처녀들을 뽑았습니다. 이렇게 강제로 뽑혀 원나라에 보내지는 처녀를 "공녀"라 했습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찔레"와 "달래"라는 두 자매가 병든 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가난한 살림에 자매는 아버지의 약값을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몸보다 두 딸이 공녀로 뽑혀 원나라로 끌려갈 것이 더 걱정이었습니다. "찔레야, 달래야. 너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공녀로 끌려가서는 안된다!." "설마 이 산골에까지 관원들이 오려고요? 너무 걱정 마세요."


두 딸은 아버지를 안심시키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집에만 숨어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나물도 뜯고 약초도 캐어 살림을 도와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갈 때면 얼굴에 검댕을 바르고 누더기를 입었습니다. 그 날도 얼굴과 몸을 누더기로 가리고 산으로 갔습니다. 한참 약초를 캐고 있는데 관원들이 나타났습니다.


"여기 좀 와보게. 예쁜 처녀들이 둘이나 있네!" 순식간에 관원들에게 둘러싸인 찔레와 달래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나리, 살려 주십시오. 병들어 누워 계신 불쌍한 아버지가 저희를 기다리십니다. 제발 데려가지 마십시오." "살려달라니 어디 죽을 곳으로 간다더냐? 좋은 곳으로 보내주마. 어서 가자." 아무리 애원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할 수 없이 찔레가 말했습니다.


"나리, 저희는 자매입니다. 둘 다 끌려가면 병든 아버지는 어쩌란 말입니까? 제가 갈테니 동생은 집으로 돌려보내주십시오." "나리 아닙니다. 동생인 제가 가야죠. 그러니 제발 언니는 놓아주십시오." 자매가 눈물을 흘리며 서로 가겠다고 애원하자 관원들도 코끝이 찡했습니다. "사정이 딱하구먼. 좋아, 너희들 우애에 감동하여 한 사람만 데려가겠다."


관원들은 달래를 풀어주고 언니인 찔레만 끌고갔습니다. "달래야 아버지 잘 모셔야한다." "언니, 언니! 어쩌면 좋아요!" 자매는 서럽게 이별했습니다. 다른 공녀들과 함께 원나라에 간 찔레는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났습니다. 비단 옷에 맛있는 음식, 온갖 패물이 넘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찔레는 동생 달래와 아버지 생각 뿐이었습니다. 동생과 함께 날마다 올랐던 뒷산도 그리웠습니다. "달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실까?" 밤낮없는 고향 생각에 찔레는 몸도 마음도 약해졌습니다. "허허 큰일이야. 우리 찔레가 고향을 그리워하다 죽게 생겼구나. 이 일을 어찌할꼬?"


주인은 며칠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찔레를 고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찔레야, 그렇게도 고향이 그리우냐? 할 수 없구나. 집에 보내주마. 그러니 어서 가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거라." 주인의 고마운 말에 찔레는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나리, 정말이십니까?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 날부터 기운을 차린 찔레는 얼마 뒤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지 10년만이었습니다. 고향 마을에 돌아온 찔레는 꿈에도 그리던 옛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달래야, 내가 왔다. 언니가 왔어!" 하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니, 세 식구가 오순도순 살던 오두막은 간 곳 없고, 그 자리엔 잡초만 우거져 있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달래야, 어디 있는 거니?" 마침 찔레의 목소리를 들은 옆집 할머니가 버선발로 달려나왔습니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찔레 아니냐? 응?" "할머니, 안녕하셨어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랑 달래는 어디 있나요? 집은 또 어떻게 된 건가요?" "에구, 쯧쯧, 불쌍하게도..." 할머니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할머니, 무슨 일이예요? 얼른 말씀해 주세요." "찔레 네가 오랑캐 나라로 끌려간 뒤, 네 아버지는 감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단다. 그것을 본 달래는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그뒤로 소식이 없구나." 찔레는 주저앉아 울부짖었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날부터 찔레는 산과 들을 헤매다녔습니다.


"달래야, 달래야! 어디 있니? 제발 돌아오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습니다. 무심한 계절은 눈도 뿌렸습니다. 외로운 산길에 쓰러진 찔레 위로 눈이 덮였습니다.


봄이 되자 찔레가 쓰러진 산길에 하얀 꽃이 피었습니다. 찔레의 고운 마음은 눈처럼 새하얀 꽃이 되고, 찔레의 서러운 운명은 빨간 열매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꽃을 "찔레"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은미 "찔레꽃"


 

   사흘만 볼 수 있다면 / 헬렌켈러

만약 내가 이세상을 사는 동안에 유일한 소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죽기 전에 꼭 삼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눈을 뜨는 첫 순간에, 
나를 이만큼 가르쳐주고 교육시켜준 나의 선생님 에미 살리반을 찾아가겠다. 
지금까지 그의 특징과 얼굴모습을 내 손끝으로 만져 알던 그의 인자한 얼굴 
그리고 그의 아리따운 몸매를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보면서 
그의 모습을 내 마음속에 깊숙이 간직해 두겠다. 
다음엔 내 친구들을 찾아 가고, 다음엔 들로 산으로 산보를 나가겠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무 잎사귀들 들에 피어 있는 예쁜 꽃들과 
그리고 저녁이 되면 석양이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싶다.
다음날 일어나, 새벽에는 먼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 
아침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또 하루를 보내고
마지막 날에는, 일찍 큰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들, 아침에는 오페라하우스, 
오후에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덧 저녁이 되면 건물의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시 한복판으로 나가서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우에 진열되어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내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에 
나를 이 삼일 동안 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신 나의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기도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시아버지의 문자 메시지♠ 

    
 
 내게는 핸드폰 두 대가 있다.

한 대는 내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나라에 계신 시어머님 것이다.
 
내가 시부모님께 핸드폰을 사드린 건
 2년 전 두 분의 결혼기념일에
커플 핸드폰을 사드렸다.
 
문자기능을 알려 드리자 두 분은 며칠 동안
끙끙대시더니 서로 문자도 나누시게 되었다.

그러던 올 3월 시어머님이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셔서 유품 가운데
핸드폰을 내가 보관하게 되었다.
 
그러고 한 달 정도 지날 무렵.
아버님이 아파트 경비 일을 보러 나가신 후
'띵동'하고 어머님 핸드폰으로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여보, 오늘 야간 조니까
저녁 어멈이랑 맛있게 드시구려."
순간 난 너무 놀랐다.

혹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치매증상이
온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함이 몰려왔다.
 
그 날 밤 또 문자가 날아왔다.
"여보, 날 추운데 이불 덮고 잘 자구려.
사랑하오."
남편과 나는 그 문자를 보며 눈물을 흘렸고
남편은 좀 더 지켜보자고 했다.
 
아버님은 그 후
"김 여사 비 오는데 
우산가지고 마중 가려는데
몇 시에 갈까요?
 
아니지. 내가 미친 것 같소.
보고 싶네" 라는 문자를 끝으로
한동안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셨다.
 
그 얼마 후 내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어미야, 오늘 월급날인데 필요한 거 있니?
있으면 문자 보내거라."
 
   
 
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네. 아버님. 동태 2마리만 사오세요"
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 날 저녁 우리 식구는
아버님이 사 오신 동태로
매운탕을 끊인 후 소주 한 잔과 함께
아버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아직도
네 시어미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

그냥 네 어머니랑 했던 대로
문자를 보낸 거란다.
답장이 안 오더라.
제야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알았다.

모두들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아 내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던 것도 안다. 미안하다."
 
그 날 이후 아버님은 어머님 핸드폰으로
다시 문자를 보내지 않으신다.

하지만 요즘은 내게 문자를 보내신다.
지금 나도 아버님께 문자를 보낸다.

"아버님. 빨래하려고 하는데
아버님 속옷은 어디다 숨겨 두셨어요?"
 
[ 옮겨온글, ]


 

 

    

                                     감동을 먹게하는 좋은 내용이라 옮겼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정이 넘치는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옴비 생각~~  

 


2005년 편지쓰기 대회 일반부 대상 작품
성 명 : 김동필
주 소 : 전북 정읍
제 목 : 「보고픈 진아 < -불치병 진단을 받고- >」



진아!
그날 삼성서울병원에서 불치병이라는 진단을 받고서도,
병원문을 나서는 내 마음이 어찌그리 가벼웠던지 나도 의심을 했었다.
불치란 곧 시한부 인생인데도..., 너는 아비의 병을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을 비치더구나.
그날 달리던 고속버스 차창에 어린거리던 너의 아련한 모습,
멀리 떠가는 흰 구름 한 점도 품위 있게 보이고,
지나온 내 인생 역정이 주마등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날 밤, 잠 못들고 뒤척이는 가슴에 시린 바람,
혼자 떠는 문풍지의 울움까지도 고통이었다.
불치란 말 한 마디를 두고, 회억에 눈물짓는
나약한 사내의 몸부림이 측은해 보이기도 했단다.
병원문을 나올 때는 마음 후련했던 내가 집에 돌아와
우는 아이가 되었으니, 참 부끄럼이다.
불덩이 같은 젖먹이 너를 업고, 눈발 흩어지던 밤길을 헤매며
병원문을 두드리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네가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니 인생 칠십 문턱에 들어선
내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은 자연스런 인과였다.
명징한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삶의 미분화는
어려움을 부딪칠 때마다 내 귀에 대고, “
삶과 죽음은 하나이니 초월해야지” 라고 속삭여 주었다.
인간의 삶이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단다. 내 몸,
내가 잘 못 다스려 얻은 병, 어찌 순명으로 받아 들이지 않으랴.

사랑하는 진아, 눈만 감으면 와락 달려드는 선연한 그리움인
너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내가 떠안고 떠나고 싶단다.
나는 이제, “무위뿐이다” 하는, 생각이 밀려 올 때면,
꼭 너를 떠올리며 남은 날을 새겨 간다.
잡다한 미혹의 불씨, ‘나’를 얼른 불태우고 싶고,
때론 인생을 마음껏 치장하고 싶은 환상에서 훨훨 벗어나고 싶다.
진아, 이 아비를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병을 앓아야 천국행 공부를 한다”던 구상 시인의 말도 있지 않더냐.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죽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안했더냐.
죽음이란 삶의 또 다른 표현이겠지.
진아, 넌 열심히 살아야 한다. 네가 그 바쁜 일상 속에서도
틈을 내어 도서관에 들른다니 너무 반갑다.
깨어 있는 영혼에는 세월이 스며들 틈이 없단다.
중요한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이다.
자기 인생에 월계관을 씌운 사람들은 설움의 자리마다
현명한 자기 공부에 충실했던 사람들이다.
네 삶의 영광은 너 자신의 고통을 먹고 자란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한다.

진아, 나는 어제 밤 촛불을 밝혀 놓고, 유서를 썼단다.
천길 절벽 앞에서 내 생애와 대화를 나눠 본 것이다.
그런데 유서를 쓰는 마음이 부끄러움 범벅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맑게 울리는 물결 한번 되어준 일 없고,
길을 잃은 자를 위해 내 몸 한번 태운 적이 없으니 사실
낯 뜨거운 유서가 될 수 밖에...,
인생을 낭비한 죄가 너무 커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사를 마무리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땐
마음이 참 편하더구나.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귀거래사를 쓸때,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인데도 벼슬 살이 보다 마음이 편하다”
했다는데 오늘 내 마음이 그 경지쯤 되었던 모양이다.
마음 속의 때를 칼칼히 씻어 비우고 썼던 유서에서일까.
골 깊은 죄의식에서 오는 허심탄회한 참회요, 고백이었을 뿐,
안개빛 원망은 한 점 없었으니 말이다.
내가 떠난 후, 눈물일랑, 아예 거두고, 유서를 꺼내 읽는 것으로
이 못난 아비를 머리 속에서 지워 버려라.

진아, 며칠 남은 인생인지는 몰라도 마지막 주어진 삶을
후회 없이 알차게 마무리하고 싶다.
끝까지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에겐 반드시 새로운 의미의 부활이 약속된다.
나는 이 순간도 스스로 눈을 뜬 완전체이고 싶다.
이성과 지성을 통해 내 마음의 운행을 지배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오늘도 범사를 잊고 플러스 발상을 부츠긴다.
선현의 빛나는 말씀이 이끄는 원력의 길을 가련다.
또한 내 투명한 비원을 사랑한다.
그리고 눈만 감으면 와락 달려드는 선연한 그리움인
너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내가 떠안고 떠나고 싶단다.

진아, 어버이날에 네가 보내준 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책도 사고,
과자도 사고, 빵도 샀단다. 그런데 어제는 스승의 날이라 하여,
한 제자가 정갈한 동양난 한 폭을 보내 주었다.
꽃의 향기도 좋으려니와 그 문향이 더 좋더구나.
내 나이 문향을 알만한 나이 아니냐.
꽃송이 앞에 무정설법을 듣는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
그 꽃 속에 네 얼굴이 사뿐이 와 앉더구나.
허나, 며칠 후면 저꽃도 곧 지겠구나. 내가 저 꽃과 무엇이 다르랴.
인연의 대해에서 부녀 천륜의 정이야
망각의 지우개로도 지울 수 없는 법,
허나 피멍을 들게하는 고통들도 시간 속에 뜨고 지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세월의 물때가 묻어서 무디어 진다니 내 병을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 아비, 나를 정복하고, 나를 복종시킨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불치와 완치가 마음 한가운데 있는 것을...,
진아, 인생은 “생로병사의 아픈 과정이야”
중풍을 앓고 있는 옆집 아저씨의 말이
세월의 테잎에 감겨 있다가 잔잔한 음악처럼 흐른다.
이 편지가 이승에서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기가 될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천진한 아기 웃음 같은 꽃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마른 고독 이야기만 늘어 놓고 말았으니 미안하다.
진아, 이 못난 아비 걱정에 눈시울 붉어진 너의 망운지정을 사랑하고,
고독한 미완의 내 흰 머리칼을 사랑하면서,
남은 날들을 마지막 말인 것처럼 살으련다.

참, 너의 집에서 떠나오던 날, 버스를 기다리며,
네가 사준 호박죽이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시골집에 와서
마구 자랑을 했단다. 그 푸짐했던 단맛의 향수를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극심한 소화불량으로 한 숟갈도 먹질 못했다.
어느날, 눈물이 핑 돌게하는 햇살 같은 밝음 속에서,
우리 다시 만나 그 호박죽 또 먹어 보자꾸나.
그리고 귓속말 늘어놓고 진하게 웃어 보자.
살아 있음에 눈부신 오늘, 너를 부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사랑하는 내 진아, 보고 싶다.
내 그리운 자유가 그곳에 머무르고 있을 것 같아서다.
여름감기가 더 무섭단다. 감기 조심하고...,

서기 2005년 5월 16일
너의 고향집에서, 아비가 띄우다.

 

 

    ♥눈물의 하얀 와이셔츠♥ 

   

"여보! 이리와 봐!"
"왜요?"
"와이셔츠가 이게 뭐야, 또 하얀색이야?"
"당신은 하얀색이 너무 잘 어울려요."


"그래도 내가 다른 색깔로 사오라고 했잖아!"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부터 아내에게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얀 와이셔츠말고
색상 있는 와이셔츠로 사오라고 몇 번이고 일렀건만
또다시 하얀 와이셔츠를 사다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와이셔츠 다시 가서 바꿔와,"
"미안해요. 유행 따라 색깔 있는 와이셔츠를 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당신한테는 하얀색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나, 나 원 참...."

 

출근은 해야 하는데
몇 달째 계속 하얀색만 입고 가기가 창피했습니다.
한 두 번 얘기 한 것도 아니고 신랑을 어떻게 보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건지 이해 할 수가 없었죠. 

 

아내는 방바닥에 펼쳐 있는
하얀 와이셔츠를 집어 차곡차곡 개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하얀색 와이셔츠의 소매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 지금 우는 거야?" "......."
"신랑 출근하려는데 그렇게 울면 어떡해"
"저..., 이 옷... 그냥 입어 주면 안 돼요?"


"왜 그래?"
"아니에요. 어서 출근하세요." 

아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고,
나는 좀 심했나, 아내 어깨를 두드리며 한참을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눈물 젖은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삐리릭 삐리릭!"
점심 식사시간, 마지막 숟가락을 놓자마자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정현주 님께서 보낸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후다 닥 사무실로 들어와 확인을 해보니
세 개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두 개는 광고 메일이고
다른 하나는 조금 전 아내가 보낸 메일 이였습니다. 

"아침부터 당신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
아직 당신한테 얘기하지 못한 게 있는데요.

 


말로 하기가 참 부끄러워 이렇게 메일로 대신해요." 

무슨 얘기를 할 지 조금은 긴장되고 떨렸습니다.
"여보, 제가 어렸을 때 가장 부러워했던 게 뭔지 아세요?


옆집 빨랫줄에 걸려 있는 하얀 와이셔츠였어요.
'우리 아버지도 저런 옷을 입고 회사에 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아버지요,
단 한번도...단 한번도...
와이셔츠를 입어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물론 와이셔츠하고는 거리가 먼 환경미화원이셨지만
줄줄이 셋이나 되는 우리 가족 뒷바라지에
새 옷 한 벌 입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알뜰하고 검소하게 살다 가신 분이세요."

 

지금까지 장인어른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던
아내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그래서 전 당신 만나기 전부터 이런 결심도 했지요."
난 꼭 하얀 와이셔츠를 입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결혼해야지. 

결국은 제 소원대로 당신과 결혼을 했고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당신을 보면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하얀 와이셔츠를 사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화내서가 아니에요
이제야 알았거든요.


하얀 와이셔츠를 입어 보지 못한 나의 아버지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분 인지를요.
늘 조금 굽은 어깨로 거리의 이곳 저곳을
청소하러 다니시는 나의 아버지야말로
하얀 와이셔츠만큼이나 마음이 하얀 분이라는 걸요...

 

그제 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아내가 하얀 와이셔츠만 사오는지,
나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여보, 나 지금 뭐하고 있는 줄 알아?
아침에 당신이 하얀 와이셔츠 소매에 흘린
눈물자국 위에 입맞춤하고 있다 구.
사랑해.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아름다운 이야기 中에서]

 

 

오늘도 기분좋은 하루 되시는지요 ^*^.

잠시 찾을 자료가 필요해서

 

웹 써핑중  가슴이 저미도록

감동을 받은 글이라

이렇게 퍼와서 함께 해본답니다

 

이사람도 하얀와이셔츠를 즐겨입는사람이라

더욱 마음으로 느껴 보는군요 ^*^

한번 입고나면 벗어던지곤 하던생각에 ~~~

 

이사람이

사업 실패하고 마음 아파할때

 포근하게 감싸주며 

맛벌이를 시작한 아내에 대한 고마움 ^*^.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이사람 만나면서 꿈을 접었던

패션 디자이너를 다시 시작 했지만

 

지금은 의상실 관련 업종으로

밤늦게 들어와 벗어던진 하얀 와이셔츠를

깨끗하게 손질해 주던 아내 생각에

눈시울이 붉혀 지네요 ^*^.

 

 오늘부턴 이사람이

손수 세탁하고 다림질도 하고

 

지금 보다도 더 ~ 아끼고

사랑 하렴니다  ^*^ ~~~.

 

우리님들 오늘도 즐겁고

신나게 사랑 하는날 되셨으면 좋겠읍니다

 

 

 

★도봉산 끝자락에서  길록.★ 

 

 

 

    

      

출처 :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글쓴이 : 길록 원글보기
메모 :


* 친구야, 내 대신 아내가 가니 용서해 주게나 * * 그리운 친구에게 * 아침에 출근하면서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네나. 가슴이 찡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지. 서울 쌍문동 "풀무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작가 이철환의 "축의금 만 삼천원"이란 글일쎄. 약 10여년전 자신의 결혼식에 절친한 친구가 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는데 아기를 등에 업은 친구의 아내가 대신 참석하여 눈물을 글썽이면서 축의금 만 삼천원과 편지1통을 건네 주었다.. "친구야! 나대신 아내가 간다. 가난한 내 아내의 눈동자에 내 모습도 함께 담아 보낸다. 하루를 벌어야지 하루를 먹고 사는 리어카 사과장사가 이 좋은 날 너와 함께 할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사과를 팔지 않으면 아기가 오늘밤 분유를 굶어야 한다. 어제는 아침부터 밤12시까지 사과를 팔았다. 온종일 추위와 싸운 돈이 만 삼천원이다. 하지만 슬프지 않다. 나 지금 눈물을 글썽이며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마음만은 너무 기쁘다. 개 밥그릇에 떠있는 별이 돈보다 더 아름다운 거라고 울먹이던 네 얼굴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아내 손에 사과 한봉지를 들려 보낸다. 지난밤 노란 백열등 아래서 제일로 예쁜 놈들만 골라냈다. 신혼여행가서 먹어라. 친구여~ 이 좋은 날 너와 함께 할수 없음을 마음 아파 해다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해남에서 친구가"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사과 하나를 꺼냈다. 씻지도 않은 사과를 나는 우적우적 씹어댔다. 왜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다 떨어진 신발을 신은 친구 아내가 마음 아파 할텐데.. 멀리서도 나를 보고 있을 친구가 가슴 아파 할까봐 나는 이를 사려 물었다. 하지만 참아도 참아도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참으면 참을수록 더 큰 소리로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어깨를 출렁이며 울어 버렸다. 사람들 오가는 예식장 로비 한가운데 서서... 지금은 해남에 사는 친구는 조그만 지방 읍내에서 "들꽃서점"을 하고 있고, 이철환작가는 아버지가 산동네에서 고물상을 하던 시절에 겪은 아름답고 눈믈겨웠던 실제 이야기를 담은 "행복한 고물상"이란 책을 냈습니다. [ 지인이 보내준 글이 좋아서 영상에 담았습니다 ]




2007 . 04 . 01 / sun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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